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를 보면 지구촌 국가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전 세계는 ‘식민지배를 한 나라’와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로 구분된다. 물론 지도상에는 그렇게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빈곤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지표와 분쟁지역을 표시한 지도에서 우리는 은밀하게 둘로 나뉘어있는 지구촌을 발견할 수 있다.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됐던 나라들 대부분은 지금도 빈곤과 내전이라는 고통을 겪고 있다. 그 고통의 뿌리는 당연히 식민 통치다. 하지만 식민지배를 했던 국가들은 교묘하게 그것을 미화한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은 후보시절이었던 2007년 2월 이런 내용의 연설을 했다.
“이집트 원정길의 보나파르트, 그 뒤를 이어 알제리의 나폴레옹 3세, 모로코의 리요테의 꿈은 곧 유럽의 꿈이었습니다. 이 꿈은 정복의 꿈이었다기보다는 문명의 꿈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과거를 어둡게 몰고 가는 일은 여기서 멈춥시다.”
뭔가 그럴듯하게 프랑스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듯한 이 연설을 꼼꼼하게 뜯어보면 금세 속내가 드러난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시키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는 연설이었다. 사르코지의 이같은 발언에 대해 시인 에메 세제르는 이렇게 반박한다.
“식민주의는 복음화도, 자선사업도, 지식이나 신의 확산도, 권리의 확대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그것은 규모가 조금 큰 모험가, 해적, 잡화상 또는 선주, 금 노다지를 찾는 사람, 장사꾼의 몸짓이었으며, 탐욕과 무력의 몸짓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유럽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변호의 여지가 없다.”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으며 건설된 나라 프랑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며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영구지배하기 위해 200만 명의 알제리인을 학살했다. 비슷한 학살은 여타 아프리카 식민지나 베트남 같은 아시아권에서도 자행됐다. 프랑스가 남긴 지배의 그늘은 지금도 남아 많은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에도, 시리아나 아이티 내전에도 프랑스 제국주의의 잔상이 남아있다.
유럽의 식민주의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식민주의의 그늘이 언제쯤 걷힐 지는 여전히 요원하다. 식민주의가 뿌린 씨앗이 여전히 빈곤과 분쟁이라는 ‘악의 꽃’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사회학자 장 지글러는 <빼앗긴 대지의 꿈>이라는 책에서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식민지배의 그늘을 증명해낸다. 공교롭게도 식민 지배를 당했던 나라들은 대부분 지구의 남반구에 위치한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로 대변되는 남반구 국가들은 서구 제국주의가 뿌려놓은 비극의 경연장이었다.
이 책은 질문한다. 과연 유럽의 어느 국가가 이들에 대해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가. 그들에게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가. 또 누가 지금 그들이 가지고 있는 원망과 분노의 대해 비난할 수 있는가.
대다수 남반구 국가들이 겪고 있는 처참한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를 보자.
세계 8위의 석유생산국인 나이지리아는 만성적인 기름 부족으로 애를 먹는다. 그들의 땅에서 나는 석유는 이미 이런저런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외국으로 나가버리고, 나이지리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나마 석유가 나아지리아 손에 들어왔다고 해도 정유시설이 없어 무용지물이다. 나이지리아가 소유한 정유 시설은 이미 고장이 나서 사용할 수 없다.
서구의 탐욕은 골수를 빼먹듯 나이지리아의 석유를 빼먹었고, 그들의 탐욕을 유지하기 위해 부패한 독재정권들을 지원했다. 1960년 독립한 나이지리아에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석유기업을 철수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의 보호를 위해 군사적 책략을 서슴지 않았다. 이 결과로 나이지리아는 프랑스로부터 엄청난 대가와 무기를 지원받는 세력과, 영국과 다국적 기업 셸의 지원을 받는 세력의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비아프라 전쟁의 숨겨진 본질이다.
다른 사례를 보자. 나이지리아의 라고스는 유럽의 쓰레기 하치장이기도 하다. 덥고 습하며 후텁지근한 이 나라의 수도 라고스 항구에는 매달 유독성 폐기물(석면, 산성물질, 이온 용제, 전자부품)로 가득한 컨테이너가 들어온다. 수백 년 전 평화롭게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노예로 끌고 갔던 그들이 이제는 그 땅에 산업폐기물을 가져다 버리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배의 그늘은 지금도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새로운 칼날이 되고 있다. 지글러는 “현재의 지배 체제야말로 지난 500년 동안 추진되어 온 억압체제 가운데 가장 살인적인 체제”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지글러가 인용한 코트디부아르 외무장관 올렌 시엔의 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만일 여러분이 노예제도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십시오. 내리쬐는 뙤약볕 밑에서 혹은 빗줄기 속에서 수백만 명의 농부들이 여러 달 동안 힘들게 노동한 대가로 얻은 상품의 가격이, 에어컨이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농부의 고통에 대해서는 단 한 번 생각해 볼 겨를 없이 컴퓨터만 들여다보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방법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지금도 흑인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흘린 피와 땀에 대해, 런던이나 파리·뉴욕에서 값을 매깁니다. 노예상인은 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장 지글러는 절망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기억의 재구성을 말한다. 자기들이 저지른 것에 대해 솔직히 인정하고, 말뿐이 아닌 진정한 ‘인권’을 뿌리내리기 위해 기억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수주의적인 미화나 왜곡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판단을 전제로 한다.
사실 남반구의 비극은 심화될수록 지구촌 전체의 불행으로 확대된다. 굳이 불법체류나, 마약, 해적, 테러 등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인간의 본질과 신뢰, 가치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것은 북반구 사람들에게도 고통스럽다. 개인의 권리와 세계시민으로서의 권리는 이율배반적이지 않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인권존중, 전 지구적인 사회계약에 대한 존중, 자원의 공평한 분배, 공기 물 식량을 보호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영화가 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이 영화는 시에라리온 내전 실화를 다룬다. 다이아몬드 지역을 놓고 벌인 내전의 뿌리에는 식민주의에 뿌리를 둔 다국적 기업들이 버티고 있었다. 영화는 전쟁터에 내몰린 시에라리온의 소년병들이 유럽 자본의 대리전 속에서 참혹하게 죽어가는 현실을 그린다.
필자는 이 영화의 카피를 잊을 수가 없다.
“내전이 다이아몬드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졌다.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다이아몬드를 보지 못했다.”
아직도 아프리카에는 20만 명의 소년병이 있다. 그들을 모른 척하는 게 과연 지구촌 모두를 위한 일인지 고민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