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석유화학업계가 생존을 위한 제살깎기에 돌입했지만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다.
정부와 석유화학업계는 지난 8월 20일, 연말까지 사업 재편 자구계획안을 제출하기로 합의했다. 정부는 구체적으로 국내 전체 NCC 용량 1470만t 중 18~25%에 해당하는 270만~370만t을 기업들이 자율 감축하라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하지만 정작 기업들의 자구 계획안 제출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각사의 이익과 지분 등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자구계획안 수립이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연말까지 자구계획안 제출이 쉽지 않을 것이란 신중론 가운데 만약 제출이 되더라도 이러한 계획안들이 실천되는 데는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란 관측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자구안 발표 후 석유화학 기업들은 자구계획안을 위해 한 달 넘게 나프타분해시설(NCC)의 수직 계열화, 수평적 통폐합 등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큰 진척은 없는 상태다.
석유화학 업계에서는 석유화학 업체가 보유한 NCC 설비를 정유사에 넘기고 석유화학 업체는 2차 제품을 생산하는 구조의 ‘수직 계열화’ 통합을 목표로 여러 구조조정안을 살펴보고 있다. 석유화학 및 정유업계에 따르면 여수, 대산, 울산 등 국내 주요 석유화학 산업단지별 나프타분해시설(NCC) 구조조정에 대한 논의가 최근 정유사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특히 원가 절감과 생산 효율화 측면에서 원유 등을 수입해 정제하는 정유사와 이를 바탕으로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석유화학사 간 수직통합이 유력한 방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발 저가 범용 제품의 과잉 공급으로 인한 판가 하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략적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석화사가 원유를 다루는 정유사와 손을 잡으면 원재료인 나프타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고, 설비 합리화를 통해 NCC 생산능력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구조조정 논의 초기부터 이 같은 수직 계열화가 핵심 방안으로 거론중이다.
실제 여수와 대산, 울산 등 국내 3대 석유화학 산업단지에서는 이 같은 논의가 현재 진행되고 있다. 연간 626만t의 에틸렌을 생산하며 가장 파이가 큰 여수에서는 GS칼텍스를 중심으로 LG화학, 롯데케미칼, 여천NCC 등 석유화학업체 간 합종연횡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석유화학 위기감이 본격화한 지난해 부터 석유화학사 간 통합 생산 아이디어가 나온 바 있지만, 최근엔 정유사인 GS칼텍스를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 시나리오가 제기되고 있다.
국내 주요 석유화학사인 LG화학 역시 GS칼텍스에 수직통합 구조조정 제안을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GS칼텍스는 신중하게 현재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판단하겠다는 입장이다. 최근 대주주인 한화·DL 간 갈등을 드러낸 여천NCC 역시 구조조정 방안을 놓고 내부적으로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석유화학업계 한 관계자는 “물밑에서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각사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다 보니 결정된 사항은 없다”고 전했다.
에틸렌 연산 477만t 규모의 대산 단지 역시 본사를 두고 있는 HD현대오일뱅크의 역할론이 대두되고 있다.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이 합작해 만든 석유화학 업체 HD현대케미칼을 두고 지분 매각 및 구조조정 논의가 물밑에서 진행 중이다. 다만 서로 의견 차로 아직까지 뾰족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3대 석유화학 단지 중 에틸렌 생산량이 가장 적은 울산에는 SK에너지, 에쓰오일 등 2개 정유사가 있다. 울산은 NCC 설비를 갖고 있는 SK지오센트릭이 SK에너지와 수직계열화돼 있는 만큼 다른 석유화학업체인 대한유화와의 구조조정 논의에서 타 산업단지와는 다른 상황이다.
한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일부 논의는 회사 입장에서 이익이 되지 않아 정말 합의가 이뤄질지 의문이 든다”며 “2~3개 업체 수준이 아니라 10개 업체가 각사에 이익이 되는 구조조정안을 짜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한 치 앞이 급한 석유화학사와 달리 정유사 입장에선 NCC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는 상황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구애를 보내는 석유화학사와 달리 정유사가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무리한 수직계열화 시도가 오히려 공멸의 길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정유사 역시 올해 상반기 부진한 실적으로 비상경영체제를 가동하고 있는 만큼 자칫 석유화학 업계를 살리려다 정유 업체들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구조조정 묘수로 주목받은 정유사·석유화학사 간 수직계열화 구조조정이 이뤄지려면 양측이 윈윈할 수 있는 인센티브 제공 등 유인책이 필요하다는 전문가 의견도 나온다.
