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북쪽으로 1시간 거리의 작은 도시 로예(후와). 이 조용한 도시에 한국 중견 식품업체 시아스(SIAS)가 지난해 세운 유럽 첫 K-푸드 생산공장이 자리하고 있다. 인근 여러 공장과 이질감 없이 ‘SIAS’란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이곳에 한국인 직원은 1명뿐이다. 현지 주민들의 일터로 자리잡은 공장 안으로 들어서면, 직원들이 흰 위생복 차림으로 분주히 움직인다. 컨베이어벨트 위를 흐르는 만두와 볶음밥에 한글 라벨이 붙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만두’ ‘볶음밥’이라는 단어가 프랑스어와 함께 나란히 적혀 있다.
생산라인 직원 중 한국인은 단 한 명도 없다. 철저한 현지화를 위해 레시피 결정에는 최진철 회장도 개입하지 않고 실무진에 전권을 맡긴다.
최진철 회장은 “현지 젊은 소비자의 입맛은 현지인이 가장 잘 안다”라며 시식 평가에도 일절 입을 열지 않는다. 이 같은 결단은 시아스의 핵심 전략이자 실험이다. ‘한국적이되 프랑스적인 맛’, 그 경계에서 로컬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파리에서 지낸 하루, 시내 자전거도로에서 쏟아진 경적에 당황한 기억은 오래 남는다. 최근 SUV 주차료를 세 배로 올리고 시속 30㎞ 이하로 제한한 파리는, 친환경 정책의 상징이자 실험장이다. 이런 분위기는 식문화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현지 슈퍼마켓이나 편의점 도시락 판매대에는 냉동 간편식 식품이나 샐러드가 자리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포장지 뒷면에 표기된 생산지와 탄소배출 정보를 꼼꼼히 따진다. 필립 고메스 시아스 프랑스 법인 대표는 “이제는 ‘멀리서 온 이국적 음식’이 아니라 ‘현지에서 만든 트렌디한 K-푸드’여야 통한다”라고 설명한다.
로예 공장이 파리와 인접한 곳에 자리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EU 생산 표기 하나로 유통 바이어들의 반응은 확연히 달라졌고, 물류비도 5~10% 절감되는 이점이 생긴다. 필립 대표는 “프랑스에서는 유럽 내 생산 식품을 소비하려는 트랜드가 가속화되고 있다”라며 “젊은 층들도 탄소발자국이 적은 제품을 찾아 소비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식품 분야에 대한 규제와 인증 역시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파리에서 동쪽으로 약 500㎞ 떨어진 스트라스부르 도심. 이곳의 한 한식당은 주말이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는 인기 맛집이다. 잘 차려입은 현지 젊은이들은 물론 와인과 빨간 뚜껑의 정통 소주를 함께 즐기는 중년 커플까지 다양한 손님들이 찾는다. 갈비, 삼겹살, 닭강정, 그리고 만두. 이러한 메뉴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다만 고기는 한국산이 아니고 숯불이 아닌 그릴에 요리하는 탓에 우리가 즐기는 맛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구제역 여파로 한국산 육류 수입이 불가능한 탓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만두 역시 마찬가지다. 그간 유럽에선 채소 만두만 수입할 수 있었다.
시아스 역시 로예 현지 생산이 가능해지며 육즙이 살아있는 고기만두를 출시했다. 현지 냉동 물류망을 활용해 스트라스부르, 리옹, 파리 등 주요 도시에도 24시간 내 배송이 가능해졌다. 생산지에서 고객 식탁까지의 물리적 거리를 줄인 결과, 맛과 신선도도 경쟁력이 된 것이다.
시아스는 국내에선 쿠팡, 이마트 노브랜드 등에 납품하는 프라이빗 라벨(PL, Private Label) 전문기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PL은 유통사가 기획하고 제조사는 익명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구조로, 유통 주도형 상품이다. 반면 NB(National Brand)는 제조사 자체 상표로, 독자 마케팅과 유통을 병행한다. PL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어 수익성이 높고 가격결정에서 자유롭다는 강점을 지닌다. 시아스는 이처럼 오랜 시간 ‘히든챔피언’ 전략으로 성장해 왔지만, 프랑스 시장에선 브랜드도 병행하고 있다. ‘Yomia’과 ‘최씨(Choi’s)’ 브랜드를 앞세워 소비자 반응을 검증한 후, 대형 유통사의 PL 계약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최 회장은 “현지에 와보니 중국, 인도네시아 등 여러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식 라면이나, 볶음밥, 만두 등을 어설프게 흉내 내 출시해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라며 “맛도 맛이지만 틀린 한국어를 상표로 만들어 출시하는 것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라고 회고했다.
