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영화 `헤어질 결심`의 여운을 음미하며, 말러 ‘아다지에토’의 심연으로
입력 : 2022.07.29 14:51:43
수정 : 2022.08.01 16:19:18
화제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았다. 무척 오랜만에, 그것도 코로나19 재유행이 본격화하는 와중에 굳이 영화관을 찾은 이유는 무엇보다 그 영화에 말러의 ‘아다지에토’가 사용되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기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이 과연 이 심오한 명곡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궁금증을 참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보고 난 뒤의 소감은? 아마도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이후에 이 곡을 가장 심층적이고 진실하게 녹여낸 영화가 아닐까 싶다. 다만 여기서 그 음악이 영화에서 어떤 식으로 작동 내지 작용했는지에 관해 어설픈 분석을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다. 그저 그 음악, ‘아다지에토’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끼적여보려 한다.
구스타프 말러
▶가장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명곡
일단 ‘아다지에토(adagietto)’ 자체는 음악용어다. ‘아주 느리게’를 뜻하는 ‘아다지오(adagio)’에 접미사가 붙은 형태로 그보다 조금 덜 느린 속도로 진행하라는 템포 지시어의 일종이다. 하지만 이 단어를 접했을 때 이런 사전적 의미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적어도 음악애호가라면)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구스타프 말러가 남긴 특정 교향곡 악장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 자체로서 다분히 낭만적 뉘앙스를 내포한 단어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시. ‘아다지에토(Adagietto)’는 말러의 다섯 번째 교향곡 가운데 네 번째 악장이다. 하지만 종종 그 교향곡에서 이탈하여 독립적인 악곡으로 취급되거나 기능한다. 앞서 언급한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사용된 이래 각종 영화와 TV 드라마, 연극, 발레나 피겨스케이팅, 광고나 행사를 위한 음악으로 소비되었고, 덕분에 이 곡은 말러의 음악 중 가장 대중적이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런 인기 탓에 어떤 이들은 이 곡을 식상해 하거나 심지어 가벼이 여기기도 한다. 그들에게 이 곡은 그저 감미롭지만 지겨운 ‘사골 명곡’ 중 하나일 따름이다. 하지만 보다 진지하게 귀 기울일 줄 아는 이라면, 그래서 이 곡의 심연을 응시해본 이라면 그런 반응에 고개를 저을 것이다. 이 곡이야말로 말러 음악, 나아가 독일 낭만주의를 관통하는 정신 혹은 정서와 맞닿아 있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과 사랑, 죽음의 삼중주
‘아다지에토’에 대해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사실 하나는 이 곡이 말러가 아내(가 될) 알마에게 보낸 ‘연애편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음악으로 쓴 연애편지’인 이 곡에는 바그너의 악극(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차용한 모티브가 담겨 있다. 두 번째 주요 선율에 녹아 있는 ‘시선의 동기(음악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가 그것인데, 이 동기는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운명적 사랑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드는 결정적인 순간에 흘러나온다. 두 남녀는 현실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갈망하고, 비극적 결말을 예감하면서도 필생의 사랑을 절박하게 탐닉한다.
그런데 이 곡을 쓰던 시기에 말러는 인생의 위기를 지나고 있었다. 당시 말러는 유럽 최고의 극장인 빈 궁정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며 최고의 명성과 드높은 예술적 성과를 거두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질시로 무장한 적대적 비평가들의 공격에 시달리며 ‘정상을 지키는 삶’의 고단함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또 격무에 시달리다 건강이 악화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이 마흔을 넘기도록 아내 없이 혼자서 살아가는 외로움에 지쳐 있었다. 그런 그의 심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곡이 있는데, 한적하고 평화로운 여름휴가지에서 쓴 ‘나는 세상에서 잊혀지고’라는 가곡이었다. 인생의 고단함과 권태를 토로하며 은둔과 사랑에의 갈망을 조용히 읊조리는 명곡이다. 그리고 이 가곡의 정서와 선율은 ‘아다지에토’로 전이되어 그 씨앗이자 귀결점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음악 레슨을 받아 스스로 작곡을 할 정도였던 알마는 말러의 ‘연애편지’에 담긴 메시지를 알아채고 화답했다. 그렇게 말러는 알마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그녀가 자신의 ‘이졸데(필생의 연인)’이자 ‘레오노레(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에 나오는 여주인공. 고난에 처한 남편 플로레스탄을 구출해내 ‘구원의 여성상’으로 통한다)’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말러는 알마에게 지나친 희생을 강요했고, 알마는 ‘마침내’ 남편의 믿음을 배신했다. 알마는 말러의 이졸데도, 레오노레도 아니었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사랑의 죽음’이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끝난다. 끝내 현실(양심과 명예)을 외면할 수 없었던 트리스탄이 먼저 ‘낮의 세상’을 떠난 다음, 홀로 남겨진 이졸데가 7분여에 걸쳐 비탄과 황홀에 겨운 노래를 부르곤 ‘밤의 세계’로 떠나가는 신비로운 결말이다. 그것이 그녀가 사랑을 지켜낸 방법이었다.
[황장원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