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반기 소비 현장은 ‘열리지 않는 지갑’으로 요약된다.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불황에 작아진 씀씀이는 올 들어 잇달아 터졌던 각종 악재에 더 쪼그라들었다. 유통업계는 매달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갔고, 세월호 여파를 반전시키지 못한 채 올해 후반전에 돌입하게 됐다.
세월호 여파 휘청댄 유통업계… 줄줄이 ‘거꾸로 성장’
올 초만 해도 유통업계는 이 정도까지 부진을 예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설 연휴 즈음해 소비가 잠시 살아나면서 ‘소비의 불을 댕겼다’는 기대감이 일었다. 하반기에는 본격적으로 경기 불황에서 탈출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도 들려왔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장바구니 심리와 직결되는 대형마트 실적을 보면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한 소비가 바로 숫자로 나타난다. 이마트의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월별 매출 성장률은 1~2월 -1.7%였다가 3월에는 -2.1%로 떨어졌다. 세월호 사고 이후로는 소비심리가 더욱 얼어붙어 4월에는 -3%까지 내려갔다.
5월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을 잇는 황금연휴 덕에 3% 신장하는 깜짝 실적을 거뒀으나, 올 1월부터 6월까지의 총 매출은 지난해 상반기보다 1.6% 늘어난 ‘제자리걸음’이었다. ‘사치’와는 무관한 생필품 매출이 줄어든 것도 타격이다. 쌀과 김장채소 상품군 매출은 각각 -13.1%, -31.5%씩 급감했다.
롯데마트 역시 올해 상반기 매출 신장률이 -2.9%로 부진했다. 더 심각한 것은 세월호 영향에서 다소 벗어나고, 월드컵 특수까지 더해질 것으로 예상했던 6월 실적이다. 롯데마트에서는 6월 한 달간 매출이 -3.3%를 기록했다.
이마트의 6월 전년대비 성장률은 -3.9%로, 올 들어 최저치였다. 이마트 관계자는 “경기 불황으로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고, 닫힌 지갑 때문에 경기 불황이 지속되는 소비 침체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며 “6월 매출이 올해 들어 가장 낮은 성장률을 기록해 소비심리를 살리기 위한 돌파구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백화점은 수치상으로는 대형마트보다 나은 성적표를 받아들었지만, 이 역시 양호한 수준은 아니다. 롯데백화점은 올해 상반기 작년보다 매출이 4.4%, 현대백화점은 3.6% 오르는 데 머물렀다. 이 숫자 속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아웃렛 실적이 포함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백화점 매출만으로는 성장률이 3%대로 떨어진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성장속도가 떨어진다는 점도 문제다. 여름 세일을 평소보다 앞당겼는데도, 올해 6월 한달간 롯데백화점 매출은 전년 대비 4.1%만 증가했다. 상반기 전체(4.4%)보다도 성장률이 낮은 셈이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이어지는 저성장 소비트렌드 때문에 매출이 지난해보다 약간 신장한 정도”라며 “봄에도 날씨가 오락가락하고 이상고온이 발생해 봄 특수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상품군별로는 레저와 일반스포츠를 포함한 용품과 의류(15.2%), 해외패션(8.8%)과 가정가전제품(7.8%)이 그나마 선방한 편이었다. 신세계백화점도 중국인이 선호하는 해외명품(11.3%)과 주얼리·시계(13.4%) 등이 잘 팔렸는데도 여성의류(-1.4%)와 남성의류(-2.5%) 등 패션 장르가 부진해 전체 상반기 실적은 작년 상반기 대비 1.1% 성장에 머물렀다.
지난해까지 홀로 성장하던 홈쇼핑 매출도 세월호 사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GS숍은 지난해 상반기 매출액 기준으로 8% 성장했지만, 증권가에서는 올해 2분기까지 GS숍이 4%대 성장에 그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매출액 성장률(8%)의 반토막에 그친다.
외국인 관광객이 주 고객인 면세점만 성장세를 이어갔다. 롯데면세점에서는 국산 화장품 매출이 배 이상 늘어나면서 중국인 매출이 70% 증가했다.
프라이스체이서만 득세… 저가 상품에만 소비자 몰려
상반기에 잘 팔린 품목을 살펴보면 이런 불황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롯데마트가 올해 상반기 신선식품을 제외한 규격상품이 얼마나 팔렸는지 분석해보니, 품목별로 100만 개 이상 팔린 ‘밀리언셀러’ 제품도 판매수량이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농심 신라면과 제주 삼다수, 펩시콜라 등 100만 개 이상 팔린 히트상품 22개 품목의 평균 판매수량은 지난해 398만여 개보다 23% 적은 305만여 개였다. 새로 밀리언셀러에 포함된 제품도 라면과 생수, 요구르트 위주의 대체 불가 생필품이었다.
