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4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윤부근 소비자가전(CE) 부문 사장, 신종균 IT·모바일(IM) 부문 사장, 이상훈 전사 경영지원실 사장과 세트 사업부장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날 ‘세트(완제품) 중장기 경영전략회의’에서 삼성전자 전사 기획팀은 삼성전자가 어떤 미래 먹거리를 마련해야 하는지 중장기 미래 사업 방안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획팀은 사업별 융복합(컨버전스)과 시너지 창출, 뉴 비즈니스 전략을 수개월간 검토해왔으며 미래 사업전략을 조금씩 구체화하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
TV, 휴대폰, 가전 등 각 사업부가 성과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뛰고 있지만 글로벌 1등 조차 한순간에 고꾸라지는 사태를 수없이 목격했기 때문에 현 전성기의 단맛에만 빠져들 수 없는 게 현실이다.
9월 초 ‘휴대폰 강자’ 노키아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에 인수되는 사건은 삼성전자 수뇌부에 경각심을 일깨웠다. 노키아가 단숨에 무너진 것도 충격이었지만 ‘소프트웨어 공룡’ MS가 노키아를 인수해 정보기술(IT) 시장 판도를 흔들려는 시도가 결코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삼성전자 경영진은 미래 사업전략 수립을 사실상 원점에서 재검토할 움직임을 최근 보이고 있다. 보다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중장기 생존전략을 짜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삼성전자 측은 외부 전문가그룹을 총동원해 아이디어를 수집하는 1단계를 거쳐 삼성전자 투비(To-be) 로드맵을 신속하게 수립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MS-노키아, 구글-모토로라의 짝짓기로 세계 모바일 경쟁 구도는 하드웨어와 운영체제를 동시에 가진 애플, 구글, MS와 ‘제조 강자’ 삼성의 4파전 양상이 되고 있다. 여기에 화웨이, ZTE 등 중국 업체들의 추격이 매섭다. 스마트폰 1위 고지에 오른 삼성전자의 입지가 언제까지 탄탄할지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다.
삼성전자 고위 임원은 “삼성이 세계 스마트폰 시장 1위를 달리는 건 좋지만 회사 전체의 매출, 이익에서 휴대폰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높아진 데 따른 쏠림 리스크(위험)가 문제”라고 토로했다.
올 상반기 기준으로 갤럭시폰을 앞세운 IM 부문은 삼성전자 전체 매출에서 62%, 전체 영업이익에서 70%의 비중을 차지했다. 불과 2년 전(2011년)만 해도 각각 41%, 52%였다. 애플과 치열한 1위 경쟁을 벌이는 동안 휴대폰 의존 구조가 고착화됐다.
휴대폰 쏠림 리스크는 삼성전자에만 머물지 않는다.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전기, 삼성SDI 등 삼성 전자 계열사들도 매출의 40% 안팎을 삼성전자 휴대폰 사업에 의존하고 있다. 갤럭시폰에 주로 부품 소재를 납품하는 협력사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의 부침에 따라 삼성그룹은 물론이고 경제 전반에 미치는 여파가 막대하다는 얘기다.
생존전략 어떻게 찾나
삼성의 미래 사업 전략은 크게 투 트랙으로 진행될 공산이 크다. 하나는 TV, 휴대폰, 반도체 등 기존 사업의 지속성을 담보하면서 사업간 융·복합 시너지를 높이는 방안이고, 또 하나는 삼성이 지금까지 하지 않던 신사업을 모색하는 방안이다.
삼성전자가 TV, 휴대폰, PC 등 기존 사업군에서 애플 아이폰 같은 ‘디바이스 혁명’을 일으킨다면 글로벌 전자시장의 주도권을 이어갈 수 있다. 신종균 삼성전자 IM 부문 대표가 지난 4일 독일에서 발표한 스마트시계 ‘갤럭시기어’는 이 같은 시도의 일환이다. 갤럭시폰에서 파생된 웨어러블 디바이스로 삼성이 애플보다 한 발 빨리 출시했다.
스마트TV와 스마트폰 등 스마트기기 간의 연결성을 강화하는 멀티 디바이스·멀티 스크린 전략은 통합 콘텐츠 플랫폼과 자체 운영체제(OS) 같은 소프트웨어 경쟁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아직까지 전자기기 간 연결성이 크지 않지만 정보기술(IT) 융·복합 추세가 빨라지면 각 기기를 통해 소비하는 콘텐츠의 경쟁력이 핵심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국 스마트폰 이용자들의 모바일 트래픽 상당량이 유튜브 시청 과정에서 발생하는데 휴대폰이나 TV, 태블릿 등 하드웨어 기기 간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콘텐츠를 시청하는 환경이 되면 콘텐츠 강자가 게임의 룰을 좌우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콘텐츠 강자인 구글과 애플의 움직임을 삼성이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결국 디바이스와 콘텐츠의 통합성을 고려한 콘텐츠 플랫폼을 구축하는 게 중요 과제다. 소프트웨어를 하드웨어 판매의 보조적 수단으로만 인식할 게 아니라 소프트웨어 경쟁력 자체로 돈을 벌 수 있는 콘텐츠 생태계를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삼성전자가 무선, TV, 가전 등 개별 사업부의 틀을 고수할 게 아니라 ‘TV+휴대폰’ ‘TV+가전’ 등 사업 간 컨버전스를 활성화해 삼성이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없던 시장을 창출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될 수 있다.
삼성전자 측은 휴대폰에 헬스케어 사업을 접목한 ‘모바일 헬스’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모바일 헬스케어 관련 해외업체의 인수·합병(M&A) 가능성도 타진할 방침이다. 세계 TV 1위의 위상을 바탕으로 ‘퓨처(미래) TV’의 흐름도 면밀히 분석할 계획이다.
송재용 서울대 교수는 “노키아는 스마트폰 패러다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아날로그시대 최강자였던 소니도 디지털 전환기 때 삼성에 밀린 것”이라며 “패러다임 급변기에는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와해적 혁신’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주문했다.
송 교수는 “성공한 대기업일수록 기존 제품으로 출세한 사람들이 상층부를 형성하고 시대 변화의 속도에 둔감하기 쉽다”고 덧붙였다. 송 교수는 “사실 노키아는 애플보다 먼저 스마트폰과 앱스토어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지만 기존 피처폰 비즈니스 모델을 침해하는 카니발라이제이션 현상을 우려한 측면이 있다. 만약 전략적 민첩성을 발휘했다면 애플과 삼성에 주도권을 쉽게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언제까지 피 말리는 제조업 위주로 먹고살 수는 없다. 중국이 여러 분야에서 뒤쫓아 오면 위기에 달할 것이다. 창조와 혁신 DNA를 육성해 남들이 가지 않던 영역에서 새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도 기존 사업의 성공을 잊고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연일 독려하고 있다. 이 회장은 올해 초 신년사에서 “더 멀리 보면서 변화의 흐름을 앞서 읽고 삼성의 미래를 책임질 신사업을 찾아내야 한다. 시장은 넓고 기회는 열려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20년의 신경영 성과를 바탕으로 창조경제 패러다임에 맞는 신사업 과제를 발굴해 얼마나 추진력 있게 실천하느냐가 삼성의 또 다른 10년, 20년을 결정할 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