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지난 1월 28일부터 금융사별 퇴직연금 성적표(수익률)가 전격 공개됐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은 퇴직연금을 다루는 각 금융회사들의 운용기간별 중·장기 연평균 수익률, 퇴직연금 금융 상품별 수익률 정보들을 통합해 공시했다.
이전에도 퇴직연금 관련 수익률·수수료율과 상품정보는 각 금융회사 홈페이지와 금융업권별 협회를 통해 공시됐다. 그러나 이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반쪽짜리 공시에 가까웠다.
공개된 수익률에는 가입자가 부담하는 수수료율과 금융상품의 보수 등이 제외되지 않아 ‘실질 수익률’을 알 수 없었다. 즉 공시 수익률이 가입자의 실질 수익률보다 수수료율만큼 높게 공시되어 온 것이다. 해당 금융회사·금융업권별로 뿔뿔이 흩어져 수익률을 내고 서로 다른 기준의 수수료율 체계가 따로 공시돼 가입자 입장에서는 직접 비교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익률 대비 운용보수 높은 금융사
가려낼 수 있어
이전 공시는 퇴직연금 가입 사용자·근로자가 서로 다른 회사 간의 성과를 비교하기 어려웠다. 또한 금융상품의 경우, 퇴직연금 상품만을 살펴보기 힘들어 퇴직연금 가입 근로자들이 퇴직연금 상품을 선택 변경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운용보수 등이 공개돼 수익률에 대비해 많은 수수료를 챙겨가는 비양심적인 금융사를 가려낼 수 있다.
수익률이 공시된 이후 그야말로 촌극이 벌어졌다. 은행·증권·보험 할 것 없이 저마다 ‘1등’이라고 주장하며 가입자 유치에 나섰다.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됐음에도 ‘가짜 1등’이 더욱 늘어난 것이다. 이들은 1년 단위, 특정 분기, 혹은 수신고, 가입자 등 한시적 수익률이나 수익률과 관련 없는 요소로 ‘가짜 1등’을 자처하며 가입자에 혼동을 주고 있다.
이에 정확한 금융사별 수익률을 살피고 수익률 대비 높은 운용보수를 책정한 금융사들도 알아봤다.
퇴직연금 수익률 1%의 위력
# 15년차 직장인 A(45)씨는 올해 45세로 퇴직연금 계좌에 5000만원을 적립했다. A씨가 피땀 흘려 모아놓은 연금 자산으로 그가 60세를 맞아 퇴직하는 15년 뒤에는 얼마로 불어날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계산한 국내 연금 펀드의 2012~2013년 평균 수익률(2.6%)을 적용하면 총 7556만원이란 계산이 나온다. 노후 생활비로 월 300만원이 필요하다고 가정하면 가까스로 2년 버틸 수 있는 액수다.
수익률을 1% 높여 3.6%를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15년 뒤 적립금은 8500만원가량으로 1000만원가량이 차이가 난다. 비율로 따지면 약 30%의 은퇴자금이 더 늘어나는 셈이다. 1%의 복리가 가져오는 위력이다. 흔히 퇴직연금 사업자들이 공시하는 수익률을 살펴보면 1~2% 차이가 나는 것을 보고 ‘고만고만’하다 여겨 지나치기 쉽다. 주가나 펀드 수익률에 익숙해진 영향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퇴직연금의 경우 수익률을 판단하는 잣대를 달리해야 한다. 의무적인 장기투자 상품인 만큼 수익률 관리는 물론 보수를 과도하게 책정하는 사업자에 대한 견제도 필수적이다.
한숨만 나오는 국내 퇴직연금 수익률
먼저 국내 퇴직연금 사업자들의 수준에 대해 좀 짚고 넘어가 보자. OECD에 따르면 한국의 2012~2013년 기준 연금 수익률은 연평균 2.6%에 불과하다.
업계에서는 보수적으로 평가하는 OECD 수치 대신 국내 공시 데이터를 활용해 연평균 연금 수익률을 계산하더라도 3%대 초반을 넘지 못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보수적인’ OECD 수치를 통해 다른 국가들의 수익률을 살펴보면 대비가 명확하다. 미국의 퇴직연금 수익률은 11.7%, 일본은 8.9%로 국내 수익률의 3~4배 가까이 된다. OECD 국가 평균치인 4.7%에도 2%이상 차이가 난다. 기준금리가 바닥으로 향해 조만간 수익률 기근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연금 적립액 수준도 다른 나라에 비할 게 못 된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금 적립액 비중은 6.5%로 네덜란드(166.3%), 미국(84.2%), 캐나다(71.3%) 등 주요 선진국의 10분의 1 이하다.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는 에스토니아(9.6%), 체코(7.7%) 등과 비교해도 GDP 대비 연금 적립액이 적은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 연금 자산이 좀처럼 불어나지 못하는 것은 사업자들의 소극적인 운용이 하나의 원인으로 꼽힌다. 연금 재원의 대부분이 원금이 보장되는 상품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주식·채권형 펀드와 같은 실적배당형 상품이 전체 연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에 미치지 못한다. 연금을 위험자산에 투자하는 것을 꺼리는 풍토가 연금 빈곤으로 이어진 것이다.
