시장의 초미의 관심사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결과가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FOMC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의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기구다.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라고 보면 된다. FOMC 결과가 공개될 시간이 되면 기자도 계속해서 연준 홈페이지를 프로게이머처럼 ‘광클릭’을 한다. 전 세계에서 이 결과를 실시간으로 보기 위해 트래픽이 크게 증가하기 때문에 정말 치열하다. 기자도 컴퓨터 2대에서 창을 몇 개 띄워놓고 0.1초라도 빨리 열리는 화면을 보기 위해서 계속해서 ‘새로고침’ 버튼을 누른다. 특히 이날 FOMC 결과 자료에는 3개월 단위로 업데이트되는 금리 전망을 담은 점도표(Dot Plot), 거시경제전망 자료 등이 나오기 때문에 더 치열하다.
그런데 이날은 사이트가 잘 열리지 않았다. 오미크론 등 신종 변이 바이러스 출현으로 더 혼란스러워진 상황에서 신년을 앞두고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연준이 어떤 길을 택했는지에 대한 관심이 극도로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통상 오후 2시 1분 정도가 되면 폭주했던 트래픽이 감소하며 사이트가 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날은 약 2분 30초가 지났는데도 열리지 않았다. 미국 통신사들이 속보를 날리기 시작하고, 뉴욕증시는 바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에는 FOMC 발표 자료들이 공개되고, 30분 뒤에는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기자회견이 시작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100% 온라인으로만 하고 있다. 1시간 정도 질의응답이 이어지는데, 이날 기자가 기자회견을 듣다가 귀를 의심한 단어가 하나 있었다. ‘지속적(persistent)’이라는 단어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언급을 하던 파월 의장은 “아마도 인플레이션이 더 지속적일 것이며 이것이 인플레이션 상승 압박을 더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파월 의장은 11월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이번 인플레이션은 ‘일시적(transitory)’이라고 주장해왔다. 시장에서는 연준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맹폭격이 가해졌지만 굽히지 않았던 파월 의장이다. 파월 의장은 11월 말 미 의회 청문회에서 ‘일시적’이라는 단어를 철회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날 성명에서도 이런 단어가 사라졌다. 그런데 갑자기 이 단어의 정반대인 ‘지속적’이란 단어를 꺼낸 것이다. 순식간에 180도 달라진 파월 의장의 발언에 다소 어안이 벙벙했다. 시장의 평가를 수용했다는 점보다는 ‘슈퍼 비둘기’ 파월 의장이 앞으로 얼마나 ‘매파’로 바뀔 것인지를 시사하는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오미크론 사태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고 있다. 관광객들이 다시 찾아오며 활기를 찾고 있는 타임스스퀘어 모습.
파월 의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높은 물가상승률이 굳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점도표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느껴졌다. 점도표란 연준 위원들이 무기명으로 연도별 기준금리 전망치를 점으로 표시한 도표다. 연준 내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컨센서스를 모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다. 연준 위원 18명 중 10명은 2022년 금리가 세 차례 인상될 것으로 봤다. 현재 미국 기준금리는 0.00~0.25%이기 때문에 한 번에 0.25%포인트씩 올리면 2022년 말 기준금리는 0.75~1.00%가 된다. 2023년에는 두 차례 인상이 다수 의견이었다. 2년 뒤에는 기준금리가 1.25~1.50%가 된다는 뜻이다.
