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헌철 특파원의 워싱턴 워치] 석유매장량 세계 1위 베네수엘라의 비극-현대판 엑소더스… 국민 12% 조국 떠나 남미대륙 핑크타이드(좌파정부 동맹) 사실상 해체
입력 : 2018.10.30 10:59:10
수정 : 2018.10.31 16:38:36
극심한 경제난으로 베네수엘라 국민의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9월 말 유엔총회에서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가 나라를 망친 대표적 사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은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축출을 외교적 목표로 삼고 있다. 베네수엘라가 미국의 텃밭인 남미의 정치경제적 안정을 헤치는 주범이라는 판단이다. 남미의 베네수엘라는 1950년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전 세계 4위였던 자원 부국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예상한 올해 순위는 127위다. 저소득층 국민들은 한 달에 최저임금 기준 18달러(약 2만원)로 버텨야 한다. 게다가 올해 물가상승률은 하루에 4%, 연간 기준으로 100만%를 넘어설 전망이다. 나라에서 주는 저가 구호품으로 생계유지조차 힘들어지자 지난 3년간 무려 230만 명(유엔 공식통계 기준)이 고국을 등지고 남미 각지로 흩어졌다. 전체 인구 3200만 명 중 7%에 해당한다. 민간기구 통계로는 400만 명(12.5%)에 달한다.
현대판 ‘엑소더스’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국외로 탈출한 국민들이 고국에 남은 가족들에게 보낸 외화송금액이 올 들어 240억 달러에 달한다. 이 돈으로 남은 가족들이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 베네수엘라는 석유 매장량이 사우디아라비아보다도 많은 나라다. 전 세계 석유의 약 25%가 베네수엘라 땅에 묻혀 있다.
지난 2000년만 해도 전 세계 석유생산량의 4.4%(8위)를 차지했으나 지금은 10위권 밖으로 훌쩍 밀려났다. 생산시설 노후화에다 글로벌 경기 둔화에 따른 수출 감소 등이 겹친 결과다. 베네수엘라의 비극은 1999년 우고 차베스 정권의 등장과 함께 시작됐다. 2013년 집권한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까지 합해 불과 20년이 안 되는 사이에 국가경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 8월 20일 최저임금을 30배 올리고, 기존 화폐인 볼리바르 푸에르테의 액면가를 10만 대 1로 절하한 새 화폐 볼리바르 소베라노를 도입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멈출 방법이 없자 화폐 단위에서 0을 무려 다섯 개나 지우는 리디노미네이션(액면변경)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또 마두로 정권은 암시장 환율과 정부 환율 간 격차가 20배에 달하자 정부지정 환전소 300곳을 만들고, 경매로 상업환율(DICOM)을 정할 때 민간 참여도 허용키로 했다. 지하시장에 숨어있는 달러를 끌어내기 위한 조치다.
화폐가치 하락을 완화하기 위해 세계 최초로 암호화폐를 법정화폐와 연동하는 정책도 도입했다. 석유란 뜻의 ‘페트로(Petro)’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암호화폐는 석유와 천연자원을 담보로 한다. 1페트로 가격은 베네수엘라 원유 1배럴 가격에 연동된다.
하지만 화폐개혁 이후 물가는 더 빠르게 오르고 있다.
베네수엘라 야당은 지난 9월 기준으로 올해 물가상승률이 48만8865%에 달했다고 추산했다. 하루 물가상승률이 4%에 달한다. 웬만한 나라의 연간 상승률과 맞먹는다.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
▶좌파 반미 포퓰리즘 정권 20년의 유산
연간 물가상승률 137만% 달할 전망
IMF는 최근 발간한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베네수엘라의 연간 물가상승률이 올해 말까지 137만%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연초 1만3000%를 예상했다가 100배 이상 끌어올린 것이다. 이쯤 되면 전망 자체가 무의미한 수준이다.
석유산업 의존도가 워낙 높다보니 경제성장도 불가능한 상태다. IMF는 올해 베네수엘라 국내총생산(GDP)이 전년대비 18% 감소해 3년 연속 두 자릿수 하락세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했다.
차베스 정권 이래 좌파 포퓰리즘이 나라를 무너뜨린 과정은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이들은 산업 국유화, 가격 통제 등 시장경제 말살 정책을 폈다. 대미 경제의존도가 매우 높은 나라임에도 반미 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 정치적 인기를 위해 국내에서 소비되는 기름값은 1센트에 60리터 수준을 최근까지도 유지했다. 여기에 무상의료 등 복지 포퓰리즘 정책은 더욱 강화했으니 국가재정은 바닥이 날 수밖에 없었다.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교육 등 사회를 지탱하는 시스템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올해 4월 이후에만 2만 명, 지난 2년간 3만5000명의 교사가 학생들을 놔두고 나라를 떠나버렸다.
워싱턴포스트지가 관련 기사에 실은 사진은 교육 현장의 비참함을 고스란히 담았다. 아이들 도시락에는 땅콩 몇 개가 전부이고, 학생들은 자국 화폐로 종이접기 놀이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베네수엘라 정부는 외신들의 보도를 ‘가짜뉴스’라고 비난하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은 “(미국이) 군사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권 위기를 꾸며내고 있다”고 항변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고국을 떠난 자국민 숫자 자체가 허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 베네수엘라 사정을 들어보기 위해 베네수엘라에서 양식 사업을 하는 최규성 네네카 대표, 안성희 코트라 카라카스 무역관장 등과 어렵게 연락을 취했다. 베네수엘라는 통신 사정이 좋지 않아 전화 연결이 매우 힘든 상태다.
최 대표는 베네수엘라의 국민성에 주목했다. 위기를 겪으며 근로 의욕은 과거보다 훨씬 높아졌다는 얘기였다. 조국을 떠나지 않고 남은 젊은이들은 책임감 있게 일한다고 했다.
안 관장은 베네수엘라 정부가 외환 통제를 완화하고 해외 자본을 유치하려는 시도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언제쯤 베네수엘라가 비극을 멈추고 국가 정상화의 길로 접어들지 예측하기는 힘들다. 다만 국가경제가 무너져 버린 20년 세월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애꿎은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고통이 눈에 선하다. 베네수엘라의 비극은 남미 정치 지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신자유주의에 맞서 남미 대륙을 휩쓸었던 ‘핑크 타이드(좌파 물결)’가 퇴조한 것이다.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급진 좌파와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온건 좌파가 15~20년간 남미를 쥐고 흔들었다. 이들은 남미국가연합(UNASUR)까지 만들어 미국 영향력에서 벗어난 남미 통합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러나 최근 수년 새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온두라스, 파라과이 등에서 잇따라 우파 정당이 집권했다. 중도좌파가 집권한 멕시코를 비롯해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정도가 핑크 타이드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 처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