DB형 5년 수익률 하나대투 1위
다수 증권사 상위권 포진
퇴직연금은 알려졌다시피 확정급여형(DB형), 확정기여형(DC형), 개인형퇴직연금제도(IRP) 등으로 나뉜다. 퇴직급여를 운용해 수익이 나든, 손실이 나든 회사가 책임지는 확정급여형 DB, 퇴직연금 가입자가 노후 자산을 직접 굴리는 확정기여형 DC로 나뉜다.
수익률은 1년, 5년, 7년 그리고 분기별로 공시된다. 20~30년 이상 장기적으로 운용되는 장기투자상품인 만큼 5년, 7년 단위의 장기 수익률이 중시된다. 수익률 비교는 운용사업자가 늘어난 시점인 5년 수익률을 기준으로 비교했다.
DB형의 경우 하나대투증권(3.86%)을 필두로 신한금융투자(3.75%), IBK연금보험(3.74), 유안타증권(3.74%) 등 증권사들이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외 보험사들이 몇몇 눈에 띌 뿐 가장 많은 점유율을 지닌 은행은 20위권 내에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최근 5년간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평균 수익률(3.41%)은 원리금비보장형 상품의 평균 수익률(2.71%)보다 다소 높게 나타났다. 가입자나 가입기업이 원리금비보장형 상품의 투자위험을 부담하기 때문에 위험에 상응하는 원리금비보장형 상품의 수익률이 높아야 한다는 상식에서 다소 어긋난다. 결국 투자 성공 확률이 낮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위권 대형은행 다수 포진
소극적 운영이 자충수
하위권 순위를 살펴보면 은행들이 집중포진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적립금 기준으로 상위권에 있는 삼성생명, 우리은행, 신한은행 등이 눈에 띈다. 메트라이프 생명의 경우 낮은 수익률을 기록한 데 이어 높은 비용부담률(1.2%)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이 직접 관리하는 DB형은 현재 70%에 달하는 점유율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리스크관리 측면에서 은행에 많은 자금을 예치하고 있다. 전체 적립액을 기준으로 볼 때 은행권의 시장점유율은 50%를 넘고 증권사의 점유율은 17% 수준이다. 직원의 퇴직금을 대신 굴려주는 기업들이 위험 자산에 많은 돈을 넣긴 어려운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보수적인 운용을 견지하는 은행들이 시장점유율의 절대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금빈곤에서 탈출하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은행들의 투자방식이 변하지 않는 이상 DC형 가입자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DC형 5년 수익률 1위 유안타증권
증권·생보 상위권 각축
DC형 5년 수익률을 살펴보면 최고 수익률을 기록한 곳은 유안타증권(4.15%)이다. 2위는 IBK연금보험으로 두 운용사만이 4%가 넘는 수익률을 기록했다. 3위는 NH투자증권(3.9%), 4위는 한국투자증권(3.8%)이 차지해 다시 증권사들이 순위에 올랐다. 이어서 교보생명(3.85%), 신한생명(3.7%), 동부생명(3.68%)이 차지하며 생보사들의 분전도 돋보였다.
상위 10위 안에는 제주은행(8위 3.68%)만 눈에 띄고 20위권까지 시야를 넓히면 15위를 차지한 대구은행(3.5%) 외에 5대 은행 중에는 하나은행(3.43%)이 간신히 20위에 걸쳐 있다.
최근 5년간 퇴직연금 수익률을 살펴보면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수익률이 실적배당형 상품의 수익률에 비해 높고, DB형 퇴직연금과 DC형의 수익률은 큰 차이가 없었다.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수익률이 높았던 것은 퇴직연금제도 도입 초기에 시장 선점을 위한 금융회사 간 치열한 경쟁 때문이다.
또한 상승과 하락을 반복했던 주식 시장의 상황으로 원리금 비보장형 상품의 수익률이 낮아진 측면도 있다. DC형 퇴직연금과 실적배당형 상품은 가입자 또는 가입 기업이 위험을 부담하며 투자위험에 상응하는 수익을 추구하지만 수익률이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운용사들의 ‘스킬’이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DB형과 DC형을 비교해볼 때 타업권 대비 증권사의 수익률은 명확하게 높이 나타나고 있다. 가입자들이 위험자산에 상대적으로 많이 투자하거나 증권사가 제공하는 투자상품 혹은 서비스가 상대적으로 우수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부족한 수익률에도 DC형 수요 UP ▲
미국 401K 모델 공격적 투자 늘어나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국내에도 퇴직연금 선진국과 같이 DC형 상품과 실적배당형에 대한 수요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DC형 연금을 활성화해 국민들의 연금 재원 확대와 미국 주식시장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미국의 DC형 연금은 법 조항의 숫자를 따 ‘401K’로 불린다.
