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조를 보였던 글로벌 완성차업계가 다시 중국산 부품을 늘리고 있다. 전기차 캐즘 장기화와 가격 경쟁 격화로 원가 절감이 생존 과제로 떠오르면서 배터리와 전장 부품, 희토류 등 핵심 부품에서 중국산 채택이 확산하는 분위기다. 비용 절감과 공급망 다변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완성차업계의 ‘실리 전략’이 확산하면서 국내 부품업계와 정부도 새로운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몇 해 전만 해도 완성차업계에서 ‘중국산 부품’은 곧 저가·저품질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최근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국내외 완성차 업체들이 앞다퉈 중국산 배터리와 부품을 다시 끌어안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배터리에서 나타나고 있다. 기아는 지난해 준중형 전기차 EV5에 탑재할 81.4kWh급 배터리를 중국 CATL로부터 공급받기로 확정했다. 앞서 기아의 소형 전기차 ‘레이 EV’에도 저가형 리튬인산철(LFP) 배터리가 처음 적용됐는데 이 배터리 역시 중국산이었다. 업계 집계에 따르면 국내에 새로 등록된 LFP 배터리 탑재 전기차 상위권에는 테슬라 모델Y·모델3와 함께 기아 레이 EV, KG모빌리티 토레스 EVX가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토레스 EVX에는 중국 BYD의 배터리가, 르노코리아의 하이브리드 모델에는 중국 신왕다 배터리가 들어간다. 완성차업계 관계자들은 “성능보다 가격이 판매를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며 “특히 중국 배터리의 경우 기술력 수준도 높아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분위기다”고 밝혔다.
실제 국제에너지기구(IEA) 집계를 보면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LFP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 17%에서 지난해 37%로 뛰었고, 올해는 4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에선 2026년 LFP 침투율이 47%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문제는 LFP 시장의 80% 이상을 중국 CATL과 BYD 두 회사가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니켈·코발트 기반의 고성능 삼원계(NCM) 배터리에 집중해 온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는 뒤늦게 LFP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상대적으로 뒤쳐처 있는 상태다. 그사이 완성차 업체들의 선택지는 좁을 수밖에 없다.
미·중 패권 경쟁이 상당 기간 지속되면서 완성차업계의 셈법은 오히려 중국 쪽으로 기울고 있다. 지난 4월 열린 베이징 모터쇼는 이런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무대였다. 현대차는 중국 전략형 전기차 ‘아이오닉 V’를 공개하면서 베이징자동차와 공동 개발한 플랫폼은 물론, CATL 배터리와 중국 자율주행 기업 모멘타의 지능형 주행 기술까지 그대로 적용했다. 현대차는 앞으로 5년간 중국에 신차 20종을 투입하고 2030년 연간 판매 50만 대를 회복하겠다는 목표까지 내놓았다. 메르세데스-벤츠 역시 모멘타와 공동 개발한 첨단 운전자보조 시스템을 2026년 출시 예정 신차 9종에 탑재하기로 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런 현상을 두고 “완성차 업체가 껍데기만 남고 핵심 기술은 중국에 의존하는 이른바 ‘ESR(empty shell risk·속 빈 강정 위험)’이 심화하고 있다”며 “중국 기업이 협력의 대상이자 동시에 위협 요인으로 동시에 부상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우회 수출 전략도 눈에 띈다. 중국 지리자동차그룹 계열의 전기차 브랜드는 르노코리아 부산공장에서 전기 SUV를 생산해 북미로 수출하고 있다. 첫 선적 이후 반년여 만에 누적 수출 물량이 3000대를 넘어섰고, 월간 최대치를 경신하기도 했다. 부산공장이 이렇게 활용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분 관계가 있다. 지리차가 2022년 르노코리아 지분 34%가량을 인수해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각국이 중국산 완성차·부품에 대한 견제를 강화할수록, ‘메이드 인 코리아’ 라벨을 통해 중국 기술과 자본이 우회하는 통로는 오히려 넓어지고 있다.
가격 경쟁력의 이면에는 지정학적 문제도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4월 미국의 상호관세 발표에 중국이 보복관세와 함께 중희토류·희토류 자석 등 7개 품목에 대한 수출 통제로 맞대응하면서, 전 세계 완성차 업계가 생산 중단 위기에 몰렸던 일이 대표적이다. 당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업계 전문가를 인용해 희토류 재고가 3~6개월 치에 불과해 중국이 수출을 완전히 중단하면 자동차 생산 라인이 멈출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후 지난해 10월 중국 상무부는 희토류 채굴·제련·재활용 관련 기술까지 수출허가 대상에 포함하는 한층 강화된 통제 조치를 발표했고, 반도체·AI 용도 신청은 사안별 심사를 거치도록 했다. 여진은 올해도 이어졌다.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발언을 계기로 중국이 대일 희토류 수출을 사실상 옥죄면서, 올해 3~4월 일본으로의 수출량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88%, 82% 급감했다. 일부 품목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제는 이 여파가 한국에도 곧바로 전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중국산 원소재를 들여오지 못하면 한국도 일본을 거쳐 수입해온 2차 가공 소재를 확보하지 못하는 ‘공급망 연쇄 충격’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실제로 정부는 올해 초 산업통상부 주재로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자동차 업종 단체와 소재부품장비 공급망센터 관계자들을 불러 긴급 공급망 점검회의를 열었다.
