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공정하지 않다. 텔레비전 중계로 올림픽 경기를 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스포츠가 공정하다는 인식은 선수들이 같은 공간, 같은 조건 아래서 같은 규칙을 지키며 경기를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가령 축구는 11명이, 같은 그라운드에서, 동등하게 전·후반 진영을 바꿔가며 경기를 한다. 골키퍼는 한 명이고, 골대의 규격에도 차이가 없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선수들은 한 트랙 위에서 같은 총소리를 듣고 동시에 출발한다. 출발선이 다르지 않은 것처럼 골인 지점도 다르지 않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표현은, 스포츠 밖의 현장에서 비유적으로 쓰인다. 같은 조건, 같은 룰, 같은 공간, 같은 기회의 제공이 지켜지지 않을 때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하는 운동 경기는 없다. 그러니까 이 표현은, 역설적으로 스포츠의 공정함을 부각시킨다.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경기 결과에 이의 없이 승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 공정함을 전제로 한 것이다. 만일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다면 정정당당하게 싸우라고 요구할 수 없으며 경기의 승패에 이의 없이 승복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스포츠의 공정함의 근거인 ‘같은 조건’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매우 수상한 항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배구 경기와 농구 경기에서는 선수의 신장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키만 크다고 배구나 농구를 잘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키가 크지 않고서는 잘하기 어렵다. 키 큰 선수와 키 작은 선수의 키를 같은 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들 종목에서 조건이 같다 함은, 경기하는 선수의 숫자가 같다는 것 외에 다른 뜻은 없다.
같은 조건을 부여하기 위해 몸무게에 따라 체급을 나누는 경기가 있다. 가령 유도나 레슬링, 역도 같은 경기. 그러나 이들 종목에서도 체중의 차이 외에 다른 조건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신장의 크기나 근육의 양이나 지능 지수의 차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육상 경기에서도 몸무게의 차이와 신장의 차이는 물론 보폭의 차이, 유연성의 차이 같은 걸 문제 삼는 종목은 없다. 이런 식으로 세밀하게 분류하다 보면 조건들의 항목은 셀 수 없이 많아진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말은 똑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말과 같다. ‘같은 조건’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같은 조건’은 허구의 개념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같은 규칙’이라는 것은 어떤가. 규칙을 선수나 팀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니까 공정성의 근거가 될 만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 규칙이 선수들의 실력을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판단할 확실하고 공정한 기준이 되는지 물을 때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가 쉽지 않다. 가령 90분 내내 경기를 압도하며 소나기 슛을 퍼부어도 골을 넣지 못한 팀은 진 것이고, 90분 내내 압도적으로 열세였더라도 단 한 번의 공격 기회를 골로 연결시킨 팀을 이겼다고 판단하는 축구 경기의 규칙을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규칙이 그러하므로 승패가 그렇게 결정되는 것을 공정하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규칙을 인정하면 공정하다. 그리고 우리는 대개 규칙을 인정하지 않을 마음이 없다. 그러니까 경기에는 이기고 승패에서는 졌다는 이상한 말로 이 상황을 이해하고 넘어간다. 그렇지만, 공정하다는 것은 규칙을 지키는 것과 같은 뜻일까.
규칙을 의심하면, 이 규칙이 공정하고 합리적인지 묻게 되면 간단하게 대답하기 어렵다. 다치지도 않았으면서 그라운드에 드러누워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은 정당하지 않은 플레이는, 야유의 대상이 될지언정, 규칙을 어긴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경기 결과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그런 플레이에 의해 경기의 승패가 결정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규칙이 선수들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준거틀로 작용한다고 할 수 없고, 그러므로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
조건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규칙에 대해서도 쉽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스포츠는 공정하다고 믿는 것은 그것이 이미 있고 주어진, 불변의 고정된 제도라는 무의식적인 생각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각이 착각이라는 건 시대의 흐름과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경기 진행 방식이 바뀌는 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양궁이나 사격, 태권도 등의 경기 방식이 텔레비전 시청자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여러 차례 바뀌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불변의 고정된 규칙이란 허구이다. 공정하다는 말이 규칙을 지키는 것과 구별 없이 사용됨으로써 인식의 혼란을 야기시킨 점을 감안하면, 스포츠가 공정하다는 생각이 일종의 심리적 최면 효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스포츠의 공정하지 않음(의 근거가 되는 같은 조건, 같은 규칙)을 문제 삼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경험칙에 비추어 어색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운동장 밖에서 겪은 ‘기울어진 운동장’ 경험이 스포츠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의심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 돌아가는 꼴이 숫자의 같음만을 앞세워 조건이 같다고 우기는 운동 경기의 규칙과 같거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규칙의 기유(旣有·이미 있음)와 불변성을 내세워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제도와 관행들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지 못하게 하고, 현실을 고정불변의 것, 당연한 것으로, 심지어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세상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자기도 모르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포츠는 인생을 닮았다’거나 ‘스포츠는 우리의 삶을 반영한다’ 같은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 줄은 알겠거니와 그런 얕은 관용구로 위안 삼고 넘어갈 일은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해 우선 필요한 일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인식하는 일이다. 같은 조건, 같은 규칙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않고, 그런 말로 현혹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