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7일 경희대 평화의전당에 6000명의 학생들이 운집했다. 강당이 가득 찼지만 학생들은 강당 밖에 진을 치고 혹시라도 빈자리가 나기를 고대하며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강당 안에 들어온 학생들이나 강당 밖의 학생들이나 모두 밝게 상기된 표정이었다. 삼성그룹에서 실시하는 올해 상반기 마지막 ‘열정락서’ 강연에 감동을 받으러 온 얼굴들이었다.
이날 이돈주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마케팅 담당 사장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주제로 대우그룹 공채에서 떨어진 부산 출신 열혈청년이 삼성그룹 사장으로 돌아오게 된 이야기를 털어놨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왔으나 엔지니어가 되는 대신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학 석사를 했다. 1979년에 삼성전자에 입사했고 2007~2008년 삼성전자 CIS를 총괄했다.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주제로 말을 시작했다.
성장과정
“나는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다. 이것은 논픽션이다. 1963년부터 68년까지 초등학교를 다녔다. 국민소득이 1000달러가 안됐을 때의 일이다. 우리 동네엔 공장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모두 파괴됐다. 주민들은 그 벽돌을 주워다 집을 지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친구들의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내가 중학교에 갈 때 많은 친구들이 가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갔는데 함께 간 친구는 하나도 없었다. 어렸을 때는 서열 싸움이 심했다. 코피가 나면 지는 거였다. 어린 심정에 이기려고 싸웠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영화 <친구>에 나오는 그 학교(부산고)였다. 실제 영화에 나오는 친구들은 6~7년 후배들이지만 조폭이 된 친구도 있고 일식집을 연 친구도 있다.” 이 사장은 지금 ‘왕따’를 걱정하고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도 있지만 그 역시 힘든 어린 시절을 거쳤다고 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으니 아주 잘 풀린 경우지만 사실 수많은 갈등을 넘어섰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는 운동을 잘했다. 야구를 할까 축구를 할까 했는데 부모님이 ‘넌 키가 작으니 안 돼’라고 해 공부를 했다. 중학교(69~71년) 때는 라디오 조립에 빠져들었다. 4년간 라디오를 풀었다 조립했다 반복했다. 딱 두 번 소리가 났는데 그게 그렇게 신기했다.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태권도도 했다. 검은 띠를 땄다. 육사를 가려고 태권도뿐 아니라 다른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러다가 형의 얘기를 듣고 다시 공부를 계속했다.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으나 수업시간에 집중했다. 또 고교 졸업까지 숙제를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이 화가 나서 책의 특정 부분을 100번이나 써오라고 했다. 아무도 그게 진짜 숙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선생님조차 그게 진심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밤을 새워가며 100번을 써서 냈다.” 어려서부터 몰입하는 걸 배운 셈이다. 그런 자세는 영어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됐다. “고교 때부터 영어를 배웠다. 대학 다닐 때는 미국 문화원의 영어회화 서클에 가입했다. 영어가 되는 게 신기해서 외국인만 보이면 달려가서 영어를 했다. 대학 2~3년 때는 주위의 모든 것을 영어로 해봤다. 버스 번호도 영어로 빨리 읽는 연습을 했고 모든 상황을 영어로 풀었다. 군대에 가니 옆에 미군부대가 있었다. 옆 부대 장교라고 소개하고 찾아가 매주 교류하며 영어로 대화했다.”
그는 외국인들에게 전자제품을 팔고 영어로 프레젠테이션 하는 능력을 그때 익힌 것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숱한 갈등을 겪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는 운동선수가 되려고 했으나 안돼 진학했고, 중학교 때도 운동을 계속해 육사에 진학하는 꿈을 꿨다. 고교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취업과 대학을 놓고 고민했는데 어머니가 학교에 안 가면 자식이 아니라고 해서 대학을 갔다.”
그렇게 대학엘 갔지만 가난한 집 학생이었기에 4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1975년부터 78년까지 4년 동안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대고 생활비며 모든 것을 충당했다. 그때 상대에게 간단히 설명하는 재능이 생겼다. 수학과 물리 영어를 가르쳤는데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그때 생겼다.”