국내 대형브랜드 역시 현지에서는 진입 초기였다는 점과 현지 대형 유통 채널 입점을 위해서도 자체 상표를 통해 일종의 ‘검증’을 받을 필요도 있었다는 설명이다.
유럽 식품 시장의 약 절반은 이미 PL이 차지하고 있다. 레시피가 한 번 채택되면 공급 물량과 이익이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구조다. 시아스가 비용 부담에도 불구하고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아스 관계자는 “현재도 여러 업체와 PL 계약을 조율하고 있다”라며 “자체 상표 출시가 PL 시장에 도움을 주는 일종의 선순환 경제효과를 누릴 수 있도록 영업조직도 운영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프랑스에 자리를 잡은 또 다른 이유는 입지와 평판이다. 먼저 지리적으로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자동차로 몇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독일, 벨기에는 물론이고 영국·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들과 교류와 시장 확장이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다.
최 회장은 “입지 외에도 프랑스는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있어 평판과 가치를 높일 수 있다”라며 “프랑스 시장에서 성공하면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설명했다.
프랑스는 아직 식자재만큼은 온라인 채널 구매가 활발하지 않다. 오프라인 유통은 까르푸 등 대형 슈퍼마켓 체인 5개의 지배력이 높다. 이곳을 뚫지 못하면 소비자와 접점을 찾기 힘들다.
최 회장은 “프랑스에 진출했다는 몇몇 한국 기업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은 아시아마켓에 한정된 경우가 많았다”라면서 “메인 유통 채널에 100% 입점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력이 많이 드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시아스는 지난해 3월 식품 인증을 마치고 까르푸와 르클레르 등 대형 유통망에 입점하는 데 공을 들였다. 입점 방식은 철저한 테스트를 통해 이뤄진다. 초기에는 테스트 납품만 허용됐고, 점포당 10% 진열에서 30%, 50%로 조금씩 확대하는 것이다.
현지 영업팀 관계자는 “조급한 업체들은 이 느린 속도에 지쳐 철수하지만, 반대로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밀려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한국 업체들이 초반 홍보 이후 퇴출당했지만, 시아스는 2025년 2월 기준 월 매출 약 70만유로를 돌파했다. 회사는 올해 연말엔 월 160만유로(약 26억 2000만원) 수준의 매출을 기대하며 월 기준 손익분기점을 넘길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시아스는 올해 프랑스 동부 알자스 지역에 제2공장을 가동할 예정이다.
시아스가 대규모 설비 투자를 주저하지 않는 데는 경험이 있다. 2017년, 300억원을 들여 국내 즉석밥 설비를 구축했을 당시 업계 반응은 ‘무모하다’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이후 800억원이던 매출은 4년 만에 2000억원으로 상승하며 캐시카우가 됐다.
프랑스에서도 같은 전략이 반복된다.
최 회장은 “즉석밥이든 소스든, 우리가 시장 점유율 1등을 바라지 않아도 된다”라며 “시장 전체가 크니까, 2~3%만 가져와도 중견기업엔 충분한 블루오션이다.”라고 말했다. 시아스 프랑스 법인의 또 다른 특징은 한국인 파견 인력이 없다는 점이다. 과거 다른 기업들이 겪었던 언어·문화 충돌 문제를 고려해, 이번 프랑스 공장은 100% 현지인 인력으로만 운영된다.
필립 대표는 “한국 본사 방식보다 현지 관행을 따르는 것이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조직 운영에 도움이 된다”라고 설명했다.
로예 공장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본 포장 용기에는 또렷한 글씨로 ‘최 씨 만두’가 적혀 있었다.
한때 ‘손실’로만 보이던 시아스의 프랑스 진출 초기 전략은 이제, 현지화를 위한 장기적인 핵심 기지 역할은 물론 유럽 콜드체인 거점이라는 이름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보수적인 프랑스 사람들의 식탁에 한국어 라벨을 붙인 만두가 익숙해질 무렵, 시아스의 다음 스텝도 더욱 빨라질 것입니다.”
최진철 회장의 이 한마디가, 시아스식 K-푸드 실크로드의 서막을 알린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6호 (2025년 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