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화봉리 389-3. 3만 평에 자리한 서일농원(www.seoilfarm.com)은 슬로푸드 명소다. 2000개 항아리가 진시황 병마용처럼 늘어선 장관을 연출하는 장독대에선 간장, 된장, 고추장이 새하얀 헝겊에 덮여 익어간다. 아름드리나무와 꽃들이 미모를 뽐내는 정원을 지나면 잘 지어진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그곳엔 전통장류 청국장 명인 서분례 서일농원 원장이 오랜 세월 심혈을 기울여 체득한 전통 비법으로 만든 청국장 음식부터 손수 기른 신선한 유기농 채소와 야채들로 정성껏 차린 건강밥상을 내놓은 ‘솔리’ 식당이 운영되고 있다. 서일농원은 청국장과 전통장, 장아찌, 매실식품 등 발효식품 연구의 산실이면서 전통 먹거리를 체험하는 공간이자, 잘 가꿔진 나무와 꽃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정원이기도 하다. 주말이면 단체 손님을 태운 관광버스가 줄지어 들어서고, ‘솔리’에는 건강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로 연일 북적인다.
▶우리 전통밥상이 슬로푸드 원조
화장기 없는 깨끗한 얼굴에 하얀 모시옷이 잘 어울리는 서분례 원장은 잘 우려낸 구기차를 따라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일곱 번 유념한(차를 제조할 때 비비는 작업) 구기차인데 홍삼만큼 몸에 좋습니다. 신진대사를 잘되게 하고, 노화 방지도 되고, 잘 우려내서 쓴맛도 없지요. 중국 보이차는 비교할 바가 안 됩니다”라고 한다. 서 원장은 요새 홈쇼핑 등 방송을 보면 아로니아 열매, 아보카도씨 등 외국산이 최고의 건강식품처럼 소개되는 게 불만이다. 그는 “외국에서 들여온 열매나 씨는 우리네 인체하고는 안 맞습니다. 육식을 즐기거나 기름지게 먹는 나라와 달리 우리는 채식 위주라 위를 항상 따뜻하게 해줘야 하죠. 커피는 많이 마시면 독이 되지만 보리차, 우엉차, 결명차, 구기차 같은 우리차는 자주 마실수록 몸에 좋습니다”라고 알려준다.
서분례 원장은 지난해 정부로부터 전통 예법대로 만드는 전통장류 부문 ‘청국장’ 명인으로 지정됐다. 수십 년간 전통비법의 청국장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노력한 결과 ‘증보산림경제’에 실린 제조법과 가장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울러 청국장 연구의 산실이 된 서일농원은 위생적이고 영양가 높은 청국장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데 정성을 모아 나갈 수 있는 여건을 고루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 원장은 “청국장은 장을 청소해주는 효과가 탁월합니다. 장이 깨끗해지면 음식 분해가 빨라져 전체적인 면역체계를 좋게 만들죠. 면역이 강화되면 암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스나 메르스, 구제역 같은 몹쓸 병이 와도 면역체계가 단단하면 고뿔(감기) 정도로 지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국 전통의 대표적인 발효식품 청국장은 상품화에 뒤처져 있는 실정이다. 연간 시장규모는 400억원 정도다. 청국장과 비슷한 일본 낫또는 2조원 정도로 훨씬 크다. 일본은 청국장 전 단계인 낫또의 균주를 표준화해 음료, 과자, 화장품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팔고 있다. 서원장은 일본 낫또는 우리네 청국장과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는 “청국장뿐 아니라 간장, 된장, 식초, 김치, 젓갈 등 우리처럼 살아있는 발효음식을 많이 보유한 나라도 없지요. 미각은 전통의맛을 찾아 옛날로 돌아가야 합니다. 슬로푸드가 건강식으로 유행하는데, 우리네 밥상이 전부 슬로푸드였습니다. 다시 건강한 미각을, 전통의 음식문화를 되찾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청국장은 암환자 건강상태 호전시켜
사실 청국장이 몸에 이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특유의 냄새 때문에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대해 그는 “청국장이 온도나 습도가 바뀌면 균이 죽으면서 메주 특유의 냄새가 나는데, 살아있는 균을 냉동보관하면 절대 냄새나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청국장 냄새의 원인을 알기 위해 그는 밤낮을 청국장과 씨름했고, 살아있는 균을 유지시켜주는 최적의 환경(37~39도 온도와 85% 습도)을 찾아냈다. 살아있는 청국장의 효능을 확신한 서 원장은 국립암센터를 찾아가 원하는 암환자 40여 명에게 청국장을 제공했다. 그 결과 상당수 환자들이 건강상태가 호전됐다고 한다.
