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중심이던 전동화 흐름이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 빠르게 달리던 전기차는 기술·인프라·시장 현실 앞에서 속도를 조절하고 있고 그 자리를 하이브리드가 채우기 시작했다. 하이브리드는 내연기관과 전기모터를 함께 탑재한 차량이다. 두 동력을 상황에 따라 자동 전환하며 연비를 높이고 배출가스를 줄이는 방식이다. 충전 없이 전기를 쓰며 연료비 부담도 낮다. 소비자 수요가 하이브리드로 쏠리자 완성차 업계 전략도 이에 맞춰 바뀌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전 차종에 하이브리드를 확대하고 있고, 도요타와 혼다도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를 주력 모델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유럽은 규제 일정을 조율하고 있고 중국은 PHEV에까지 혜택을 확대하며 전략 전환을 뒷받침하고 있다. 수요와 정책, 기술이 맞물리며 자동차 산업은 또 한 번의 변곡점에 들어서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에서 하이브리드로 넘어가는 흐름은 단순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시장 수요에 기반을 둔 구조적 전환”이라고 설명했다.
전기차를 향한 소비자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한때 ‘미래의 답’으로 불리던 전기차는 보조금 축소와 충전 인프라 부족, 고금리라는 복합 변수에 직면하며 성장이 주춤해졌다. 반면 하이브리드는 실용성과 경제성을 앞세워 중심 무대로 빠르게 올라서고 있다.
시장 변화는 수치로 드러난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전기차(BEV) 판매량은 전년 대비 약 30% 줄었다. 전체 승용차 판매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6%로, 2022년의 10%에서 3.9%포인트 하락했다. 같은 기간 하이브리드 판매는 오히려 29.2% 증가했다. 전기차에서 하이브리드로 수요가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전기차의 성장세가 꺾인 데는 보조금 의존 구조가 한몫했다.
보조금이 사라지자 즉각적인 수요 위축이 나타났다. 충전 인프라도 발목을 잡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기차 보급 확대는 충전 인프라 확충 속도에 좌우된다”고 지적했다. 장거리 주행을 위한 충전 계획은 여전히 소비자에게 부담이다.
수입차 업계 관계자는 “보조금이 사라진 뒤로 전기차 수요는 곧바로 타격을 받았다”며 “현실적으로 소비자들이 하이브리드를 더 안정적인 선택으로 여기고 있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생산 현장에서도 변곡점이 감지된다. 현대차는 지난 4월 말 울산공장에서 아이오닉5와 코나EV 생산을 일시 중단했다. 수요 둔화와 미국의 철강 관세 확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통계상 수요 감소가 실제 생산 조정으로 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가격 부담도 만만치 않다. 배터리 가격은 하락세지만 여전히 내연기관차 대비 전기차 초기 구입비용은 높은 편이다. 여기에 고금리가 겹치면서 “전기료 대신 할부이자”라는 말까지 나왔다. 보조금 효과가 사라지자 이 같은 부담은 고스란히 소비자 몫이 됐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이 하이브리드다. 충전 인프라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연료비를 아낄 수 있고, 전기차 대비 구입 가격도 낮다. ‘충전 없이 타는 전기차’로 불릴 만큼 실용성이 높다. 도심 주행 시 회생제동으로 충전되고 고속주행 구간에서는 내연기관이 동력을 보완한다. 이중 동력 구조 덕분에 정체 구간이나 장거리 주행에서도 연비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올해 상반기 하이브리드차 신규 등록 대수는 18만 7903대다. 전년 같은 기간보다 24.3% 증가했으며, 전체 승용차 등록의 23%를 차지했다. 사실상 다섯 대 중 한 대가 하이브리드다.
하이브리드 수요는 중고차 시장에서도 뚜렷하다. 중고차 전문 플랫폼 엔카닷컴에 따르면 2020년 2.6%였던 하이브리드 차량 등록 비중은 올해 5.9%까지 늘었다. 같은 기간 판매 비중도 2.27%에서 5.07%로 상승했다.
하이브리드는 가격도 높게 형성되고 있다. 올해 2월 기준, 2022년식 쏘렌토 4세대 하이브리드는 평균 3573만원, 렉서스 ES300h는 4966만원 수준에서 거래됐다. 시세 안정성과 유지비용 측면에서 하이브리드의 실용성이 부각되고 있다는 평가다.
업계는 하이브리드가 더 이상 과도기용 차량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충전 부담 없이 전기를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아파트 거주자나 지방 거주자에게도 진입 장벽이 낮다. “전기차는 환경에 좋지만, 하이브리드는 현실에 맞다”는 소비자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는 분위기다.
시장조사업체 마켓앤마켓츠는 글로벌 하이브리드차 시장 규모가 2024년 2430억달러에서 2032년 6321억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연평균 성장률은 14.4%에 달한다.
