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게임 업체들이 한국 모바일 게임 시장에 본격 진출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안방을 통째로 내줄 위기입니다.”
게임 시장 주도권이 PC온라인에서 모바일로 급격히 넘어가는 가운데 중국 업체의 맹공격으로 한국 모바일 게임 시장이 고사위기에 몰리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게임업계에서는 한때 한국 게임업체가 진출해 목돈을 벌 수 있는 대표적인 ‘블루오션’이 중국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역전돼 한국 안방을 중국에 내줄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런데도 게임 시장을 바라보는 정부 시선은 ‘규제 이슈’에만 매달려 있어 시각 교정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게임을 콘텐츠 산업으로 인식해 미래 전략 먹거리 산업으로 육성하는 큰 그림이 나올 때가 됐다는 것이다.
모바일 게임 업계 동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구글플레이 최고 매출 게임 리스트를 보면 이 같은 우려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최근 구글플레이 최고 100위권에는 중국업체 쿤룬의 ‘문파문파’, EFUN의 ‘삼국지PK’, 추콩의 ‘천투 온라인’ 등 10여 종의 게임이 올라 있다. 특히 일찍부터 한국 시장에 진출한 쿤룬은 100위권 안에 5종의 자사 게임을 올려놓고 큰 손 노릇을 하고 있다.
한국 게임에게 노하우를 배워 간 중국 업체들이 이제는 중국 콘텐츠를 한국 게이머 입맛에 맞게 변형시켜 시장을 서서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추세라면 조만간 10위권 안에 중국 업체 게임이 등장할 날도 머지않았다는 예측도 나온다.
한국에서 선전하고 있는 10여 개 중국 게임 매출을 합치면 하루에만 약 2억~3억원에 달할 것으로 게임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앞으로 이 수치는 수직상승할 것이란 게 게임업계 관계자 진단이다.
업계 관계자는 “100위권 순위 안에 중국 게임 여러 개가 동시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한국 게이머들 입맛을 중국 업체들이 읽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중국 게임 순위가 40~100위권에 주로 몰려있지만 한두 개 게임이 빅히트해 10위권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하면 중국 게임의 한국 하루 매출이 10억원을 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게 업계 전망이다.
더 큰 문제는 정부의 규제로 국내 게임 업계가 발목이 잡힌 사이 중국 게임의 한국공략 속도가 더 탄력을 받을 것이란 점이다. 이미 중국 게임업계는 저렴한 인건비를 무기로 ‘박리다매’ 전략에 나서고 있다. 싼 가격에 고품질 게임을 찾으려고 하는 한국 퍼블리셔들이 중국 게임에 맛을 들인 점도 이 같은 추세를 가속하는 요인이다. 업계 관계자는 “온라인 게임 종주국이던 한국이 모바일 시대에 접어들고 나서 주도권을 완전히 중국에 내주고 있다”며 “그런데도 자국 게임 기업 보호육성에 나선 중국 정부와는 달리 한국은 여전히 규제의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모바일 게임 트렌드인 역할수행게임(RPG)에서 이 같은 경향이 높다. 중국은 미리부터 삼국지 등 역사를 배경으로 한 다량의 RPG를 만들어온 경험이 있다. 오히려 한국보다 RPG를 연구해 온 기간이 더 길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 같은 경험으로 까다로운 한국 게이머들의 입맛을 하나둘씩 만족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온라인 게임 시절만 하더라도 한국의 영향력은 지배적이었다. 게임 변방국 벨라루스에서 태어나 탱크 전투 게임인 ‘워게이밍’을 세계적 게임회사로 키운 빅터 키슬리 대표는 한국을 ‘온라인 게임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급격히 확산된 ‘PC방 문화’에 매료된 덕에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 있는 사옥 한복판에 PC방을 본뜬 공간을 만들었을 정도다.
한때 게임 종주국이라 불리며 세계를 호령했던 한국 게임 산업이 모바일 시대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부진의 늪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여전히 게임 산업에 규제 칼날만 들이대고 있다. 중국 게임이 이렇게 잘 나가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선 중국 정부와는 정반대로 나간 것이다.