연금의 규모는 4조달러가 넘으며 주로 주식, 채권 등 위험자산에 투자한다. 미국 근로자들은 입사 뒤 자동으로 이 연금에 가입한다. 탈퇴는 근로자가 해지 의사를 밝힐 때만 허용된다.
미국 신규 근로자의 401K 가입률은 92%에 달한다. 401K 가입률이 높은 이유 중 하나다. 1980년대 중반까지 2000선을 넘지 못하던 다우존스지수는 401K 연금에서 대규모 자금이 유입된 뒤 상승세로 전환, 현재 1만8000선을 넘었다.
송흥선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장은 “연금을 주식, 채권 등 위험자산에 투자할 수 있는 풍토를 마련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며 “DC형 상품에 대한 인센티브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IRP수익률 IBK연금보험 1위
비용부담률도 0.15로 최저수준
IRP수익률은 IBK연금보험이 3.98%로 1위를 차지했다. 특히 비용부담률은 0.15%로 최저수준을 기록해 눈길을 끌었다. 1.2%를 부담해야 하는 보험사와는 무려 1% 넘게 차이가 나는 수치다.
2위는 하나대투증권(3.94%)이 차지하며 증권사 강세를 이어갔다. 이어 흥국생명(3.88%), 동부화재(3.73%), 현대해상(3.72%) 등 생보사와 손보사들이 상위권에 랭크됐다.
10위권 내에 은행사는 찾을 수 없고 20위권 내에 중앙은행은 1곳도 없었다. 수익률이 가장 나쁜 운용사는 메트라이프생명(2.31%)이 꼽혔다. 이외 삼성증권(2.43%), 신영증권(2.49%), 경남은행(2.75%)이 뒤를 이었다.
과도한 비용부담률 운용사
펀드보수·판매수수료 공개해야
이번 공시에서 달라진 점은 가입자의 총 비용 부담률을 공시한다는 점이다. 총비용 부담률은 가입자가 1년간 부담한 총수수료 비용을 연말 퇴직연금 적립금으로 나눠 산출한 값이다.
운용·자산관리 수수료, 펀드보수(판매·운용·수탁·사무관리), 펀드판매수수료 등으로 복잡한 퇴직연금 수수료는 운용사별로 비교하기 쉽도록 총비율 부담률을 기준으로 비교 공시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1년 동안 IRP 계좌에 700만원을 납부한 경우 연간 수수료(계산 단순화를 위해 연 수익률 0% 가정)가 운용사에 따라 적게는 1만500원, 많게는 6만1600원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퇴직연금 수수료가 무서운 것은 적립금에 따라 정률로 산정하기 때문에 어떤 운용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10~20년 후에는 연간 수수료 차이가 100만원 이상 벌어질 수도 있다.
사업자들이 경쟁적으로 퇴직연금 가입자 조기 유치에 나선 가장 큰 이유다.
예를 들어 연 700만원씩 20년을 납입해 적립금이 1억4000만원가량 쌓였을 경우 수수료율이 지금과 같다면 부담률이 0.15%일 때는 연 21만원을, 부담률이 0.88%일 때는 무려 연 123만2000원을 수수료로 내야 한다.
유형을 막론하고 비용부담률이 높은 운용사를 살펴보면 메트라이프생명 DB형(1.2%)과 DC형(1.18%)으로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이외 3위는 신영증권(1.12%)으로 1%를 넘는 운용사는 총 3개사다. 상위 10위권에는 생보, 증권사들이 주를 이뤘다.
퇴직연금 유형별로 총비용 부담률을 비교해 보면 DB형 0.44%, DC형 0.65%, IRP형 0.40%로 평균 0.50% DC형 퇴직연금이 상대적으로 높고 DB형과 IRP형이 다소 낮았다.
전체 금융권별로 총비용부담률을 비교해 보면 생보 0.48%, 손보 0.46%, 은행 0.44%, 증권 0.58%, 평균 0.50%로 은행이 낮고 증권사가 높은 편이다.
증권사의 총비용 부담률이 높게 나오는 것은 증권사의 퇴직연금 자산 중 원리금비보장형 상품에 투자된 비율이 2015년 12월 말 기준 증권사가 16.3%로 은행 5.4%, 생보 4.9%, 손보 1.5%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원리금비보장형 상품은 적립금의 대부분이 펀드에 투자되기 때문에 펀드 관련 비용이 수반되며 증권사의 총비용 부담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황별 운용사의 비용 부담률이 0.5% 이상 벌어진 것은 가입자 입장에서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가입자의 선택을 돕기 위해서 각사의 펀드보수와 판매수수료에 대한 공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