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믹스가 세상에 처음 나온 건 1976년 12월이다. 인스턴트커피와 프리마(분말 크리머)와 설탕을 섞어서 작은 봉지에 담은 제품으로, 종이컵에 쏟은 후 뜨거운 물을 붓고 살짝 휘저어 마시면 그만이었다. 커피의 쓴맛을 우유의 부드러움과 설탕의 단맛으로 감싸, 누구나 간편하게 즐길 수 있게 만든 걸작이었다. <커피, 이토록 역사적인 음료>(틈새책방)에서 진용선은 커피믹스를 “인스턴트커피에 크리머와 설탕을 가장 이상적인 비율로 배합한 ‘꿀조합’ 커피”라고 칭송했다.
이전에 믹스커피가 없었던 건 아니다. 미국 내전 때 이미 커피와 우유와 설탕을 섞어 딱딱하게 굳힌 ‘에센스 오브 커피’를 캔에 담아서 북군 병사들에게 보급했다는 말이 전한다. 그러나 병사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기술적 한계에 군수업체의 부정부패가 더해져서, 딱딱하게 굳거나 상한 상태로 지급되곤 했기 때문이다. 병사들 반발 탓에 얼마 못 가 배급이 중지됐다.
커피믹스는 달랐다. 장기 보관이 가능하고, 휴대하기 편했으며, 뜨거운 물만 부으면 언제든 최적의 커피 맛을 냈다. 진용선에 따르면, “커피믹스는 해방 이후 근대화를 목표로 한 빠른 경제 성장 속에서 하나의 미덕으로 받아들여진 ‘빨리빨리’ 문화에, 정보와 재료가 함께 버무려지는 통합과 융합 과정에서 생겨난 초유의 발명품”이었다. 이 창의적 상품은 한국인의 일상에 빠르게 스며들었다. 집이나 학교, 사무실이나 공장, 식당이나 댄스 홀, 거리나 운동장 등 곳곳에서 사람들이 한 봉 45원짜리 싸고 맛 좋은 커피를 즐기며 도란도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커피믹스의 달콤 쌉싸름한 맛보다 인간을 매혹하는 맛은 많지 않다. 단맛은 우리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 탄수화물에서 나는데, 우리 몸이 가장 환영하는 맛이다. 반면에 쓴맛은 독성 물질에서 느끼는 맛으로, 혀끝에 닿는 순간 인간의 몸을 강하게 긴장시킨다. 그래서 아이들은 살짝만 달아도 더 달라고 아우성치고, 조금만 써도 곧장 뱉어낸다.
자연은 복합적이고, 문화는 대단히 오묘하다. 우연히 음식을 구했는데, 단맛과 쓴맛이 함께 느껴지면 먹어야 할까? 위험에 따른 성취에 우리 뇌의 보상회로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안전한 맛인 단맛, 짠맛(미네랄), 감칠맛(단백질), 기름맛(지방)에 위험한 맛인 쓴맛, 신맛(부패)을 가미한 음식은 먹고 살아남으면 도파민 분출을 일으킨다. 달콤 쌉싸름한 맛이나 달콤새큼한 맛에 우리가 더 집착하는 이유다. 쓴맛, 단맛, 기름맛을 이상적 비율로 뒤섞은 커피믹스가 점차 인기를 끌고 지금껏 사랑받는 건 아주 자연스럽다. 이 맛은 인간을 매혹한다. 2017년 특허청 설문조사에서 훈민정음, 거북선, 금속활자 등과 함께 ‘한국을 빛낸 10대 발명품’에 선정되었을 정도다.
믹스(mix), 그러니까 뒤섞기는 우리나라 전통 음식 문화의 중요한 한 특징이다. 이미 존재하는 온갖 음식을 한 상에 벌여놓고 골라 먹는 양반의 반상 문화도, 정성껏 요리한 갖은 음식을 한 그릇에 몰아넣고 비벼 먹는 서민의 비빔밥 문화도 모두 섞음에 바탕을 둔다. 더 나아가 수렴과 융합은 고정성과 정체성에 집착하지 않고 유동성과 개방성을 바탕 삼아 고유의 창조성을 이룩해온 한국 문화의 핵심 특징이기도 하다.
