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부 사로잡은 삼성 냉장고·세탁기·청소기…삼성 북미 생활가전 디자인의 산실 SDA를 가다
입력 : 2014.09.01 17:49:26
미국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 자리 잡은 SDA(삼성디자인연구소) 사무실이 있는 건물
4층에 들어서기까지는 까다로운 보안절차를 몇 차례 거쳐야 했다. 연구소 3층에선 내년에 선보일 냉장고와 세탁기 그리고 하반기에 나올 스마트폰 갤럭시 디자인 작업이 한창이어서 접근조차 못하게 막았다. 북미 가전시장에서 ‘삼성 돌풍’을 일으키는 주역 가운데 하나로 부상한 SDA는 그렇게 엄격하게 기자를 맞았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GE 월풀 등이 장악하고 있던 북미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존재는 미약했다. 하지만 최근 5년간 북미시장에서 삼성전자 생활가전은 연평균 성장률 10%를 자랑하는 신예로 부상했다. 지금 삼성의 냉장고 세탁기 오븐 레인지는 베스트바이 등 미국의 주요 전자제품 유통매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며 소비자들에게 고급스러움을 한껏 뽐내고 있다.
이처럼 삼성전자 생활가전이 급성장한 배경에는 SDA가 내놓은 탄탄한 디자인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적한 사무실서 번뜩이는 디자인을
까다롭기로 소문난 북미시장 소비자들을 사로잡은 디자인을 만드는 사무실 분위기는 보통 회사와는 전혀 달랐다. 작업 공간은 넓고 한적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독특한 디자인의 소파와 서재, 그리고 싱크대와 식탁까지. 어느 갑부의 별장에 온 듯했다.
디자이너들의 사무실이라 가구의 컬러와 형태도 독특했다.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책장과 소파, 원색이 무질서하게 섞인 책상과 벽이 눈길을 끌었다. 근무시간 역시 자유롭다. 8시 출근, 6시 퇴근 시간을 지키는 사람은 삼성전자 본사에서 파견된 연구소장뿐이다. 느지막이 출근한 디자이너도 있고 며칠째 사무실에서 밤샘작업을 하는 디자이너도 있다. 디자이너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시간은 다함께 한자리에 모여야 하는 ‘회의’가 유일하다.
이곳에서 삼성전자가 미국시장에 내놓은 프리미엄 주방가전 제품인 셰프컬렉션 냉장고와 세탁기,오븐,식기세척기 등이 탄생했다. 웨어러블 기기인 ‘기어핏’과 고급 헤드폰 ‘레벨’ 디자인도 여기서 나왔다.
스파클링 냉장고와 세계 최대 용량의 세탁기는 디자인연구소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캘리포니아의 가정집에서 장기간 거주하면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반영해 개발했다. 탄산수를 마시기 위해 미국의 가정주부들이 주말마다 마트에 가서 박스째 제품을 사다가 냉장고에 보관하는 모습을 보고 탄산 실린더만 교체해 집에서 손쉽게 탄산수를 만들 수 있는 냉장고를 개발하자는 아이디어에 착안한 것이다.
차를 몰고 마트에 가서 트렁크 가득 탄산수를 싣고 오는 수고를 덜어준 점이 미국 소비자들에게 주효했다. 탄산수 병이 차지하던 냉장고 내 공간을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게 한 것도 미국 주부들의 마음에 들었다.
냉동음식보다는 유기농과 신선한 음식을 선호하는 미국 가정의 트렌드를 반영해 냉동실 공간을 줄이는 대신 냉장실 공간을 키웠다. 또 갤런 사이즈의 우유 통이 들어갈 수 있도록 수납함 디자인을 바꿨으며 피자 전용 보관실도 만들었다.
디자인은 책상에서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었다. 삶 전체가 연구실로 들어왔다는 느낌을 줄 정도였다.
진동 줄인 세탁기,가구로 대접받아
미국에 나가는 에코버블 드럼세탁기에는 세탁할 때 발생하는 진동을 줄이기 위해 진동저감시스템을 독자 개발해 채용했다.
목조건물이 많은 미국 주택의 특성상 세탁기는 진동이 심해 지하에 놓을 수밖에 없는데 주부들이 세탁을 할 때마다 무거운 빨래를 지하에서 지상으로 옮겨야 하는 불편함을 느끼는 데서 착안된 제품이다. 획기적인 진동저감시스템 덕분에 삼성전자 세탁기는 미국 주택의 지하실에서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게 됐다. 미국 주부들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청소기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스탠드형이다. 미국 가정에서는 호스가 없이 먼지통과 흡입기가 일체형인 좁고 긴 형태의 청소기를 쓴다.
