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을 소재로 한 콘텐츠 중에서 가장 뜨거운 것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이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애니메이션 콘텐츠인 케데헌은 9월 17일 기준 누적 시청수(시청 시간을 러닝타임으로 나눈 값)가 3억회를 넘기는 신기록을 세웠다.
케데헌은 9월 초에 넷플릭스의 모든 영화·쇼를 통틀어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기존 1위였던 ‘오징어 게임 시즌1’의 2억 6520만과의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남산타워와 남산 둘레길 등이 소개되면서 이들은 관광 성지로 등극했고, 극장 주인공이 김밥 한 줄을 한 번에 먹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이를 따라 하는 챌린지 영상도 유튜브에 넘쳐난다.
아이돌 그룹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여기에 실린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8곡은 9월 16일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100’에 10주 연속 동시 진입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메인 타이틀인 골든(Golden)은 이날까지 통산 5주째 정상을 이어갔다.
K-콘텐츠의 힘을 보여주는 케데헌이지만 재미있는 부분은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일본의 소니픽처스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다. 이 회사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를 통해 새롭게 히어로물을 부활시켰고, 이번에 케데헌을 통해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음악을 담당한 회사도 소니뮤직이다. OST가 현재 큰 성공을 거두면서 소니뮤직에도 짭짤한 수익을 안길 것으로 예상된다.
7월 18일 일본서 개봉해 첫 주말에만 384만 관객을 끌어들이며 역대 최고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도 소니 자회사인 애니플렉스의 작품이다. 이들이 2021년 선보인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은 407억엔의 수입을 올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316억엔을 누르고 일본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하는 등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도 9월 16일 기준으로 330억엔의 흥행 수입을 올려 다시 한 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제쳤다. 현재도 상영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이 역대 일본 흥행 1위에 등극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귀멸의 칼날’ 최종장 3편 중 무한성편은 1편이다. 앞으로 두 편이 더 남아 있다는 얘기다. 소니의 콘텐츠 질주가 당분간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귀멸의 칼날은 북미에서도 압도적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다. 9월 12일 북미에서 개봉해 사흘간 총 7000만달러(약 976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이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개봉 첫 주에 거든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이다. 이전까지 기록은 1999년 개봉한 ‘극장판 포켓몬스터: 뮤츠의 역습’이었는데, 이를 26년 만에 갈아치운 것이다.
일본인에게 소니는 특별한 의미다. 패전 후 잿더미 속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워크맨, 트리니트론 TV와 같은 혁신 제품을 선보이면서 ‘메이드 인 재팬’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곳이다. 당시 일본 기성세대에게 소니는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장인정신을 기반으로 한 제조기술을 의미하는 ‘모노즈쿠리’에서도 소니는 특별한 위치였다. 특히 대기업이 되어서도 끊임없는 혁신을 강조한 ‘벤처정신’은 다른 일본 대기업에서 찾기 어려운 소니만의 DNA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전자 분야에서 소니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하고 만다. 새로운 기술로 빠르게 바뀌는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삼성·LG전자와 같은 한국 기업에 이어 지금은 중국 가전업체에도 밀리는 상황이다.
대표적으로 브라운관 TV 시대의 리더십을 LCD와 OLED 등 패널 TV 시대로 이어가는 데 실패했다. 특히 삼성전자와 합작으로 2004년 S-LCD라는 LCD 패널 회사를 신설했지만 2011년 이를 청산했다. LCD 패널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적자가 누적된 가운데 원재료 값은 계속해서 올라 채산성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2011년 3월 11일 터진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소니의 현금 사정도 좋지 않았다. 결국 TV 사업에서의 철수를 각오하면서 패널 사업 합작 관계를 청산할 수밖에 없게 됐고, 이것이 소니 TV 몰락의 시작이 됐다.
여기에 워크맨으로 대표됐던 음악 사업도 애플이 아이팟·아이튠즈와 같은 에코 시스템을 만들고 시장을 장악해가자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영화와 음악 등의 IP를 갖고 있던 소니이지만 내부 ‘사일로(부서 간 이기주의 현상)‘ 문제로 인해 생태계 구축에 실패한 것이다.
하드웨어 명가의 이미지가 사라진 소니이지만 지난 8월 7일 도쿄 본사에서 진행한 실적발표회에서 2025 회계연도(2025년 4월~2026년 3월)의 연결 영업이익이 전년보다 4% 증가한 1조3300억엔(약 12조 5000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실적 발표 직후 소니그룹 주가는 11% 이상 급등했고 도쿄 증시 시가총액 3위 위치를 탄탄히 유지했다.
소니의 실적을 견인한 것은 다름 아닌 콘텐츠였다. 2012년 소니의 방향타를 잡은 히라이 가즈오 사장은 “소비자에게 기계가 아닌 경험을 선사하자”며 콘텐츠로의 과감한 구조조정에 나섰다.
2019년부터 소니는 콘텐츠와 지식재산권(IP)에 대해 적극 투자했다. 최근까지 누적 투자액은 1조 9000억엔(약 17조 9000억원)에 달한다. 특히 소니가 주목하는 것은 IP다. 하나의 IP를 통해 애니메이션과 영화, 음악, 게임, 상품 등 다양한 분야로 수익 기회를 넓히는 것이다.
이의 하나로 소니는 최근 반다이 남코홀딩스 지분 2.5%를 680억엔(약 6400억원)에 취득하기도 했다. 반다이남코가 가진 최대 IP는 로봇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인 ‘기동전사 건담’이다.
지난해에는 일본 종합콘텐츠 기업인 가도카와 지분을 총 10%까지 끌어올렸다. 가도카와는 2022년 글로벌 시상식을 휩쓴 게임인 ‘엘든 링’ 개발사 프롬 소프트웨어, 일본 최대 동영상 플랫폼 ‘니코니코 동화’ 등을 보유한 곳이다. 다양한 출판만화 IP가 풍부한 것도 강점이다.
이에 앞서 소니는 미국 애니메이션 플랫폼 ‘크런치롤’을 인수하는 등 플랫폼 강화에도 나서고 있다. 아무리 좋은 콘텐츠를 갖고 있어도 이를 보여줄 수 있는 플랫폼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회사 인수 후 소니는 북미 애니 시장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또 일본 애니메이션이 북미 시장에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구조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