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상당한 사회의식을 지닌 여자였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급진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를 지지했으며 가부장적인 할리우드 시스템을 비판한 의식 있는 여배우였다.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라는 말이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악녀(惡女)’ 정도를 뜻하는 말로 유통된 이 단어의 번역엔 약간의 오류가 있다. ‘치명적 여인’이나 ‘운명적 여인’ 정도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악녀’는 말 그대로 ‘악한 여인’이지만 ‘치명적 여인’이라는 말에는 더 많은 은유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엔 타고난 유전형질이나 시대적 운명에 의해 남을 치명적으로 몰고 갔고 자신도 치명적인 인생을 살았던 여인이 ‘팜므 파탈’이다.
‘악녀’라고 불리며 국제지명수배 명단에 올랐던 일본의 전설적인 적군파 간부 시게 노부 후시코는 대표적인 팜므 파탈이다.
‘악녀’라고 불리며 국제지명수배 명단에 올랐던 일본의 전설적인 적군파 간부 시게노부 후시코 역시 팜므 파탈이다. 그의 옥중수기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는 바랜 흑백사진처럼 잊혀졌던 한 시대의 전설에 관한 이야기다. 벤구리온 공항 테러사건, 일본항공 납치사건, 싱가포르 연료저장소 폭파 사건, 쿠알라룸푸르 미 영사관 점거사건 등 굵직한 테러 때마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외신에 등장했던 그녀는 1970년대의 대표적인 팜므 파탈이었다.
그녀를 두둔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가 행한 ‘악행(惡行)’에는 운명적인 부분이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이다. 전후 도쿄의 달동네에서 태어난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장공장의 여사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나 첫 직장이 그녀에게 던져준 건 고졸 여사원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뿐이었다.
그녀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메이지대학 야간부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투사가 된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의 학생운동이 실패하자 그녀는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그녀는 이곳에서 총이야말로 남녀노소를 평등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레바논의 베이루트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그녀는 2000년 11월 일본에 잠입했다 체포된다.
옥중에서 쓴 이 책은 그녀가 팔레스타인 전사 사이에서 낳은 딸의 일본국적 취득을 위해 법무성에 보낸 탄원서가 주된 내용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무렵 사망했다. 이 치명적인 여인은 놀랍게도 탄원서에서 테러리스트답지 않은 따뜻한 모성애를 보여 준다.
“너를 떠올리면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어미다”는 구절에선 콧날이 시큰할 정도다. 그녀가 만약 인간적 번민에 시달리지 않는 테러리스트였다면 이 책의 울림은 약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너무나 둔중한 번민을 담고 있다. 어머니는 여자보다 강하다고 한다. 이 책을 보면 어머니는 ‘악녀’보다도 강한 것 같다.
마릴린 먼로가 전성기를 누리던 20세기 중반까지도 할리우드에서 여자의 인품은 머리 모양보다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여자는 인간성이 아니라 외모로 평가됐고 그게 전부였다. 오죽했으면 먼로 스스로 “할리우드는 키스 한 번에 1000달러를 지불하지만 영혼은 50센트인 곳”이라는 비탄을 남겼을까. 그녀에게 할리우드는 삶의 중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 여인의 영혼을 갉아먹는 지옥이기도 했다.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다. 동시 출간된 먼로의 자서전 '마릴린 먼로, My Story'와 평전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를 보면서 미인박명의 메커니즘을 읽어낼 수 있었다.
먼로는 사춘기 무렵부터 사람들이 자신을 독립된 인간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그녀는 가만히 있어도 남자들에게 성적 코드로 받아들여졌고 남자들의 이런 반응 때문에 여자들은 먼로를 적대시했다. 자서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여자들은 남편이 나와 이야기하는 것만 봐도 도난 경보기 같은 소리를 냈다. 젊고 예쁜 할리우드 여배우들조차 나를 미소보다는 냉소로 대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먼로를 ‘머리 나쁘고 예쁜 여자’로만 기억한다. 왜 그런 관념이 생겼는지 의문이다.
평전에서는 놀라운 사실들이 많이 발견된다. 그녀는 공식석상에서 ‘국민(The People)’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고 한다. 무슨 연유로 섹스 심벌인 여배우가 국민이라는 말을 많이 썼을까? 이 지점에서 우리의 그릇된 관념은 교정돼야 한다.
먼로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상당한 사회의식을 지닌 여자였다고 한다. 그녀는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전 미국을 휩쓸 때 당당히 매카시즘에 저항한 배우였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급진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를 지지했으며 가부장적인 할리우드 시스템을 비판한 의식 있는 여배우였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몸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몸에 갇혀 불행해진 끝에 정신병에 시달렸고 결국 쓸쓸하게 죽는다. 사람들이 자기들 편한 대로 명명한 섹스 심벌이라는 말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아무래도 그녀의 불행이 그녀만의 책임이라고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