중국 최고의 게임사인 텐센트는 불과 4~5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 게임을 수입해 중국에 파는데 급급했던 보부상에 불과했다. 그랬던 텐센트는 어느덧 글로벌 게임 산업 전체를 호령하는 ‘슈퍼 갑’으로 탈바꿈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국 게임을 기반으로 성장한 텐센트가 한국 게임을 진두지휘하는 위치로 올라선 것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호랑이 새끼를 키우다 호랑이에 잡아먹힌 격이다.
중국 텐센트와 한국 게임 시장 1위인 넥슨을 비교하면 벌어지는 양국 간 격차를 읽을 수 있다. 두 기업은 2006년만 하더라도 격차가 크지 않았다. 매출 측면에서 넥슨이 텐센트의 절반 정도였지만 매년 텐센트가 매출의 50~60% 정도만을 게임부문에서 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둘의 실력은 비슷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지난해 텐센트가 매출 10조원을 돌파한 굴지의 기업으로 커졌는데 넥슨의 매출은 1조6000억원에 그쳤다. 중국은 텐센트를 필두로 글로벌 게임 시장 주도권을 거머쥐려 하고 있다. 텐센트의 최근 행보를 보면 한국이 빠르게 텐센트에 종속되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지난 3월 텐센트가 넷마블에 5300억원을 투자하며 3대 주주로 올라선 것은 이런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넷마블은 ‘몬스터 길들이기’, ‘모두의 마블’ 등 인기 게임을 줄줄이 내놓으며 국내 모바일 게임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는 업체다. 텐센트는 이번 지분투자를 통해 한국 모바일 게임 시장 진출에 본격 시동을 걸었다는 평가다.
이게 다가 아니다. 텐센트는 한국 PC방 점유율 40%를 넘나들며 인기를 끄는 ‘리그오브레전드(LoL)’를 만든 라이엇게임즈의 지분 90%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 모바일 게임 플랫폼 시장을 장악한 카카오의 2대 주주이기도 하다. 한국 게임 산업 전반을 텐센트가 서서히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인터넷기업 알리바바도 최근 국내에 사무실을 열고 게임 산업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저력이 있는 국내 중소 개발사 상당수가 중국 기업에 합병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하고 있다. 최근 텐센트와 알리바바가 한국 시장을 두루 돌며 싹수가 보이는 모바일 게임사를 대거 ‘쇼핑’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이처럼 한국 게임 시장이 통째로 중국에 넘어갈 위기에서도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 오히려 규제만 강화하고 있다고 업계는 불만을 쏟아냈다.
지난해 이후 게임을 알코올, 마약, 도박과 함께 4대 중독으로 규정하고 게임업체 매출의 1%를 중독치유기금으로 의무 납부하는 법안 두 건이 활발히 국회에서 논의된 바 있다. 고스톱, 화투 등 웹보드 게임 이용 시간과 게임머니 유통에 제한을 두는 ‘웹보드 규제’는 이미 올해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한 게임업체 고위임원은 “게임 산업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선에 본사를 해외로 옮기고 싶은 심정”이라며 “이대로라면 해외는 물론 국내 게임시장 안방까지 중국에 내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게임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중국과 유럽의 사례를 한국이 적극 참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난 3월 서울상공회의소에서 ‘왜 글로벌 IT 기업들은 룩셈부르크를 선호하는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국내 게임회사 유치에 나선 룩셈부르크가 대표적이다.
이 당시 룩셈부르크 정부 관계자는 한국 스타트업에 최고 100만유로의 재정 지원과 연구개발·인프라 비용 일부를 지원한다는 파격적인 혜택을 내걸며 한국 게임사 유치에 적극 나선 바 있다.
게임을 중독 물질로 바라보고 새로운 규제로 옭아맬 생각만 하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행보다. 국내 게임 스타트업 에피드게임즈의 한정현 대표는 “룩셈부르크는 물론 독일을 비롯한 다수 유럽 국가들이 게임 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삼아 각종 인센티브를 내걸며 육성에 나서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며 “한국은 이 같은 글로벌 움직임과 정반대 행보를 보이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