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생겨도 맛은 좋아”라는 말이 실감날 만큼 맛있는 생선이 아귀다. 깊은 바다에서 사는 심해성의 흰 살 생선이기 때문에 그 특성상 지방과 콜레스테롤이 적어 저칼로리 고급 어종으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귀는 정말 못생겨서 죄송했던 생선이다. 얼마나 흉측하다고 느꼈는지 이름마저 아귀(餓鬼)다. 몸통에 바로 붙은 큰 입이 마치 귀신이 배고파 울부짖는 것 같아 아귀어(餓鬼魚)가 됐다. 아귀는 굶주린 귀신이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다 지옥에 떨어졌는데 배는 산더미처럼 불룩하고 크지만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해서 음식을 삼킬 수가 없는 벌을 받았다. 물고기의 몰골에서 옛날 사람들은 배고파 몸부림치는 귀신의 흉물스러운 이미지를 연상했던 것이니 아귀를 잡아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래서 바닷가에서는 아귀를 물텀벙이라고 불렀다. 잡으면 재수 없다고 바로 바다에 던졌는데 이때 ‘텀벙’ 소리가 나며 떨어졌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어부들이 아예 생선 축에 끼어주지도 않았으니 어찌 보면 못생겼다는 구박보다 더 서럽다.
아귀 구박의 역사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고 광범위했다. 동서양 대부분의 나라에서 아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유는 오로지 못생겼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귀를 제대로 먹지 않고 구박한 역사도 꽤 깊다. 멀리 200년 전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정조 때의 문인 이학규가 영남 지방을 여행하며 현지의 음식을 소개했다. 영남 바닷가 마을에서는 별 괴상한 생선을 다 먹는다며 몇몇 종류의 생선 이름을 적었는데 여기에 아귀도 포함되어 있다. 커다란 입이 몸뚱이에 바로 붙어 있으며 이름은 아귀어(餓鬼魚)이고, 현지에서는 물꿩(水雉)이라고 부른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먹는 음식치고는 참 구차하다”고 표현했으니 아귀가 얼마나 바람직하지 못한 생선 취급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아귀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은 아귀찜이 퍼지기 시작한 1970년대 무렵이다. 아귀찜의 원조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대체로 마산에서 아귀를 이용해 북어찜처럼 콩나물과 미나리, 마늘, 고춧가루 등의 양념과 함께 찜으로 요리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귀라는 생선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전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바로 한국전쟁 무렵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아귀는 어촌마을에서도 즐겨 먹는 생선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아귀의 위상을 바꾸어 놓았다. 한국전쟁 때 부산은 최대의 피난지였다. 엄청난 사람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부산 인구가 전쟁 직전인 1949년에는 약 47만 명이었는데, 전쟁 이듬해인 1951년에는 84만 명으로 만 1년 사이에 두 배 정도가 늘었다. 전쟁 와중에 집계한 공식 통계 숫자가 이 정도이니 실제 부산으로 피난 와서 머물고 있는 실 거주 인구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부산의 인구 증가율은 2배가 아니라 3~4배 이상으로 늘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갑자기 엄청나게 불어난 인구가 먹고살길이 막막했다. 한국전쟁은 준비된 전쟁이 아니라 기습공격을 받은 전쟁이라 전시에 대비한 비축 물량이 충분치 않았다. 원조물자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순식간에 증가한 피난민까지 먹여 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까지 먹었다. 그중 하나가 아귀였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부들조차도 아귀가 잡히면 먹기는커녕 재수 없다고 다시 물속으로 던져 버리는 생선이었지만 전쟁 통에는 그나마도 없어서 먹지 못했다. 이때 담백한 아귀의 맛을 발견하면서 아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에는 아귀찜을 통해 전국적으로 사랑받는 생선이 됐다.
아귀의 어생역전(魚生逆轉)이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진 것도 아니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에서는 예전에 아귀를 가난한 사람이 먹는 바닷가재(Poor Man’s Lobster)라고 했다. 바닷가재처럼 맛있지만 부자들은 먹지 않는 생선이라는 것이다. 얼핏 봐도 입맛 떨어질 정도로 못생겨서 부자들은 먹지 않고 주로 돈 없는 서민들이 사먹었기에 생긴 별명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영국에서도 아귀의 대접이 달라졌다. 전쟁 중 대서양에는 독일의 잠수함 U보트가 활개를 치고 다녔기에 감히 바다에 나가서 제대로 어업을 할 수가 없었다.