몸에 좋은 청국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질 좋은 콩을 고르는 게 필수다. 다년간 많은 콩을 씻고 불리고 다루다보니 콩 전문가가 됐다. 콩 중에 ‘연천 13호’는 병도 잘 안 걸리고 수확량이 많아 정부도 권장하고 농부들도 선호하는 품종이다. 하지만 ‘연천 13호’는 영양분이 적고 맛과 모양이 좋지 않은 편이다. 8kg짜리 ‘연천 13호’로 두부를 만들어보니 다른 콩들에 비해 10%가량이 덜 나왔고 콩물도 구수하지 않았다. 서 원장은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실험결과를 들고 농민들을 찾아다니며 다른 품종을 심을 것을 권장했다. 청국장에 관한 열정은 가히 국보급이다.
▶외로운 노인 위한 양로원 건립 소망
서분례 원장은 원래 서일여행사를 운영해온 1세대 커리어우먼이다. 지금은 아들이 여행사를 이어받았다. 여행사 사장이던 그가 청국장 명인이 된 데는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 잘나가는 젊은 여사장이던 그는 매년 명절이나 연말이면 그는 직원들과 어린 자녀들을 대동하고 시립양로원을 위로차 방문했다. 서 원장 일행이 방문한 어느 날 노인 한 분이 돌아가셨다. 그런데 함께 생활해온 노인들이 슬퍼하기는커녕 손님 잔치가 취소된 것에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면서 서 원장은 그 각박해진 마음이 안타까웠다. 그때부터 그는 의례적으로 찾던 양로원을 한 달에 한 번씩 찾아가 생일잔치를 열어주고 노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원농장은 원래 노인들이 편히 지낼 수 있는 양로원을 설립하기 위해 1982년에 사들인 땅이었다. 하지만 90년대 말 외환위기로 인해 여행사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양로원 설립은 손을 못 대는 처지였다. 놀고 있는 땅에 콩을 심고 간장, 된장을 만들고, 청국장에 빠져들게 된 게 오늘날 명인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 그는 “제가 노인들을 돌봐온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의 물질을 베풀고 저는 그들에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정신적 보상을 받았습니다”라고 전했다. 젊은 시절에는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녔지만 이제 시장에서 산 2만원짜리 옷을 입고 다녀도 부끄럽지 않다고 한다. 노인들에게 베풀고 베풂을 받으면서 참 인생을 알게 된 덕분이다. 서 원장은 노인들을 위해 남모르게 봉사활동을 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그는 “양로원을 짓는 일은 여전히 제가 반드시 이루고 싶은 꿈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추억 담긴 ‘항아리’사랑
경북 영덕이 고향인 서분례 원장은 항아리 사랑도 남다르다. 젊은 시절 아파트로 이사갈 때 1층을 고수한 것은 항아리를 놓을 장독대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지금도 농원의 정자에 올라 항아리가 늘어서 있는 걸 보면 대왕대비가 부럽지 않다. 그는 “항아리를 보면 어릴 적 그 옆에서 돌멩이를 쌓아놓고 놀던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어머니가 물로 청소해 흔적이 사라졌지만 또 다시 쌓으면서 항아리 곁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된장, 간장, 고추장 만드는 걸 자연스럽게 배웠죠. 저에게 항아리는 어머니와 함께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입니다”라고 한다. 서 원장은 지금도 냉장고 대신에 항아리에 소금을 깔아 달걀을 보관하고, 겨울이면 짚단 위에 재워놓은 살짝 언 홍시를 꺼내 먹으며 옛 추억을 회상한다. 세상에 좋고 귀한 것들을 두고 항아리와 청국장에 빠져있는 그를 보고 친구들은 안쓰럽게 여겼다. 하지만 요즘에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자신만의 농원을 가꾼 서 원장을 부러워한다. 그는 “제가 땀 흘려 가꾼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고 사람들이 건강해지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게 행복”이라며 “제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람들이 ‘경상도 청국장 아지매’가 하던 얘기가 사실이구나 하면서 청국장을 즐겨 먹길 바랍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