미국 생활양식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어 삼성전자도 기존 미국 제품들과 같은 형태로 청소기를 만들었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청소기 브랜드 ‘모션싱크’에 ‘업라이트’라는 특징을 가미해 모션싱크 업라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먼지통과 흡입기가 하나로 된 탓에 무거워서 힘이 든다. 마룻바닥이 아닌 카펫 생활이 많은 점도 미국 가정에서 청소를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그래서 삼성디자인연구소는 본체와 바퀴가 따로 움직이는 ‘본체 회전’ 구조로 청소기를 설계해 방향 전환이 쉽고 부드럽게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지름 180mm의 큰 바퀴를 채용해 카펫 청소나 문턱을 넘을 때 적은 힘만으로도 가볍게 잘 굴러가도록 한 것이 미국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스마트폰의 화질과 음질이 향상되면서 스마트폰 주변기기인 이어폰이나 헤드폰에 대한 고급화 요구가 늘어나자 삼성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프리미엄 이어폰과 헤드폰 ‘레벨’ 시리즈도 출시됐다. ‘레벨’ 디자인도 이곳 샌프란시스코에서 나왔다. ‘레벨’과 ‘기어핏’ 디자인을 위해 실리콘밸리의 유명 디자이너 두 명을 영입하기도 했다.
이렇게 제품 디자인을 시작하고 실제로 매장에 상품으로 나오기까지 18개월이 걸린다. 디자인에 착수하면 영감을 얻기 위해 세계 각 지역의 명소로 ‘인스피레이션 트립(영감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렇게 제품의 콘셉트를 잡고 세부적 디자인을 하고, 생산파트와 협의해 어떤 소재와 부품을 쓸 것인지 결정하고, 최종 시제품을 만든 후 양산에 이르기까지 18개월이 걸린다는 것이다. 이 속도는 3~4년 걸리는 경쟁사들에 비해 삼성전자가 독보적으로 빠른 것이다.
CEO가 직접 챙기는 연구소
샌프란시스코 디자인연구소에서는 매년 상·하반기 삼성전자 대표이사를 비롯해 각 사업부장들이 모두 모여 차세대 제품 디자인을 놓고 대대적인 워크숍을 연다. 최근에 윤부근 삼성전자 CE(생활가전)부문 대표이사가 다녀갔다. 내년에 나올 냉장고와 세탁기 디자인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디자인연구소를 샌프란시스코에 둔 것은 세계적인 산업디자인 인력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 산업계에서는 ‘마케팅은 뉴욕에서 하고, 디자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다’는 말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샌프란시스코 최대 번화가에 연구소를 마련한 것도 디자인 우수 인력 스카우트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삼성디자인연구소를 떠받치고 있는 또 다른 조직은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자리 잡은 PIT(프로젝트 이노베이션팀)와 LRL(라이프스타일 리서치랩)이다. LRL의 역할은 미국 소비자들의 가족, 집, 건강, 교통, 일, 교육, 엔터테인먼트, 음식, 의류 등 모든 행동양식을 조사해 미래의 제품을 예측하는 일이다.
냉장고 세탁기 등 생활가전은 제품의 수명주기가 다른 전자제품에 비해 길기 때문에 당장의 트렌드를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의식주와 관련된 생활양식의 변화를 파악해야 한다.
PIT는 LRL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1~2년 후 제품의 모습을 디자인한다. 미국 소비자들을 직접 만나 설문하고 미국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제품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것이 PIT의 몫이다. 삼성전자는 2007년 실험적으로 이곳 미국 산호세에 PIT를 발족하고 현지화한 제품 디자인 발굴에 힘을 쏟았다. 미국 LRL, PIT 성공을 바탕으로 올해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브라질 그리고 서울에도 LRL을 도입했다.
박승민 SDA소장은 “LRL과 PIT 활동을 내년 세계 가전시장 1등을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가전업계는 삼성전자가 북미시장에 특화된 디자인의 가전제품을 선보이면서 최근 냉장고는 연 평균 14%, 세탁기는 7%의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삼성전자 디자인연구소는 1993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디자인경영’을 선언하면서 1994년 미국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 직원 5명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나중에 생긴 로스앤젤레스 무선사업부 디자인연구소와 2008년에 통합됐다가 2012년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