어려운 고비가 그에게 새로운 능력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대학을 마칠 땐 대학원엘 가냐 엔지니어가 되느냐 고민을 했다. 대학원엘 가려니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세일즈 엔지니어가 되자고 했다. 그때 사귀던 여학생에게 10년 뒤 미국 가서 전자제품 팔 것이라고 했다.” 그 여학생은 부인으로 지금도 그때 얘기했던 것을 증언해 준다.
대학 졸업 후 이 사장은 ROTC에 지원해 77년부터 78년까지 복무했다. “장교 훈련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모른다. 주먹에 박힌 모래를 입으로 빨아내면서 했다. 그 과정에서 체력적으로 힘들어도 그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군대에 가선 아랫사람들을 잘 해주자고 했다. 통신장교로 들어갔는데 그때 배웠던 통신시스템에 관한 지식이 지금도 진짜로 도움이 된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 그였지만 사실 직장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선배들은 도와주지 않지 부서도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됐든 일을 하다 보니 88년부터 95년까지 미국 주재원으로 나가게 됐다. 대학 때 10년 뒤 미국 가서 전자제품 판다고 했었는데 그대로 됐다. 거기서 끝나고 러시아 법인장으로 나갔다. 그때 러시아 직원이 “사장님이 장사 잘해서 월급 많이 주는 회사를 만들 수 있냐”고 물었다. 진짜 진지해 보였다. 그에게 약속했다. 4년 후 진짜 그렇게 됐다. 러시아에서 삼성은 현지 컨설팅펌이나 금융기관보다도 월급을 많이 줬다.”
러시아에서 성공한 그는 생활가전사업부 전략마케팅 팀장으로 돌아왔다.
최근 삼성전자의 최고 핵심부서인 무선사업부 마케팅 담당 사장으로 승진한 그는 갤럭시노트2를 들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전 세계 전문가들을 상대로 삼성의 제품을 설명했다. 거기서 마크 저커버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미국에 주재할 때 나는 고작 과장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나이의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는 사장이었다. 왜 그들은 CEO이고 왜 나는 삼성전자의 과장인가. 빨리 올라가서 그들과 얘기를 하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들과 이야기를 할 지위가 되니 빌 게이츠는 은퇴했고 잡스는 세상을 떴다. 그들 대신 21세의 저커버그를 만난 것이다.”
그가 사장이 된 이유
이 사장은 어떻게 해서 사장이 됐는지를 풀어나갔다. “군대 생활할 때는 물론이고 어릴 때 싸우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자세를 배웠다. 늘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배웠다. 특히 좋아하는 것에 몰두할 수 있는 것도 내가 사장이 된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모든 아버지와 같은 아버지이기도 하다고 했다. “여러분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도 파자마 입고 집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싶고 또 아들과 딸을 무척 사랑하는 아버지다.”
그러면서 20대 젊은이가 꼭 해볼 것은 계산하지 않은 무모한 도전이라고 강조했다. “젊을 때 잘 모른다고 주저하지 말고 계산도 하지 말라. 무엇이든 해보면 그게 인생에 도움이 된다. 반면에 젊은이가 해선 안 될 것은 ‘낙담 실망 포기’다.”
“그게 진짜 바보 같은 짓이다.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 수없이 기뻐했듯이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면서 좋은 사람을 얻으려면 먼저 진심으로 다가서라고 했다. “뜻이 맞는 사람과 창업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어떻게 좋은 사람을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 내가 진심으로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도 나를 진심으로 대한다.”
이돈주 사장이 제시한 인생 최고의 스펙 9가지① 머리 - 막힘없는 사고와 창조적 발상을 하는 머리를 가져라
② 눈 - 단편적으로 보지 않고 입체적으로 관찰하는 눈을 가져라
③ 귀 - 크게 열어 남의 말을 경청하는 귀를 가져라
④ 입 - 정제되고 남에게 좋은 덕담을 하는 입을 가져라
⑤ 얼굴 - 항상 미소를 띠고 여유가 넘치는 얼굴을 가져라
⑥ 심장 - 뜨겁게 끓어오르고 힘찬 박동으로 열정이 가득한 심장을 가져라
⑦ 가슴 - 항상 남을 배려하고 매사 감사하는 마음을 품은 따뜻한 가슴을 가져라
⑧ 배 - 배고프다고 나태하지 않고 도전정신이 있는 배를 가져라
⑨ 다리 - 현문현답(현장에 문제가 있고 현장에 답이 있다)을 실천하는 다리를 가져라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