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자동차상으로 꼽히는 ‘월드카 어워즈(World Car Awards)’의 ‘세계 올해의 고성능 자동차(World Performance Car)’ 부문은 지금까지 포르쉐, 아우디, 맥라렌, BMW 등 프리미엄 브랜드의 독무대였다. 그리고 그러한 시장에 2023년 기아의 ‘EV6 GT’를 시작으로 2024년 현대차 ‘아이오닉 5 N’, 올해는 ‘아이오닉 6 N’이 연달아 지명되며 현대차 브랜드가 고성능차 시장의 게임체인저로 등장했다.
‘세계 올해의 고성능 자동차’ 부문은 실제로 유럽 브랜드의 전유물이었다. 2006년 이 상이 제정된 후 ‘카이엔 S’를 시작으로 포르쉐가 8차례, 아우디 4차례, BMW, 맥라렌, 페라리, 벤츠가 각각 한 번씩 호명됐다. 그 공고한 성벽에 균열이 생긴 건 2023년. 기아의 ‘EV6 GT’가 쟁쟁한 유럽 경쟁자들을 제치고 해당 부문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듬해인 2024년에는 현대차 ‘아이오닉 5 N’이 뒤를 이었고, 2026년에는 ‘아이오닉 6 N’이 선정됐다. 고성능차 시장의 불문율이 단 3년 만에 흔들린 상황, 올해 심사위원 즈보니미르 유르치치는 수상 평가에서 “현재 경쟁이 치열한 고성능 전기차 시장의 수많은 모델이 빠르게 달릴 순 있지만 운전의 재미, 정밀함, 진정한 주행 감각을 동시에 갖춘 차는 많지 않다”며 “아이오닉 6 N은 가장 비싼 모델도 아니고 제원상 가장 끝에 있지도 않지만 까다로운 도로에서 정통 스포츠카처럼 움직일 수 있는 차”라고 극찬했다. 현대차 측은 이번 수상에 대해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기반으로 한 첨단 전동화 기술과 모터스포츠 경험이 뒷받침됐다”며 “특히 움직이는 연구소 롤링랩에서 얻은 차량 데이터가 결합돼 극한으로 끌어올린 주행 성능이 큰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아이오닉 6 N의 탄생 배경을 이해하려면 현대차그룹의 고성능 전동화 개발 과정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현대차는 지난 11년간 세계랠리챔피언십(WRC)에 참가하며 축적한 모터스포츠 노하우를 기반으로 ‘롤링랩(Rolling Lab)’이라는 독자적인 주행 데이터 개발 방법론을 구축했다. 말 그대로 도로 위를 달리는 연구소다. 예를 들어 ‘아이오닉 5 N’의 PE(Power Electric) 시스템을 결합한 롤링랩 RN24가 실제 서킷과 일반 도로를 누비며 수집한 방대한 데이터는 ‘아이오닉 6 N’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시스템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이를 기반으로 완성된 동력 성능은 숫자만으로도 꽤 압도적이다. 전·후륜 배치된 듀얼 모터의 합산 최고출력은 448kW(609마력), 최대토크는 740Nm(75.5㎏f·m)나 된다. 여기에 일정 시간 동안 최대 가속 성능을 일시적으로 증폭시키는 ‘N 그린 부스트’를 활성화하면 최고출력은 478kW(650마력), 최대토크는 770Nm(78.5㎏f·m)까지 치솟는다. N 런치 컨트롤 사용 시 제로백은 단 3.2초. 포르쉐의 ‘911 카레라 GTS’(3.4초)보다 빠른 기록이다. 고성능 전기차의 숙명적 딜레마로 꼽히는 배터리 무게는 E-GMP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섀시 설계로 해결했다. 아이오닉 6 N에는 차세대 서스펜션인 지오메트리가 적용됐다. 여기에 노면 상황과 주행 속도에 따라 댐퍼 특성을 실시간으로 변화시키는 스트로크 감응형 전자제어 서스펜션(ECS)도 탑재됐다. 전륜에는 ‘하이드로 G부싱’, 후륜에는 ‘듀얼 레이어 부싱’을 적용해 고속 코너링 시 타이어가 지면을 파고드는 그립감을 최대화했고, 일상 주행에선 소음과 진동을 줄였다. 하나의 섀시로 트랙 위에선 스포츠카, 매일 타는 세단의 요건을 채운 셈이다. 독일 자동차 전문지 <아우토 빌트>가 “섀시가 상당히 기대된다”며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기차는 내연기관 엔진이 없기 때문에 기어 변속이 없다. 구조적으로 내연기관 스포츠카가 주는 변속의 쾌감을 제공하기 어렵다. 그동안 이 명제는 고성능 전기차가 감내해야 할 한계였다. 현대차가 이를 대신해 내세운 기술은 소프트웨어와 음향. 대표적인 것이 ‘N e-쉬프트’와 ‘N 앰비언트 쉬프트 라이트’다. N e-쉬프트는 전기모터의 출력을 마치 수동 변속기처럼 단계적으로 제어해 가속감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패들시프트를 당길 때마다 계기판과 실내 조명이 연동돼 변속 타이밍을 알려주는 N 앰비언트 쉬프트 라이트는 내연기관 스포츠카에서 느끼던 시각적 흥분을 전기차에 이식한 사례다. 가상 주행 사운드를 구현하는 ‘N 액티브 사운드 플러스’는 고성능 스포츠카의 배기음을 재현했다. <아우토 빌트>가 “전기차에서 스포티한 감성을 추구한다면 아이오닉 6 N이 정답”이라고 말한 건 이 기능들에 대한 평가다. 서킷 주행을 위한 전용 기능도 대거 탑재됐다. ‘N 드리프트 옵티마이저’는 후륜 토크를 정밀하게 제어해 전기차로도 드리프트를 가능하게 한다. ‘N 트랙 매니저’는 배터리 온도, 모터 출력, 냉각 시스템 등을 서킷 주행에 최적화된 상태로 통합 관리한다. ‘N 레이스 캠’은 주행 영상을 속도·G포스 등 실시간 데이터와 함께 기록하는 기능으로 취미 운전자부터 아마추어 레이서까지 자신의 주행을 분석하고 개선할 수 있게 돕는다. 영국의 <오토 익스프레스>는 “BMW M3의 예상치 못한 라이벌”이라며 “수많은 자동차 전문가가 인정한 고성능 전기차의 새로운 기준인 아이오닉 5 N의 뒤를 잇는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호주의 <카익스퍼트>는 아이오닉 6 N을 가리켜 “한국 최초의 트랙용 전기 스포츠 세단”이라고 정의했다. 한 수입차 딜러사 관계자는 “포르쉐나 BMW의 고성능차는 레이싱팀으로 출발해 수십 년의 노하우를 축적한 후 완성됐다”며 “2015년에 생긴 N 브랜드는 고작 10여 년의 역사로 유럽의 헤리티지에 대항하고 있다”고 전했다.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