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정보기술이 만들어 낸 세계가 오늘날 우리 경험을 지배하고 있다. 실리콘과 광섬유로 이루어진 가상 현실 또는 증강 현실은 실재는 아니지만 마치 현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자연환경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세계나 인간관계로 이루어진 사회 환경과 달리, 우리 감각 또는 체험과 사이버 현실 사이에는 기계가 놓여 있다. 아무리 현실 처럼 보이더라도 이미 통제되고 조작된 현실이고, 아무리 생생해도 특정 알고리즘을 통과하면서 몇 차례나 걸러진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인류는 타인의 경험을 거울삼아 내 경험을 보충하고 다듬어서 추상하고 증강하는 역량을 타고난다. 다른 생명체와 비교할 때 겨울 뉴런이 발달해 있기에, 팀을 이루어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집단으로 지식과 정보를 업그레이드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따라서 간접 경험의 존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디지털 간접 경험의 시대는 문제적이다. 내 몸으로, 내 감각으로 세상에서 직접 얻는 경험이 이토록 쪼그라든 시대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삶에서 직접 경험이 이토록 빨리 축소되고, 간접 경험만 증가하는 경우도 없었다. 요즘엔 시간 내 찾아가서 만나서 얼굴 보고 대화하고 회의하는 일이 매우 줄었다. 다들 이메일, 메신저, 문자 등을 이용해 연락하고 소통하고 회의한다. 거리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사람들은 주변을 살피지 않는다. 화면에 머리를 처박고, 그 속의 세계를 즐기느라 정신없다.
<경험의 멸종>(어크로스 펴냄)에서 크리스틴 로젠 미국 버지니아대 고등문화연구소 연구원은 직접 경험이 빠르게 약화하는 현실이 우리 몸과 마음에 끼칠 영향을 강력히 비판한다. “우리는 더 이상 경험으로부터 현실을 배우지 않고, 가상 체험을 통해서 실제 경험을 모방한다.” 특히, 디지털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온 청년 세대는 기술 매개 경험의 의존성이 너무나 심각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청소년의 53%는 자신이 선호하는 기술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경험을 포기하느니 ‘후각을 잃는 편을 택하겠다’라고 답했다.
미각이나 후각보다 시청각 체험에 익숙하고, 또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낯선 곳을 찾아갈 때를 생각해 보자. 이젠 너도 나도 스마트폰 지도 앱을 켜고, 검색해 경로를 표시한 후, 화면 속 인공지능과 대화하면서 길을 찾는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주변 사람을 잠깐도 아는 척 않고 화면에만 집중하는 것은 ‘사회적 유리’이다. 이렇게 인간은 함께 있어도 스스로 ‘왕따’가 된다.
사실, 낯선 사람에게 말 건네는 법을 익히는 건 고도의 관계기술이다. 상대의 표정, 말투, 몸짓 등을 살펴서 순간적으로 사람을 감별하고, 남에게 폐 끼친다는 미안함과 거절당할 수 있다는 불안을 견디며 말을 건네는 건 좋은 삶에서 너무나 중요하다. 적당한 사람을 찾아낼 때까지 인내하고, 예의를 갖추어 조심스레 말 건네며, 눈을 마주쳐 무해함을 보여주고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적 기술의 거의 전부가 아닌가.
더욱이 길거리 대화는 기적을 체험시켜 준다. 퉁명스레 무시하고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대부분 잠시 시간 내 친절하게 길을 알려준다. 이를 몸으로 겪는 건 우리 마음에 인간에 대한 소박한 신뢰를 심는다. 사람들 마음엔 이기심보다 우애가 넘치고, 그래서 세상은 살 만함을 체험할 때, 우리는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고 희망의 역능을 기를 수 있다. 물론, 인공지능이 알려주는 대로, 최단 시간에 최단 경로로 이동하는 건 편리하다. 쓸데없는 추측과 성과 없는 시도에 시간을 낭비하지도, 남에게 신세 질 일도 없다. 그러나 화면 따라 걷는 세계에선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빤한 경험 말고 다른 걸 겪기 어렵다. 우발적 경이가 사라진 세계는 지루하고 공허하다. 지루하니까 자극적인 콘텐츠를 갈망하고, 공허하니까 빈 곳을 채우려 자꾸 물건을 사들인다. 그게 바로 알고리즘이 바라는 삶, 소비자의 삶이다.
세렌디피티, 즉 낯선 모험에 몸을 던져 예상 못 한 기회를 잡고, 이를 삶의 일부로 만드는 경험 없이 인간은 좀처럼 성장하지 못한다. 우연히 들어선 카페에서 인생 아지트를 발견하고, 모르고 찾아간 빵집에서 내 취향 케이크를 만나는 건 얼마나 흔한 기적인가. 최적화한 길 안내가 없어도, 평균 별점을 확인하지 않아도, 아니 때때로 그런 걸 무시하고 내 멋대로 행할수록, 우리는 더 나답게 삶을 꾸밀 수 있다.
마찰과 혼란이 가득한 세계에서 귀찮은 상호작용을 견디면서 스스로 경험을 축적하고, 이를 체화하는 건 인생 그 자체를 이룩하는 일에 가깝다. 내 경험 대부분을 타자의 경험으로 채우면, 매끄럽고 편리할진 모르나, 자신도 사라진다. 알고리즘의 유도대로 삶이 평준화되면서 경험의 지평은 좁아지고 성장은 제약된다. 내 몸과 내 마음이 내 멋대로 행할 때 생겨나는 나다움이 약해지면서, 자아는 서서히 기술이 물어다 주는 타자의 경험을 소비하는 일로 채워진다. 특정 기업 이익에 복무하도록 조작된 경험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다.
넘쳐나는 내 경험에 더해진 한 스푼 양념일 때 간접 경험은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치우치고 좁아지기 쉬운 내 경험을 보완하고 확장하며, 독단과 편견에 빠져들어서 진실을 외면하지 않도록 바로잡아 준다. 그러나 현재 우리 경험은 대부분 디지털 간접 경험의 소비로 가득하다. 이처럼 비례가 역전되면, 가짜 경험이 내 경험을 잡아먹는다.
‘알바’가 적은 엉터리 감상이 분명하고, 대량으로 사재기해서 뿌린 블로그가 분명한데도, 내 감각을 부정하고, 어떻게든 좋은 점을 찾으려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광고 글에 속아 넘어가고, 음모론과 가짜뉴스에 중독된다. 대부분 “진짜 현실 처럼 느껴지는 가짜 경험”으로 교차 검증이 필수적이다.
가짜 경험에서 벗어나서 진짜 현실을 확인하려면, 자주 사람들을 만나서 내 몸이 ‘직접’ 느끼는 감각을 그들이 ‘직접’ 느끼는 감각과 맞추어 보고,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진릿값을 확인하며, 그 상호성에 바탕을 두고 사고하고 추론하는 경험을 반복해야 한다. 인간이 빠지고 기술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 진짜 현실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몸과 마음은 서서히 망가진다. 기계와 알고리즘이 아니라 나와 내 경험이 삶의 중심에 서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진실에 가까우며, 의미로 가득하고,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