꼭 필요한 상품만 사되, 사더라도 저가 상품을 선호하는 ‘프라이스 체이서(price chaser)’도 소비의 한 축으로 떠올랐다. 이마트에서 잘 팔린 제품은 ‘반값 홍삼정’, ‘이마트 비타민’, ‘이마트 전자레인지’ 등 타제품 대비 가격을 40~50% 내린 자체 브랜드(PB)상품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10만원 미만의 저가형 상품은 온라인과 홈쇼핑 채널에서 특히 인기를 끌었다. 현대홈쇼핑에서는 동계올림픽과 월드컵 시즌을 맞아 소포장 견과류와 3만원대 프라이팬 매출이 깜짝 실적을 냈다. G마켓에서 상반기에 가장 많이 팔린 품목은 티셔츠였다. 10위 안에 든 품목 중에서는 커피믹스와 탄산수가 눈에 띈다. 카페 대신 집에서 커피와 각종 과일 에이드 음료 등을 만들어 먹는 알뜰 소비자가 늘어난 데 힘입었다는 분석이다.
불황이 길어지면서 치장하는 데 드는 돈을 아끼려는 여성 소비자들을 위한 ‘셀프 케어’도 틈새시장으로 떠올랐다. 미용실에 가지 않고 머리의 볼륨을 살려주는 ‘로페 뽕고데기’는 현대홈쇼핑 상반기 10대 히트상품 중 1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G마켓 관계자는 “상반기에는 실속형 소비를 즐기는 사람들이 트렌디하면서도 저렴한 상품을 구매하는 ‘가치소비형’ 구매 패턴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하반기 소비 살려라”… 할인행사 잇달아
유통업체들은 상반기 실적을 만회하고, 소비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7월 초부터 앞다퉈 초대형 할인행사를 벌였다. 롯데마트는 지난 6월, 매년 11월에 벌였던 블랙프라이데이 행사를 당겨 진행한 데 이어 7월 3일부터 2주간 ‘통큰세일’을 이어갔고, 이마트도 3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타개하겠다며 7월 초부터 생필품 위주의 대형할인행사를 벌였다. 이갑수 이마트 영업총괄부문 대표는 세일을 진행하면서 “소비심리 회복과 내수활성화를 위해 하반기 첫 행사부터 생필품 위주로 대대적인 행사를 기획했다”며 “하반기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소비회복에 나서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깜짝 행사들이 아직까지 ‘붐’을 일으키지 못하는 모양새다. 침체된 소비심리가 여간해서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반값’이 일상이 되어버린 최근에는 백화점 세일 행사에도 예전만큼 인파가 몰리지 않는다. 이례적이었던 것은 국내 경품 사상 최고액인 ‘10억원’을 경품으로 내걸었던 롯데백화점 행사다. 백화점 측은 여름세일을 시작하면서 ‘10억원 경품’ 응모를 실시했는데, 이 응모행사 참가자 수는 11일 만에 100만명을 돌파했다.
백화점 관계자는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세일이 끝나는 7월 31일까지 응모고객이 300만명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늘어난 백화점 방문고객이 쉽사리 소비하지는 않았다. 롯데백화점의 여름 세일 초반 첫 주말(6월 27~29일)매출은 기존 점포 기준 4.4% 증가하는 데 그쳤다. 지난해 여름 세일 첫 3일 실적이 11%였던 점과 비교하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업계에서는 하반기에 상반기보다 소비심리를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희망하고 있다.
최민도 신세계백화점 영업전략담당 상무는 “하반기에는 추석과 크리스마스, 연말연시 등 굵직한 쇼핑 이슈가 몰려 있는 만큼 대형행사와 사은품 증정 등 실질적으로 고객에 혜택이 많이 돌아갈 수 있는 마케팅을 전개하겠다”며 “핵심 고객으로 자리 잡은 중국인 고객 잡기에도 총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객의 흥미를 끌기 위한 수입패션 상품과 해외 유명 맛집의 국내 유치 트렌드도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하반기에는 수입 패션의 가을·겨울 시즌 신상품과 해외 유명 맛집이 매출과 고객을 모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