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스물두개의 계단이 가파르게 앞을 가로막는다. 시간이 없다. 해가 뜨는 6시 3분, 그 전에 언덕의 끝, 대성당 앞에 반드시 도착해야만 한다. 존 윅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온다. 포아티에(Foyatier) 街. 영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떠올리게 되는 가파른 계단, 몽마르트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고작 해발 130m에 불과한 언덕이지만, 파리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하다. 심지어 푸니쿨레흐(Funiculaire)라는 알프스에서나 있을 법한 산악케이블까지 설치되어 있다, 숨 가쁘게 걸어 올라갈지, 케이블카를 타고 편하고 빠르게 갈지.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속도에 대한 얘기다. 첫 번째 목적지는 몽마르트. 정상에 서면 파리가 한눈에 다가온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같은 구름의 군무가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회색 집들이 지평선을 따라 한없이 이어지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대도시의 황량함이 다가오기도 한다. 아니면, 아드리아해의 빨간 석양에 우유를 섞은 듯 로제 파스타처럼 은은한 파리의 노을과 벅찬 황금색 에펠탑이 아른거리며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몽마르트 가는 여정은 무관심한 채, 정상만 향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여정이 정상에서 맞이할 소회를 결정할 주요한 요소인데도 말이다.
2세기 기독교를 포교하다 목이 베인 성자 생드니를 추모해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몽마르트. 귀족들이 설립했던 수도원과 수녀원은 프랑스혁명 이후 파괴되고, 나폴레옹 3세 시절 오스만에 의해 추진된 파리 대개조사업에 의해 쫓겨난 도시 하층민들이 몰려와 정착하기 시작한 빈민촌. 빈민들은 화려한 파리의 야경을 바라보며 혁명 이후
에도 계속되는 불평등에 좌절했을테고, 보불전쟁의 패배로 프랑스 지도층의 민낯이 드러나자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체재 파리코뮌의 봉기를 이 언덕에서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언덕은 프랑스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한 성스러운 심장, 샤크레쾨르 성당의 건축으로 이어져 애국심의 상징으로 되돌아간다. 한편, 샹송과 술을 함께 파는 세계 최초의 노래 주점 카바레가 생겨나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로해 주고, 바람이 심해 언덕 곳곳에 세워진 풍차의 이름을 내건 카바레 물랭루즈는 캉캉춤으로 세계인의 밤 문화를 새롭게 정의 내린다. 당신은 날렵한 토끼라는 뜻의 주점 ‘오 라뺑 아질(Au Lapin Agile)에서 르누아르, 피카소처럼 한잔 마실 수도 있고, 테르트르 광장에서 미래의 에두아르 크로테스를 꿈꾸는 무명 화가의 모델이 될 수도 있다. 고작 130m의 언덕이지만, 그 길을 오르며 맞이하는 역사와 삶은 결코 낮거나 단순하지 않다. 파리지앵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여정을 통해 비로소 당신은 정상에서 당신만의 시선으로 파리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목적지는 프랑스의 수필가이자 철학 교수 피에르 쌍소 (Pierre Sansot). 1998년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느림의 올바른 사용법’이란 책을 저술한 그는 느림이란 서두르지 않겠다는 의지, 시간에 쫓기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빠른 변화에 대한 적응이 발전이라는 일반적 사회 통념에서 벗어나, 한가롭게 산책하며 다른 사물에 주목할 수 있는 내적 통찰을 통한 새로운 행복을 제안하고 있다. 몽마르트라는 목적보다 몽마르트로 가는 여정에 주목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프랑스를 이해하기 위해 쌍소 교수의 책을 탐독해 볼 것을 권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 번째 목적지는 느린 시간 여행, 자전거와 치즈(Ve‘ lo et Fromages). 지난해 이맘때 쓴 칼럼도 걸으면서 느끼는 자유 GR75에 대해서였다. 속도를 낮추면 보이기 시작하는 세상, ‘느림 속의 발견’ 말이다. 느림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걷는 것이 제일 좋다. 하지만,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경험을 원하는 다른 목적의 원초적 욕구 또한 중요하다. 그래서, 적절한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이 모색되지 않았을까? 여행작가 앤 클레어 드롬(Anne-Claire Delorme)은 치즈의 산지를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는 매력적인 방식을 제안한다. 자연 속에서 페달을 밟으며 다양한 지역의 치즈까지 경험할 수 있는 일석이조. 프랑스 전역에 총 123개 코스가 존재한다. 전체 길이는 8000㎞에 달하며, 치즈를 맛보고 체험할 수 있는 장소도 1500곳이 넘는다. 라기올(laguiole) 치즈의 고장 오브락(Aubrac) 고원, 크로탱 드 샤비뇰(crottin de Chavignol)로 유명한 루아르 강, 노르망디의 카망베르, 다섯 가지 AOP 등급 치즈를 자랑하는 오베르뉴 화산지대를 지나, 염소 치즈가 지중해 바람을 맞으며 숙성되는 프레알프 다쥐르(Pre‘ alpes d’Azur)까지. 느림이라는 숙성의 과정이 있어야 생산되는 치즈의 존재 이유와 자전거가 참 잘 어울린다.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는 파리의 도전이다. 여행은 느림을 실천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다. 하지만, 여행만으로 삶의 전반적인 기조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일상 속 느림이 필요한 이유다. 여행에서의 느림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일상 속 느림은 사회구조적인 측면이 크다. 파리는 시 차원에서 중요한 도전이 될 선택을 했다. 도시의 행동 양식을 느림에 맞춘 것이다. 파리를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 중심의 도시로 대전환하는 작업. 자전거 계획(Planve‘ lo)으로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1억5000만 유로(27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한 제1기 사업(2015~2020년)에 이어, 2억5000만유로(5400억원)를 추가 투입하여 2021~2026년까지 추진된다. 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도시 전체 자전거도로 1160㎞를 확보해 촘촘한 자전거 생태계를 구축하고, 자전거 정거 장소도 현재의 6만개에서 13만개를 추가할 예정이다. 파리 시청에서 콩코르드 광장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종로에 해당하는 히볼리가의 전체 4개 노선 중 3개를 자전거 전용으로 바꾼 것처럼, 도시의 도로는 자전거가 우선이다. 이런 느림에 대한 선택은 사회적으로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사회가 앞장서 느림을 화두로 실천하고 있다. 쌍소의 주장처럼, 빨리가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느림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도 파리처럼 사회적으로 느림을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면 어떨까? 4대문(門) 안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도시, 서울.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