한동안 주변에 머물렀던 하이브리드는 이제 전동화의 현실적인 대답으로 자리를 바꿔 앉고 있다. 소비자 선택이 바뀌자 산업 구조도 뒤따라 움직이고 있는 모양새다.
글로벌 완성차 업계는 EV 일변도에서 빠르게 균형 전동화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올초 신규 변속기 기반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공개한 바 있다. 원래 하이브리드 차량의 변속기는 엔진과 전기모터의 동력을 합쳐 바퀴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현대차그룹은 모터 1개를 변속기에 탑재해 엔진을 보조해왔지만, 최근에는 모터를 2개로 확대했다. 회사 관계자는 “하이브리드 차량은 엔진과 모터의 힘을 함께 쓰는데, 모터가 2개로 늘면서 엔진 효율이 더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새 시스템 도입으로 연비와 주행 성능도 크게 개선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현대차그룹은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기존 3종에서 5종까지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새 구동 기술을 경차부터 대형차까지 폭넓게 적용할 계획이다. 내년에는 후륜구동 기반의 2.5 터보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출시하고, 이를 제네시스 핵심 차종에 우선 탑재할 예정이다.
회사는 2028년까지 연간 133만 대 판매, 2030년까지 모델 수를 두 배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도요타는 북미·유럽·일본 주요 시장에서 하이브리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고 인기 모델은 6개월 이상 대기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미국 배터리 공장 증설과 함께 2030년까지 미국 판매의 20%를 PHEV로 채운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혼다는 EV 투자 규모를 30% 줄여 2027년부터 13종의 신형 하이브리드 출시, 2030년 220만 대 판매를 계획하면서, 당초 EV 30% 목표를 20%로 낮췄다.
업계 관계자는 “PHEV는 외부 전원으로 충전이 가능해 짧은 거리는 전기차처럼 달리고, 장거리에서는 엔진이 개입하는 구조”라며 “기존 내연기관 인프라를 활용하면서도 전동화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중간 해법”이라고 말했다.
볼보도 전동화 전략을 우회했다. 볼보는 ‘2030년 완전 EV 전환’을 수정해 BEV와 PHEV 합산으로 매출의 90~100%를 달성한다는 ‘중간 전략’을 채택했다. PHEV를 회사 실적의 핵심 축으로 설정한 것이다.
미국 GM은 2035년 EV 전환 계획을 사실상 재조정했다. 미국 내 가솔린 차량 공장에 40억달러를 추가 투자하고 2027년 북미 전용 PHEV 모델 출시를 공식화했다.
메르세데스‑벤츠 역시 2025년 GLC·GLE 등 주요 PHEV 모델 출시와 플랫폼 통합을 통해 전기와 내연기관 라인을 공존시키는 전략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전기차는 여전히 미래차의 핵심 축으로 꼽힌다. 그러나 기술·인프라·정책 현실이 지역마다 차이를 보이는 가운데 완성차사들은 EV와 하이브리드·PHEV 병행이라는 ‘균형 전동화 전략’을 새로운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글로벌 완성차업체들이 하이브리드 전략을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흐름의 배경에는 유럽과 중국 시장의 큰 변화가 있다. 원래 중국과 유럽은 세계 주요 전기차 시장이었다.
전기차 중심 전략이 충전 인프라, 배터리 수급, 고금리 등 현실적 제약에 부딪히면서 각국 정책과 소비자 수요가 전략 수정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전기차 전환의 선두에 섰던 지역이지만 최근엔 규제 속도 조절 움직임이 뚜렷하다.
유럽연합(EU)은 2035년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를 골자로 한 전환 로드맵을 유지하고 있지만, 독일은 e-퓨얼 차량에 예외를 두자고 주장하고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자국 자동차 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규제 유예를 요구하고 있다.
프랑스 산업부 장관은 “목표는 유지하되, 접근은 유연해야 한다”고 발언하며 실제 시행 시점이 조정될 가능성을 열어두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전기차(EV)와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가 동반 성장하고 있다.
올해 5월 중국의 PHEV 판매량은 47만 3000대로, 전년 동기 대비 27% 증가했다. 같은 기간 BEV(순수 전기차) 판매 증가율은 10% 수준에 머물렀다. BYD, 창안, 리샹 등 로컬 브랜드는 낮은 가격과 긴 주행거리를 앞세운 PHEV 모델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일각에서는 “전기차 수요 피로감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 당국의 정책도 유연해졌다. 기존에는 BEV 중심으로 보조금을 몰아줬지만, 최근에는 PHEV에도 일정 수준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충전 인프라 부족과 배터리 원가 부담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제조사들은 BEV 단독 전략보다 하이브리드 병행을 현실적 대안으로 판단하고 있는 셈이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완성차 업체마다 속도는 다르지만, 전기차와 하이브리드를 병행하는 쪽으로 방향은 같아지고 있다”면서 “전동화 전략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 조정 단계에 들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박소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