이에 무리한 수직계열화 구조조정 대신 비슷한 사업을 하고 있는 석화사 간 물리적 통합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국내 2, 3위 에틸렌 생산 업체인 롯데케미칼과 여천NCC의 통합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여수에서 롯데케미칼은 연간 123만t, 여천NCC는 연간 228만t의 에틸렌을 생산하고 있는 만큼 통합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지분을 반씩 보유한 여천NCC의 지배 구조가 논의에 걸림될이 될 수 있다. 최근 한화와 DL 그룹은 여천NCC에 대한 자금 지원을 두고 공개적으로 갈등을 빚은 바 있다.
또 업체마다 사업 구조나 재정 상황에 따라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다른 데다, 외국계 또는 합작사들은 해외 본사의 전략 결정이 중요한 탓에 협상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에 따라 정부가 기한으로 정한 연말까지 자구계획안을 제출하는 기업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 설비 통폐합 및 감축도 최소 1년 이상 더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정부가 추가 지원책을 내놔야 지지부진한 논의가 한층 빨라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업계는 자산 통합 과정에서의 세제 부담 경감이나, 공정거래법상 기업결합심사의 한시적 완화 등을 요청하고 있다. 다만, 정부는 선(先)자구노력, 후(後)지원을 원칙으로 업계의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무리하고 서두르는 구조조정은 후유증이 클 수 있고, 수직통합도 시너지가 생각보다 작을 수 있다”며 “석유화학 기업별 설비·기술 등이 다른 만큼 강제로 합쳤다가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구조조정 인센티브를 적극 제안하고 이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 논의가 공전하는 가운데 비슷한 상황을 맞이한 외국 역시 문제 해결을 위해 분주하다. 외신 및 관련 업계에 따르면 중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만성적 석유화학 과잉 설비를 줄이기 위한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 글로벌 침체의 영향을 중국 기업들도 피하지 못하는 모양새다. 구조조정 설비 기준으로는 ‘20년 이상-30만t 미만’의 중소형 석유화학 설비가 정리 대상이다. 만약 이를 적용할 경우 감축될 에틸렌 생산량은 연 742만~1133만t 수준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말 기준 중국 전체 NCC 설비의 14~20% 수준이다.
일본의 구조조정 역시 지속되고 있다. 중국산 화학 제품의 저가 공세로 국내 화학 업계가 어려움에 부닥친 가운데 일본은 대형 화학사 중심으로 사업 재편에 나섰다. 플라스틱 소재의 일종인 범용 수지 사업에서 빅3 화학 업체가 관련 사업을 합치기로 한 것이다.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미쓰이화학, 이데미쓰코산, 스미토모 화학 등 3개 사가 범용 수지 사업의 통합에 기본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통합 후 생산 능력은 일본 전체의 30%가량을 차지한다. 매출액 합산은 2024회계연도 기준으로 3873억엔(약 3조 6500억원)에 이른다.
이 같은 흐름은 유럽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iM증권에 따르면 최근 발표된 유럽 내 화학 설비 폐쇄 계획은 에틸렌 기준 연간 500만t 규모에 달한다. 엑손모빌은 영국·벨기에 설비 매각을 위해 자문위원을 선임했고, 리온델 바젤은 프랑스·영국·독일·스페인 등 총 4곳의 설비를 매각하기로 했다. 다우 역시 2027년까지 독일·영국 내 일부 자산을 단계적으로 폐쇄할 계획을 밝힌 바 있다. 한국·중국·일본·유럽에서 진행 중인 구조조정 계획을 합산하면, 연간 약 2000만t 수준의 에틸렌 생산 능력이 줄어들 전망이다. 이는 글로벌 전체 생산량의 약 10%에 해당한다. 에틸렌 공급 축소는 석유화학 제품 가격 반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며, 업황 ‘바닥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에틸렌 등 업스트림 구조조정은 향후 석유화학 산업의 무게중심을 스페셜티 중심의 다운스트림으로 더욱 빠르게 이동시키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구조조정을 통해 NCC 가동은 점차 범용 제품이 아닌 스페셜티 대응 수준으로 맞춰질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재원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LG화학은 최근 수처리 필터 사업과 에스테틱 등 비주력 사업을 매각했고, 자회사 LG에너지솔루션 지분(82%)을 활용해 수조 원대 자금 조달 방안을 꾸준히 검토 중이다. 롯데케미칼 역시 파키스탄 법인 지분과 수처리 분리막 생산공장을 매각하며 재무구조 개선에 나섰다. 업계 관계자는 “구조조정의 종착점은 결국 스페셜티 강화로 귀결될 것”이라며 “스페셜티에 대한 선택과 집중, 그리고 속도감이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