씨티증권은 “파월 의장이 노동 시장이 대폭 개선되고 있다고 언급한 것은 완전고용 달성이 임박했음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며 “내년 6월 첫 금리인상을 예상하는데 3월로 앞당겨질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월가에서 2022년 3차례 금리 인상은 다소 매파적인 의견으로 분류됐다. 실제 인상은 두 차례 정도에 그치고, 구두로 인플레이션을 관리하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나넷 제이컵슨 웰링턴자산운용 글로벌투자전략 담당 전무가 대표적이다. 제이컵슨 전무는 최근 KIC 뉴욕지사가 주관한 ‘뉴욕국제금융협의체’에 참석해 “연준은 현재 인플레를 통제하기 위해 레토릭을 쓰고 있다”며 “금리를 너무 빨리 선제적으로 올릴 경우 경기가 취약해지기 때문에 2022년에 금리를 세 번 올릴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반수의 연준 위원들은 이제 더 이상 긴축적 통화 정책을 미룰 수 있는 시점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인플레이션이 들불처럼 번지는 상황에 대한 경각심이 뒤늦게 커진 것이다. 지난 11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39년 만에 최고인 6.8%(전년 동월 대비)를 기록했고, 같은 달 생산자물가지수(PPI)는 9.6% 상승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월가가 우려하는 것은 인플레이션의 내용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금·주거비 등 한번 오르면 쉽게 내리지 않는 요소들이 크게 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윤제성 뉴욕생명자산운용 아태 회장 겸 CIO(최고투자책임자)는 매일경제와 한 인터뷰에서 “소비자물가지수가 6.8% 상승했다는 숫자 자체보다는 그 구성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며 “인플레이션이 점점 여러 분야에 걸쳐 더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 우려스러우며 구조적으로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임금, 주거비처럼 한번 오르면 내리지 않는 경직성(sticky) 요소들이 오르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기자가 거주하고 있는 뉴저지주 버건카운티의 경우 주택 렌트비가 2020년 대비 20~30% 올랐다. 뉴욕시로 출퇴근을 할 수 있는 이 일대에는 평상시에도 공급이 부족한 편이다. 여기에 팬데믹 이후에 뉴욕시 콘도(소유권 등록 가능한 아파트 개념)에 살다가 빠져나온 사람들의 주택 수요까지 몰리며 극심한 수급 불균형 현상을 빚고 있다. 스타벅스 50년 역사에 처음으로 노조가 결성되는 등 팬데믹 이후 구인난 속에 임금을 끌어올릴 요소들이 계속 튀어나오고 있다. 법적인 가이드라인과 별개로 현장에서 시간당 최저임금은 15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최저임금뿐 아니라 고소득자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임금 인상 러시가 일어나고 있다. 미국 대형 로펌들의 초임 변호사 연봉이 2021년 처음으로 20만달러(세전 기준·약 2억3800만원)를 넘어섰다.
투자은행 뱅커, 사모펀드·헤지펀드 펀드매니저 등 월가의 고소득 직종도 예외가 아니다. 막대한 유동성이 풀렸지만 이를 운용할 인력이 부족해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 식으로 ‘연봉 튕기기’ 연쇄 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반도체로 대표되는 공급 사슬망 혼란과 물류난은 2022년 상반기에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경직성 인플레이션 구조를 만든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윤제성 회장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이 강조되는 것이 중장기적인 인플레이션 상승 압박 요인이 될 수 있다”며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나서다보면 인플레이션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헤지펀드의 제왕’ 레이 달리오 회장(브리지워터어소시에이츠 창업자)은 “이제 현금에는 인플레이션세(稅)를 지불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던 시기는 1965~1982년이다. 17년간 200% 이상 물가가 오르며 극심한 고통 속에서 신음했다. 이 시기를 ‘그레이트 인플레이션(Great Inflation)’ 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빗대 ‘뉴 그레이트 인플레이션’ 시대가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기저효과라는 것도 사라졌다. 2021년 하반기부터 물가가 안정될 것이라고 전망한 가장 큰 근거가 기저효과였다. 2020년 상반기는 팬데믹 영향으로 국제유가 선물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정도로 물가가 초토화된 영향으로 2021년 상반기에 물가상승률이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2020년부터는 경제가 회복기에 접어들었고, 물가상승률이 평소 수준을 회복했기 때문에 2021년 하반기는 기저효과로 물가 상승폭이 높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완전히 빗나간 전망이었다.
2022년에는 물가가 급등했던 2021년의 기저효과로 인플레이션 수치가 안정될 것이라는 전망이 다시 나오고 있다. 그런데 2022년 인플레이션에 대한 이런 전망이 다시 틀릴 수 있다는 전망이 더 유력해지고 있다.
윤 회장은 “이제 3%가 넘는 물가상승률을 ‘뉴 노멀’ 로 생각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며 “인플레이션은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