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순이들의 시대다. 밥보다 빵을 찾는 게 죄악시되지 않는 시대. 별처럼 많은 빵집 중에서도 ‘전국 3대 빵집’으로 꼽히는 곳 중 하나가 대전 성심당이다. 하루 튀김소보로만 1만 개를 파는 이 전국구 빵집은 10년 전 잿더미에서 일어났다.
2005년 1월 22일 토요일 저녁, 성심당에 불이 났다.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초콜릿을 만드느라 정신없는 가게를 불길이 통째로 집어삼켰다. 다행히 직원들은 고가 사다리를 타고 모두 탈출에 성공했다. 성당 미사를 마치고 달려와 화재를 지켜본 가족들은 ‘끝’을 예감했다. 이듬해가 50주년이었다. 구도심은 쇠락하고 있었고,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공세도 거셌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매년 이자만 3억원 이상을 내고 있었다. 본관 옆 건물을 처분할 생각까지 하던 위기에 불까지 난 것이다. 3층 공장이 전소했다. 임영진 대표가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오히려 포기하지 않은 건 직원들이었다. “잿더미 속의 우리 회사 우리가 일으켜 세우자”라는 현수막이 가게에 붙었다. 1월 말 엄동설한에 온 직원이 나섰다. 불에 탄 집기를 손수 세척하고, 중고 제빵 기계를 사러 시장을 누볐다. 화재는 직원들을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빵을 굽고 팔던 공간이 삶의 터전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6일 만에 성심당은 매장 문을 열었다. 광고를 한 것도 아닌데 하루 종일 손님이 줄을 섰다. “대전에 성심당이 사라지면 안 된다”고 손을 잡아주는 손님도 있었다. 화재 후 성심당 매출은 30%가 뛰어올랐다.
▶밀가루 두 포대로 시작한 60년 전국구 빵집
60년 된 이 빵집의 창세기는 보잘것없었다. 임길순 씨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기적적으로 월남했다. 1만4500명과 함께 사지에서 탈출한 그는 진해에 정착해 냉면을 팔았다. 굶어죽지 않는 게 기적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6년을 버틴 진해를 떠나 서울로 향하던 임 씨의 가족들은 대전역에서 열차가 고장 나는 우연으로 이 도시에 정착하게 됐다. 임 씨는 대흥동성당에서 미국에서 지원받은 밀가루 두 포대를 얻었고, 가족의 식량으로 삼는 대신 찐빵 장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성심당의 출발이었다. 이 책은 60년을 버틴 기업으로서의 성심당을 조명한다. 빵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과 나누면서 성장한 동네 빵집은 지역의 자랑이 됐다. 업계 처음으로 주5일 근무를 도입하고, 매출을 공개하며, 이윤의 15%를 직원에게 성과급으로 지급하는 보기 드문 ‘착한’ 기업이기도 하다. 이들의 위기 극복 과정은 경영학 교과서로 삼아도 될 만큼 흥미로운 사연이 많다.
성심당의 첫 터는 대전 역 앞 노점이었다. 막걸리로 발효종을 만드는 법을 배웠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부부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리키는 ‘성심당’이란 팻말을 걸었다. 노점을 벗어나는 데 걸린 기간은 2년. 제과점은 만남의 장소였고, 연인들의 환대를 받았다. 첫 위기는 1980년대에 생겼다. 어느 날 공장장을 비롯한 제빵 기술자 5명이 일제히 종적을 감춘 것이다. 성심당은 오너가 제빵 기술을 가진 빵집이 아니었다. 기술자들에게 의존하다 보니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거나 춤추러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가불을 요구하다 거부당하자, 이들은 결국 빵집을 떠나버린 것이다. 결국 어깨너머로 빵 만드는걸 지켜보던 아들 영진이 학업을 그만두고 제빵에 매달리게 됐다.
▶튀김소보로의 탄생과 위기극복
단팥빵과 크림빵·소보로·도넛이 빵 종류의 전부이던 시절, 새 공장장으로 오용식이 들어왔다. 영진과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다. 기존의 대표 메뉴였던 단팥빵과 소보로, 도넛 세 가지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빵을 고민하던 두 사람은 지금까지 없던 빵을 만들었다. 1980년 탄생 이래 4000만 개가 팔린 튀김소보로의 탄생이었다. 빵을 튀기는 고소한 냄새와 신기한 모습은 행인들의 구경거리가 됐다. 탄생 직후부터 줄을 서던 손님들이 육탄전을 벌일 만큼 인기 빵이 됐다. 성당 종소리를 듣겠다는 바람으로 한적한 목재소 인근에 가게를 연 입지마저 극복할 수 있었다. 훗날 대흥동 일대는 카페·주점·영화관 등이 몰린 젊음의 거리가 됐다. 젊음의 문화를 이끈 주역 중에는 튀김소보로도 있었다.
대전 최고의 빵집이 됐지만, 여름이면 팥빙수가 더 인기였다. 줄이 길어져 싸움이 나기도 했다. 고민하던 영진이 병원에서 링거병을 보관하던 스티로폼 박스를 팥빙수 배달용으로 고안해냈다. 3시간 포장 빙수는 그렇게 탄생했다. 1983년 여름, 전국 최초의 포장 빙수가 탄생한 것이다. 대전 시민은 서울에도 없는 포장 빙수와 생크림 케이크를 만드는 빵집에 열광했다. ‘성심당은 대전의 문화입니다’라는 슬로건이 시민들을 통해 탄생한 게 이때부터다.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1990년대 프랜차이즈 베이커리가 등장했다. 고려당, 신라명과, 뉴욕제과 같은 브랜드에 이어 2세대 파리바게뜨, 뚜레주르의 맹공이 펼쳐졌다. 웰빙 열풍에 기름에 튀긴 소보로는 정크푸드라는 낙인이 찍혔다. 영진의 동생인 기석이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면서 대전 하소동에 공장을 차리고 가맹점을 모집했다. 서울 롯데월드까지 24곳의 가맹점에 빵을 배달했지만, 대전 시민의 입맛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프랜차이즈 사업은 결국 부도를 냈다. 최악의 위기에서 성심당을 구한 건 화재였다. 잿더미에서 복구하는 과정에서 성심당은 대기업과 경쟁을 포기했다. 소박한 재료로 된장찌개를 끓여내는 엄마 같은 존재가 되기로 한 것이다. 먼저 빵 크기를 키웠다. 시식도 화끈하게 하기로 했다. 재개장 후 가장 먼저 응답한 건 시민들이었다. 2010년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신드롬을 계기로 대전의 ‘제빵왕 임탁구’도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미슐랭가이드 그린에 한국 빵집 최초로 성심당 이름이 오르면서 그야말로 전국구 빵집이 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식사로 삼은 빵이라는 소식도 날개를 달아줬다. 현재 400명까지 늘어난 직원들은 내 일처럼 회사 일에 매달리고 있다. 직원들에게 식사와 간식을 제공하고 휴식 공간에는 안마기와 발마사지기도 있다. 대전 역점에는 역사 뒤편에 가건물을 세우고 직원 식당과 휴식 공간을 마련했다. 수차례 실패 위기를 겪은 성심당은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고, 정직한 노동만으로 빵을 빚는다는 자세를 지키고 있다.
성심당은 서울 롯데백화점을 비롯한 곳곳의 파격적인 러브콜을 죄다 거절하고 있다. 이유는 한 가지다. “대전에 와야만 만날 수 있는 빵집으로 그 가치를 지키고 싶다”는 것.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건 사소한 차이며, 운이 아니라 업을 대하는 마음임을 알 수 있는 책이다. 빵 냄새처럼 고소한 이야기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