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산업의 무게중심이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옮겨가는 전동화로 인해 기존 완성차 업계 강자들의 입지는 좁아질 것인가. 전기차 시장을 개척한 테슬라, 빠르게 전동화를 추진하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현대차그룹, 핵심 광물 자립도를 바탕으로 최대 전기차 시장으로 올라선 중국 등 완성차업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면서 전통적 강자들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전망은 지금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그룹은 내연기관차와의 결별 계획을 밝힌 지 4년 만에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기업으로의 전환을 선언하며 미래차 시장에서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1886년 내연기관차를 최초로 발명하며 자동차의 역사를 쓴 벤츠그룹의 위상을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올라 칼레니우스 메르세데스-벤츠그룹 회장은 지난 2월 22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서니베일 소재 연구개발(R&D) 북미센터에서 MB.OS(메르세데스-벤츠 운영체제)에 관한 전략을 발표했다. 칼레니우스 회장은 “벤츠그룹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구성 요소들에 완벽하게 접근 가능한 특별한 ‘칩투클라우드(Chip-to-Cloud)’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전용 운영체제를 설계하기로 결정했다”며 “세계 최고 수준의 파트너들과 벤츠그룹이 가진 전문성을 결합해 탁월한 고객 경험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칩투클라우드란 인터넷에 연결된 장치들이 정보를 주고받는 방법의 일종이다. 차량 내부에 있는 작은 부품(칩)이 정보를 수집하고, 인터넷에 연결된 대규모 컴퓨터 시스템(클라우드)은 수집된 정보를 분석·저장하며 이 결과를 다시 차량으로 보낸다. 칩투클라우드 아키텍처 기반의 운영체제가 적용된 자동차는 차량 내 운전자의 행동을 하나하나 학습해 편의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벤츠그룹 설명에 따르면 MB.OS는 물리적인 자동차와 가상의 소프트웨어 세계를 아우르는 연결고리다. MB.OS는 자동차라는 하드웨어를 관리하는 동시에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앱)·기능을 제어한다. 인포테인먼트(내비게이션·동영상 등 차내 편의사양), 자율주행, 차체·편의장비, 충전 등 자동차 사용 중 발생하는 대량의 데이터를 관리하는 역할도 맡는다. 독자적인 운영체제가 적용되지 않은 현재는 운전자가 개인 취향에 맞춰 차량 기능을 일일이 설정해야 하지만, MB.OS가 탑재된 이후에는 운전자의 루틴을 차량이 스스로 학습하게 된다.
MB.OS가 적용된 신차는 오는 2025년 출시될 예정이다. MB.OS의 선행 버전은 2023년 출시되는 11세대 E클래스에 3세대 MBUX와 함께 탑재된다. MBUX는 리눅스를 기반으로 하는 벤츠의 인포테인먼트(정보+오락) 시스템이다. 3세대 MBUX는 서드파티 앱(기본으로 설치된 앱 외에 추가로 설치한 앱)과의 호환성을 높이며 스마트폰 화면을 차량에 띄우는 미러링(화면전송) 기능을 개선했다.
벤츠그룹에게 MB.OS 개발의 의미는 남다르다. 이전까지는 남의 손에 맡겼던 소프트웨어 뼈대 설계를 직접 담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그누스 외스트버그 최고소프트웨어책임자(CSO)는 “벤츠의 비즈니스 모델을 보면, 과거에는 OS가 모델별로 분산돼 있었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은 소프트웨어 아키텍처를 벤츠가 소유하고, 개별 구성 요소를 어떻게 채울 것인지를 벤츠가 결정하게 된다”라며 “고객 입장에선 본인이 원하고 신뢰하는 콘텐츠를 접할 수 있게 된다”라고 말했다.
소프트웨어 아키텍처란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 때 그 프로그램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설계하는 것이다. 어떤 기능을 추가할 것인지, 이 기능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서로 어떻게 연결되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뼈대인 셈이다. 소프트웨어 아키텍처는 건물의 철골·기둥과 같은 역할을 해서, 프로그램이 안정적으로 동작하고 관리자 입장에선 유지·보수하기 쉽도록 한다. 외스트버그 CSO는 “오픈소스 기반의 독자적 OS를 적용하면 혁신의 속도는 더 빨라질 수밖에 없다. 신차 개발에 맞춰 새로운 구성 요소를 처음부터 하나하나 개발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설명했다.
벤츠그룹은 소프트웨어 투자를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다. 이미 벤츠그룹의 소프트웨어 관련 인력은 전 세계에 1만 명이 넘는다. 마르쿠스 셰퍼 벤츠그룹 최고기술책임자(CTO)는 “2025년까지 R&D 예산의 25%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할당한다”라며 “올해 소프트웨어 관련 투자는 작년보다 20% 증가하고,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벤츠그룹은 MB.OS를 비롯한 소프트웨어 역량을 고도화하는 데 함께할 글로벌 파트너사로 엔비디아, 루미나, 텐센트, 구글 등을 꼽았다. 주로 자율주행 기능을 고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협력 관계다. 벤츠는 현재 시속 60㎞ 수준인 자율주행 레벨3 최고속도를 시속 130㎞까지 높인다는 목표다.
