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시조(태조)는 천년 사직을 생각하고, 기업 창업주는 오백 년 기업을 생각한다. 당연, 후손들이 딛고 일어서야 할 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생겨난 터 잡기 예술이 풍수이다. 그런데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너무 쉽게 이루었다. 국제적 뉴스거리가 되었다. 모든 행위에는 명분과 목적이 뚜렷해야 하는데 이유가 분명치 않았다. 그래서 더욱 관심거리가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의 끝은 어찌 될 것인가? 5년 후에도 ‘용산 대통령 집무실’이 계속 이어질 것인가? 속단하기 어렵다. 취임 3달 만에 30%대라는 불길한 대통령 지지율은 ‘용산 대통령 집무실 이전’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옮겨야 했다.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 바람(風)도 머물지 아니하고, 물(水) 또한 끊임없이 흘러간다. 풍수의 존재 방식이다. 시대가 바뀌고 국력이 커지면 대통령 집무실도 바뀌어야 마땅하다. 국력에 비례하여 산간지역에서 평지로 그리고 바닷가로 도읍지를 옮기라고 한다. 나라의 흥망성쇠와 관련이 있다. 고산룡(高山龍: 산간분지)→평지룡(平支龍: 평지)→평양룡(平洋龍: 큰 강과 바다) 단계로 풍수는 정리한다. 고산룡이란 산간분지에 있는 터를 말한다. 국력이 약한 조선왕조는 안전한 산간분지를 찾아 도읍지를 정했다. 다름 아닌 경복궁·청와대 터이다. 국력이 외적을 막아낼 만큼 강할 때는 평지에 도읍을 정함이 옳다. 그러나 이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횡수(橫水), 즉 빗겨 지르는 강이 필요하다. 한강과 접한 용산이 바로 그와 같은 땅이다.
청와대와 용산 대통령 집무실은 전혀 다른 성격의 땅이다. 청와대 터는 사산(四山: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에 둘러싸인 분지이다. 반면 용산은 평지이며 한강이 더 가깝다. 청와대가 ‘산(山)풍수’라면, 용산은 ‘물(水)풍수’이다. ‘산주인, 수주재(山主人, 水主財)’라는 풍수격언이 있다. 산은 인물을 키우고, 물은 재물을 늘려준다는 뜻이다. 청와대 터가 권력욕을 부추기는 폐쇄적 땅이라면, 용산은 문화·무역을 진작하는 개방적 땅이다.
여의도 63빌딩에서 내려다 본 용산일대 전경.
그러나 산간에서 평지로 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 ‘호입평양 피견기(虎入平壤 被犬欺)’란 말이 있다. ‘호랑이가 들판에 가니 개에게 수모를 당한다’는 뜻이다. 산(청와대)을 벗어난 호랑이(대통령)가 강가(용산)로 갈 때 자칫 개에게 수모를 당한다는 뜻이다.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용산 공간 재편성이 수반되어야 할 이유이다.
용산에 관심을 가진 이가 조선 초 정치인 하륜(1347~1416)이었다. 가정법은 의미 없다. 그러나 ‘만약 그때 하륜이 용산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건설했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다. 1413년 좌의정 하륜이 “용산강(만초천)에서 숭례문까지 운하를 파서 배를 운행시킬 것”을 임금에게 청한다. “공사 기간은 한 달이며 동원 인원은 1만1000명이면 충분합니다.”
신하들이 찬성하였으나 임금이 수용하지 않았다. 운하가 외적의 침입 통로가 될까 두려워한 임금의 ‘쪼잔함’이었다. 조선을 개방적 ‘물(水)풍수’ 국가로 전환하여 부자강국을 만들자는 하륜의 원모지려(遠謀之慮)였다. 대통령궁이 들어선 이상, 세계강국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공간 재구성이 필요하다. 용산 개조가 필요하다. 풍수상 3곳이 중요하다. 한강·만초천(용산강)·밤섬이다.
첫째, 한강 개조이다. 한강은 강남과 강북을 분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건축가 김석철 선생(작고)의 지적이다.
“천만 인구의 도시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한강이 서울을 비자립적인 두 도시로 분할하고 있어 정작 도시중심이어야 할 한강은 도시의 변방지대가 되어 있다. 한강에는 주 도시기능이 없다. 한강이 도시기능과 도시흐름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모든 공공기능과 문화 인프라가 한강에 면하거나 직접적으로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강변북로를 지중화하고 한강 수변(水邊)도시를 만든다. 중국·일본·유럽에서 볼 수 있는 수변도시를 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수변도시를 가져본 적이 없다. 물(水)풍수로 대변되는 수변도시는 주거 목적이 아니라 무역·문화 국가를 전제한다.
둘째, 만초천(용산강) 복원이다. 만초천은 무악재 물과 남산 자락 물이 삼각지 부근에서 합쳐진 뒤 한강으로 빠져나가던 하천이다. 1967년 복개되어 볼 수는 없으나 복개된 아래로 건천이 여전히 존재한다. 만초천 복원 과정에서 주변의 ‘용산정비창’ 재개발이 필요하다. 청계천 복원과 같은 맥락이다. 만초천은 용산의 핏줄과 같은 존재이다. 풍수서 <지리신법>은 말한다. “무릇, 산은 사람의 형체와 같고, 물은 사람의 혈맥과 같다. 사람의 생장영고(生長榮枯)는 모두 혈맥에 의존하기에, 길흉화복은 물에서 더 빠르게 나타난다.” 만초천 복원은 600년 전 하륜의 ‘용산↔숭례문 운하’ 계획과 일치한다.
셋째, ‘무인도’ 밤섬(栗島)의 강상(江上) 도시화이다. 밤섬은 본래 대대로 사람들이 살던 집성촌이었다. 1968년 여의도 개발에 필요한 흙을 위해 폭파되었지만 이후 퇴적된 토사로 원형이 복원되었다. 폭파 이전의 밤섬에는 ‘부군당’이란 사당이 있었다. ‘부군당 신앙’은 한강 유역의 독특한 무속 신앙이다. 부군신·삼불제석·군웅신 등을 모셨다. 밤섬 폭파로 터를 잃은 신들은 당시 폭파 주역 김현옥 서울시장에 대한 원한이 깊다. 인간과 신들의 공존 터로 부활시킨다.
밤섬은 용산의 명당수 만초천이 한강과 만나는 부근에 자리한다. 수구처(水口處)이다. 서해에서 거슬러 오는 외기(外氣)를 정제(淨濟)하면서, 동시에 용산의 내기(內氣) 누설을 막아주는 ‘수구막이’이다. 이곳에 세계적인 금융·무역 타워와 호텔을 초고층으로 지으면 용산시대는 완결된다. 용산은 세계의 용산이 된다. 잠룡(潛龍)은 물이, 승천할 용은 통로가 필요하다. 밤섬의 초고층 타워는 그 통로가 될 것이다. 한강·용산강(만초천)·밤섬이 핵심 3대 주제어이다. 대통령 지지율 반등과 그를 바탕으로 하는 ‘용산 대통령 시대’의 구원지계(久遠之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