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취업시즌이 되면 한국을 대표하는 주요기업의 구인 현수막이 대학 교정에 즐비했다. 정문서부터 강의실까지 짧지 않은 도로변에 걸려있던 현수막은 고도성장기 대한민국의 상징이었다.
기업마다 학생들을 버스로 실어 날랐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별 생각 없이 올라탄 버스가 평생을 좌우하는 직장이 된 학생들이 적지 않다. 사람마다 입사하기까지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집단적으로 교육받으며 공채 동기로서 동질감을 가슴에 담은 채 각자 배속된 계열사에서 저마다의 직장생활에 빠져들었다.
한때 선택의 대상이었던 대기업 입사는 저성장기에 진입하면서 고시 합격만큼이나 어려워졌다. 매년 수십만 명의 취업준비생들이 대기업 공채를 기다리며 도서관과 학원을 전전한다.
‘취준생의 꿈’이 돼 버린 대기업 공채가 요새 심상치 않다. 지난 2월 20일 자 매일경제신문 보도에 따르면 10대 그룹 가운데 올해 고용계획을 밝힌 대기업그룹은 두 군데에 불과하다. 30대 그룹으로 보자면, 15개 그룹이 아직 올해 고용계획을 정하지 못했다. 대내외적 불확실성이 그 어느 해보다도 높기 때문이다.
대내적으로는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 가능성, 특검 수사기간 연장 여부, 국회의 상법개정안 논의 등 시계제로 상태다. 대외적으로도 미국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주의 공세와 중국의 사드 보복 등이 경영계획 수립을 가로막고 있는 요인으로 꼽힌다.
고용에 관한 대기업그룹의 이런 모습은 작년 초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작년 이맘때 대기업그룹은 전경련을 통해 12만6394명을 뽑겠다고 했었다.
대기업 고용에 관한 통계 수치는 갈수록 암울해지고 있다. 직원 300인 이상 대기업의 취업자 수가 지난해 12월, 4년여 만에 처음으로 뒷걸음친 데 이어 지난달에는 금융위기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달 300인 이상 대기업 취업자 수는 241만6000명으로 1년 전보다 4만6000명 감소했다. 이는 금융위기 여파로 고용시장 상황이 급랭했던 2010년 9월 6만 명이 줄어든 이후 가장 큰 폭으로 감소한 것이다.
취업준비생은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지난 1월 기준 취업준비생은 69만2000명으로 1년 전보다 8만3000명 증가했다. 이 숫자는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3년 1월 이래 가장 많은 것이다.
대기업 일자리는 소위 양질의 일자리로 일컬어진다. 업무능력이 쌓이면서 승진과 연봉상승을 통해 안정된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이른바 중산층 진입이다. 고위 임원으로 올라가면 그 이상의 생활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경기불황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앞으로 대기업 공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의문부호가 붙기 시작했다. 대기업 공채처럼 ‘정부의 요청’과 ‘기업의 수용’ 속에서 이어져왔던 일들이 지속되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공채 제도는 불필요한 제도다.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람을 필요한 만큼만 뽑고 싶은 게 개별 기업의 현실이다. 그동안 대기업 공채 숫자가 그나마 나올 수 있었던 이면에는 국가적 필요에 대한 기업의 적극적 부응이 상당부분 작용해 왔었다.
이 대목에서 걱정스러운 건 한국사회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계속해서 부실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사법고시 폐지, 외무고시 폐지 등에서 사다리를 걷어차는 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경험해 왔다. 사법고시 대신 생긴 로스쿨은 주위의 재정적 뒷받침이 수반되는 사람 아니면 다니기가 사실상 힘든 과정이다. 외교아카데미도 가난한 수재들이 도전하기가 만만치 않다.
저성장 시기에는 사회적 불만이 한꺼번에 분출될 수밖에 없다. 불만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해왔던 시스템들이 약화되는 건 시기적으로나 사회 정의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사회에서 중산층 진입의 주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는 대기업 공채가 기업경영을 옥죄는 대내외적인 불확실성 때문에 흔들리는 모습은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