엔비디아는 벤츠그룹에 자동차의 ‘뇌’로 불리는 자율주행 반도체 ‘드라이브 오린 시스템온칩(SoC)’을 공급한다. 오린 SoC는 초당 254조 번의 연산을 통해 차량 센서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반도체다. 루미나는 라이다(LiDAR) 센서를 벤츠그룹에 공급한다. 루미나의 차세대 아이리스(IRIS) 센서는 적외선 스펙트럼에서 반사율이 낮은 작은 물체도 인식이 가능하고, 감지를 추가적으로 반복하며 벤츠의 가장 높은 안전 기준을 충족한다.
벤츠그룹은 텐센트와 중국 내 조건부 자율주행 기술 개발을 위해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이번 파트너십을 통해 ‘첨단 차선 지도 뷰’ 등 자율주행 기능을 위한 풍부한 사용자인터페이스(UI)가 출시될 예정이다. 또 벤츠그룹은 구글의 지도 데이터를 활용해 자체 브랜드 내비게이션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벤츠그룹은 구글과의 협업으로 MB.OS에 통합하는 내비게이션은 단순한 경로 안내 수준을 넘어 차선 변경 등 자율주행 서비스에 활용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벤츠그룹은 주요 시장별로 기본 탑재되는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다르게 운영하는데, 한국에선 티맵과 협업한다고 밝혔다. 칼레니우스 CEO는 “소프트웨어는 혼자서 구축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며 “최상의 파트너들과 함께 효율적으로 최고의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프트웨어 전략은 벤츠그룹뿐 아니라 완성차 업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현대차그룹은 2025년까지 모든 차종을 SDV로 전환하고, 2030년까지 소프트웨어 부문 강화에 18조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폭스바겐그룹은 소프트웨어 자회사 ‘카리아드’를 설립하고 ‘VW.OS’를 개발하고 있다. 2021년 기준 10% 수준인 소프트웨어 내재화율을 2030년까지 60%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게 폭스바겐그룹의 계획이다. 독자 OS ‘아린’을 개발하고 있는 도요타그룹은 지난해부터 신규 채용의 40% 이상을 소프트웨어 전문 인력으로 채우고 있다.
자동차 산업의 무게중심이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넘어가는 전동화 과정에서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전기차의 성능·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선 소프트웨어를 통해 제어 시스템을 정교화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또 자동차가 단순한 이동수단에서 ‘움직이는 생활공간’ ‘움직이는 전자기기’ 등으로 의미가 달라지면서 완성차 업체는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기 위해 소프트웨어에 집중하고 있다. 하드웨어 자체로는 변화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완성차 업체가 소프트웨어에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수익성이다. 전기차 제조에 투입되는 핵심 원자재 가격은 내연기관차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높고, 전체 제조비용에서 원자재 가격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이 때문에 완성차 업체들은 소프트웨어를 새로운 수익원으로 점찍고 있다. 완성차 업체 입장에서 보면, 특정 소프트웨어 기능을 탑재한 차량은 출고 당시부터 가격을 높일 수 있다. 차량을 판매한 이후에도 갱신·구독형 서비스를 통해 추가적인 수익을 낼 수 있다.
지난해 기준 벤츠그룹은 내비게이션, 실시간 교통정보, 온라인 지도 업데이트 등 소프트웨어 부문에서 약 10억유로(1조38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벤츠그룹 전체 매출인 1500억유로(약 208조2700억원)의 0.7%다. 대부분은 차량을 출고하는 시점부터 이미 들어가 있는 내장형 수익이다. 앞으로는 소비자가 차량 구매 후 별도로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패키지로 구매하거나 갱신하는 탑재형 수익을 확대한다는 목표다. 벤츠그룹은 2030년까지 소프트웨어 부문 매출이 20억유로에 근접할 것이며, 여기서 자율주행 서비스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2년 전 벤츠그룹은 오는 2030년까지 모든 차종을 순수전기차로 전환하고, 2025년부터는 신차를 모두 전기차로만 출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전동화 전략 가속화를 위해 2022년부터 9년간 전기차 부문에 400억유로(약 56조원) 이상을 투자하기로 했다. 그동안 시장에선 전기차가 대세로 자리 잡게 되면 내연기관차에서 두각을 보였던 기존 브랜드들이 주도권을 잃게 될 수 있다는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했다.
벤츠그룹은 콘셉트카 ‘비전(Vision) EQXX’를 선보이며 이 같은 부정적 전망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EQXX는 한 번의 완전충전으로 1000㎞ 이상 주행할 수 있는 모델이다. 배터리 용량 자체는 벤츠의 대형 전기 세단 ‘EQS’와 비슷하지만, EQXX의 주행거리는 EQS의 2배가 넘는다.
벤츠그룹은 2020년 6월 가장 효율적인 전기차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EQXX 개발에 나섰다. 포뮬러원(F1) 엔진 제조 자회사인 메르세데스-AMG를 비롯해 그룹 내 엔지니어들이 집결해 고성능 파워트레인 개발 노하우를 전기차에 녹여냈다.
문광민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