신선한 생선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에 아무리 생김새는 못생겼어도 맛이 좋은 아귀를 사람들이 먹기 시작했다. 먹다 보니 생긴 것과는 달리 아귀 맛의 진가를 발견한 모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아귀의 인기는 식을 줄 몰라서 지금 런던에서는 아귀 소금구이가 바닷가재보다 더 비싸게 대접받는다. 배고픈 귀신 아귀가 지옥에서 천당의 천사로 승천한 셈이다.
일본은 조금 다르다. 옛날부터 아귀를 좋아했다. “서쪽은 복어, 동쪽은 아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에서는 아귀가 귀한 생선으로 대접을 받았다. 아귀는 특히 11월부터 2월까지의 추운 겨울철에 맛있다. 일본에서도 겨울 아귀를 최고로 친다. 동짓달 아귀는 그림을 그려서라도 맛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지금도 일본 사람들이 겨울이 되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으로 아귀 나베(なべ)라고 하는 아귀탕을 꼽는다.
일본인들의 아귀 사랑은 뿌리가 깊다. 17세기 말의 에도시대에도 아귀가 고급 생선으로 사랑받았다. 에도시대에는 3조2어(三鳥二魚), 세 종류의 새와 두 종류의 생선을 맛있는 음식으로 꼽았다. 진미로 꼽히는 새가 두루미와 종다리, 그리고 뜸부기 과에 속하는 쇠물닭이라는 물새였다. 일본은 오랜 세월 소고기와 닭고기를 먹지 못하게 했으니 대신 야생의 철새를 즐겨 먹었던 것 같다. 유럽에서도 중세 시대에는 닭고기 대신 철새를 좋아했으니 서로 통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생선은 도미와 아귀를 일품으로 꼽았다. 일본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생선이 도미다. 우리 속담에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일본인들은 썩어도 도미라고 할 정도로 도미를 최고의 생선으로 여기는데, 아귀 역시 도미에 버금가는 생선으로 대접했다.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본식 아귀탕(あんこうなべ)이 별미로 발달한 것도 17세기 후반이다. 이 무렵의 일본은 상업이 발달하면서 경제가 성장할 때였으니까 맛있는 음식을 찾는 수요가 늘었을 때다. 일본식 아귀탕이 발달한 이유로 짐작된다.
일본인은 아귀를 보고 먹지 못하는 부위가 없다고 말한다. 그만큼 아귀를 구석구석까지 발라서 요리하는데 그중에서도 일곱 가지 부위를 맛있다고 꼽는다. 아귀 지느러미는 쫄깃해 식감이 좋고 흰색의 볼살은 담백하며 껍질은 콜라겐이 풍부한데 초무침이 맛있다. 아가미는 전골로 끓여 먹고 아귀의 위도 요리해 먹으며 난소는 일품으로 꼽는다. 때문에 난소 없는 수컷 아귀는 상품가치가 떨어질 정도다.
아가미에서 지느러미, 위까지를 별미로 꼽으면 먹지 않는 부위가 없고, 맛있지 않은 부위가 없다는 소리인데 그중에서도 최고로 꼽는 것은 간(肝)이다. 옛날 일본에서는 홋카이도에서 잡히는 아귀는 일왕에게 헌상했다고 할 만큼 고급 식재료였는데, 바로 아귀 간이 맛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제는 세계적으로도 일본말 안키모(あんきも)로 알려진 아귀 간은 프랑스의 3대 진미라는 거위 간 프아그라와 맞먹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으로 꼽히기 때문에 바다의 프아그라라고도 불릴 정도다. 맛도 마치 실크를 만지는 것처럼 입안에서 부드럽게 사르르 녹는 맛이 프아그라와 비슷하다. 다만 프아그라를 얻기 위해 멀쩡한 거위에게 강제로 먹이를 먹여 지방간을 만들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처럼 아귀 간, 안키모의 수요가 늘면서 아귀의 남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일본의 아귀 사랑은 심지어 아귀를 해체하는 모습까지도 상품화했다. 아귀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요리사가 능숙한 솜씨로 생선을 분해하는 모습을 쇼(Show)로 보여주는 것인데 17세기 말, 일본의 농업서인 <본조식감(本朝食鑑)>에도 소개되어 있을 정도니 3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셈이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75호 (2016년 12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