역사 내내 한국인은 대륙과 해양, 북방과 남방에서 온갖 문물들을 받아들여 그 원리와 실상을 깊이 탐구한 후, 그 이질적인 것들을 뒤섞어 조합하고 거기에 아이디어를 덧대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을 만들곤 했다. 가령, 아파트는 근대 주거 기술의 모든 편의성을 집약한 후, 그 위에 온돌 문화를 뒤섞은 독창적 건축 양식이다. 커피믹스도 같다. 커피도, 설탕도, 크리머도 모두 바깥에서 들여왔으나, 그들을 한 봉지에 담아 독특한 맛을 이룩한 ‘커피믹스’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문화 실천이다. 일찍이 백남준은 이를 ‘비빔밥의 미학’이라는 말로 간결히 정리한 바 있다.
비빔은 이질적인 것을 아무렇게나 뒤섞는 게 아니다. 남는 음식을 대충 쓸어 넣고, 되는대로 섞으면 사료나 퇴비일 뿐이다. 제대로 조리한 비빔밥이라면, 밥은 고슬고슬하고, 나물은 아삭아삭하고, 버섯은 졸깃졸깃하고, 고기는 폭신폭신해야 한다. 그 각각의 맛은 지나치게 쓰거나 시거나 달거나 맵거나 비리면 안 된다. 음식 하나하나는 비비기 좋게 가늘고 자잘해야 하고, 그릇에 담을 때는 오색에 맞게 정갈히 놓여야 한다.
따로 먹어도 맛있는 개성 강한 음식을 모으고 섞어 더 맛있게 조리하는 건 무척 어렵다. 더욱이 그게 새로운 요리로 느껴질 때까지 나아가려면 대담한 상상력과 상당한 공이 들어간다. 백남준은 “청탁병탄(淸濁倂呑)할 배짱”과 “헐렁헐렁 살 수 있는 유머”가 있어야 융합적 창조성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청탁병탄이란 맑은 것과 흐린 것을 함께 삼킨다는 말로, 넉넉한 도량으로 세상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능력이다. 낯설고 어색한 것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면서도 끄떡없는 담대한 성품 없이는 이것저것 비벼서 새로운 걸 만들 수 없다.
헐렁헐렁은 살아 있음의 본질이다.
<웃음>(문학과지성사)에서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생명을 시공간의 변화에 맞춰 “공존하는 갖가지 요소를 동시에 펼쳐 보이는” 것으로 정의한다. 생명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주변 배치에 따라 항상 유연하게 자기 모습을 바꾸어간다. 완전히 단단히 고정돼 절대 변하지 않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엔 정통도 없고, 본질도 없다. 자라는 곳이 바뀌면 귤은 얼마든지 탱자가 될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발끝에 돌부리가 걸리면, 매일 오가는 거리라도 당장 걷는 법을 바꿔야 한다. 기존에 걷는 법을 고집하는 사람은 자빠져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웃음을 “살아 있는 것에 덧씌워진 기계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어떤 것이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계처럼 어제의 동작을 반복할 때 웃음이 우리 안에서 저절로 터져 나온다. 이것저것 뒤섞어 벌여놓고, 그곳에서 번뜩이는 창조성을 기꺼이 즐기는 것, 이것이 비빔의 정신이다.
한마디로, 비빔의 문화는 이질성의 만남이다.
그건 비위 강한 배짱과 헐렁한 유머의 힘으로써 사물들을 낡아빠진 배치에서 끄집어내서 낯설고 새로운 배치 속으로 밀어 넣고 거세게 휘저을 때 생겨나는 창의성이다. 그건 한 사물을 궁구하고 파고드는 창의성과 실천 양식이 다르다. 그래서 백남준은 비빔을 “둘 이상의 문화가 같은 공간에서 충돌,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서로 다른 뿌리에서 나온 것들을 나란히 정렬하고, 서로 맞부딪히고 갈등하고 쟁론하도록 정교히 배치함으로써 그 안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솟아나도록 하는 일이다.
일찍이 백남준은 음악과 영상, 조각과 연행, 문학과 미술, 동양과 서양이 한 작품 속에서 텀벙텀벙 서로 드나들며 뒤섞이고 어우러져 완전히 새로운 예술로 재탄생하는 혼종의 창조성을 보여주었다. 다매체 시대를 맞아 이것저것 뒤섞어 볼 것이 넘쳐나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옛것에 집착하지 않는 비빔의 창조성이 아닐지 싶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