그렇다고 완성차·부품업계가 중국 의존을 손 놓고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용 절감과 리스크 분산을 동시에 노리는 이원화 전략이 병행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국내 배터리 3사 중 처음으로 르노와 파우치형 LFP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삼성SDI와 SK온도 2026년 양산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제철의 재활용 철 기반 미세 철분말 공정과 에코프로비엠의 LFP 양극재 개발을 연계해, 저가형 전기차에 쓸 국산 LFP 배터리를 자체 내재화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역 다변화 전략도 동시에 추진된다. 완성차 업체들은 동남아·인도 등 현지 생산 기지를 활용해 중국산 부품에 대한 편중도를 낮추려 하고, 정부출연 연구기관들도 아세안 주요국과 인도를 대상으로 자동차 부품 수입선 대체 가능성을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연구를 내놓고 있다. 다만 이런 다변화에는 시간과 비용이라는 이중의 비용이 따른다. 김광주 SNE리서치 대표는 한 배터리 콘퍼런스에서 “완성차 업계는 한 번 배터리를 도입하면 쉽사리 교체하지 않는 특성이 있어, 국내 기업이 양산에 나서기 전에 중국 업체가 계약을 선점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값싼 중국산이 일단 차량에 탑재되면, 국산 대체재가 나와도 교체 유인이 크지 않다는 뜻이다. 미국의 관세 정책 변화도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수입 자동차와 부품에 일률적으로 25%의 관세를 부과했다가 이후 다소 완화된 조치로 선회했는데, 이 과정에서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현지 생산 비중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현대차·기아의 미국 현지 생산은 전년 동기 대비 13%가량 늘었지만, 대미 수출 물량은 오히려 10%가량 줄었다. 관세 리스크를 피하려는 현지화 전략이 국내 부품 수출 기반을 약화시키는 역설적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일본은 경제안전보장추진법에 따라 배터리 설비 투자액의 약 3분의 1을 정부가 직접 지원하고 있으며, 도요타는 한 지원 사업에서 총사업비 3300억 엔 가운데 1178억 엔을 지원받은 바 있다. 유럽연합은 2024년 10월부터 중국산 배터리 전기차에 확정 상계관세를 부과 중이고, 일본은 배터리를 경제안보 핵심 품목으로 지정해 2030년까지 자국 내 150GWh 규모의 생산능력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전기차 생산 지원을 완성차 기업에 대한 보조금 차원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배터리·부품·소재·소프트웨어로 이어지는 산업 생태계 전체를 지키는 정책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품질 관리 역시 새로운 숙제로 떠올랐다. 중국산 부품의 가격 경쟁력은 명확하지만, 국내 완성차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 신뢰가 걸린 문제인 만큼 안전성·내구성 검증 체계를 별도로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배터리 화재나 전장 결함 이슈가 한 번이라도 불거지면 브랜드 전체의 신뢰도가 흔들릴 수 있어서다. 여기에 중국의 수출 통제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지정학적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완성차업계는 ‘얼마나 싸게 조달하느냐’와 ‘얼마나 안정적으로 조달하느냐’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업계에서는 최근 흐름을 단순한 ‘중국산 부품 회귀’보다는 원가 경쟁력과 공급망 안정성을 동시에 고려한 전략 변화로 해석하고 있다. 전기차 캐즘 장기화와 가격 경쟁 심화로 비용 절감 필요성이 커지면서 중국산 부품 채택이 늘고 있지만, 특정 국가 의존도가 높아질 경우 공급망 리스크와 기술 경쟁력 약화 우려도 함께 제기된다. 이에 완성차 업체들은 중국산 부품 활용을 확대하는 한편, 핵심 부품의 국산화와 생산거점 다변화도 병행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 역시 핵심 산업 공급망 점검과 국내 생산 기반 확대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업계는 향후 자동차 공급망 경쟁의 핵심이 가격 경쟁력과 안정적인 조달 체계를 동시에 확보하는 데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완성차업계 관계자는 “원가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중국산 부품 활용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공급망 다변화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