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을 논하려면 테더(USDT)를 빼놓을 수 없다. 테더가 최초의 스테이블코인은 아니지만 사실상 수요를 만들어낸 최초의 스테이블코인이라고 볼 수 있다. 테더의 인기 배경은 해외 가상자산거래소에서 기축통화라는 점이다. 테더는 2014년 비트파이넥스라는 홍콩계 가상자산거래소에서 코인을 거래하기 위한 기축통화로 시작했다. 테더를 발행하는 테더사와 당대 가장 거대한 거래소인 비트파이넥스는 자매회사다. 당시엔 가상자산 거래를 달러로 직접 할 수 없었다. 원화를 업비트 등에 입금해 바로 가상자산을 거래하는 국내와 달리 해외는 달러로 거래할 수 있게 된 게 최근의 일이다. 달러는 미국 정부의 감시가 심하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 금융당국의 규제 압박을 받던 가상자산거래소가 은행 계좌를 만들 순 없었다. 이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테더였다. 테더로 가상자산을 사면 적어도 달러로 가상자산을 산다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엔 스테이블코인 규제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테더는 가상자산 시장의 성장을 바탕으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올 6월 글로벌 가상자산거래소 현물 시장 점유율은 바이낸스가 40.76%를 차지했다. 바이낸스의 기축통화는 테더다. 점유율 8.52%로 2위를 차지한 HTX와 각 7.65%, 7.46%로 3, 4위를 차지한 바이비트와 비트겟도 테더를 쓴다. 글로벌 가상자산 거래의 64% 이상이 테더로 이뤄지는 셈이다. 그렇기에 테더는 스테이블코인의 현재라고도 볼 수 있다.
오랜기간 테더는 오히려 미국 정부로부터 달러 패권을 방해할 존재로 여겨져 왔다. 특히 테더는 홍콩과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등록된 회사로 미국의 규제를 직접 받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테더는 지난 2017년 한국발 가상자산 거래소 폐쇄 우려로 인한 대폭락, 2022년 루나 사태로 인한 가상자산 폭락 때마다 시장의 뇌관으로 떠올랐다. 테더가 받은 달러 이상으로 테더를 찍어내 유동성을 공급 했다거나, 수탁받은 달러를 부실채권에 투자했다는 우려를 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유명한 루나도 미국의 심기를 거스른 스테이블코인의 대표적인 사례다. 루나는 테더와 조금 다른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다. 루나는 담보도 없이 공짜로 달러를 찍어댔다.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루나는 금세 부실로 무너져 내렸다.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는 바로 이때 시작됐다. 재닛 옐런 당시 미 재무부 장관은 루나 사건 직후 미 의회에 나와 “스테이블코인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뱅크런과 관련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형태의 리스크를 보여주고 있다”며 “포괄적인 체계를 마련해 규제에 공백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테더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테더는 2022년 10월 지급준비금 가운데 기업어음이 차지하던 비중을 전액 미국 국채로 대체했다고 발표한다. 미국은 다음 단계로 스테이블코인이 주로 쓰이는 가상자산거래소를 겨냥했다. 2023년 11월 미 재무부는 자금세탁 혐의로 세계 최대 거래소 바이낸스와 5조 5000억원 규모의 합의를 한다. 바이낸스는 당시부터 3년간 미 재무부 산하의 금융범죄단속 네트워크인 핀센(FinCEN)의 모니터링을 받게 됐다.
모든 게 정리된 이후 미국은 가상자산 패권을 천명한다. 비트코인 현물 ETF가 2024년 1월 드디어 허용되면서다. 그다음 단계가 스테이블코인이다. 트럼프 정부는 스테이블코인을 달러 패권 확장을 위한 수단으로 공언했다. 미국 입장에서 스테이블코인은 매우 효율적인 도구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그 자체가 달러 수요를 늘린다.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사는 코인 1개를 발행하려면 현금 1달러 또는 미국 단기국채를 준비자산으로 예치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 수요가 늘면 달러 수요도 늘어난다는 뜻이다. 특히 예치된 달러로 미 국채를 사들이면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은 수익성까지 높일 수 있어 미 국채 시장 큰손으로 부상했다. 테더, 써클 등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보유한 미 국채는 5월 말 기준 1282억달러로 이미 한국이 보유한 미 국채 규모(1246억달러)를 넘어섰다. 스테이블코인은 실제 미 국채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의 5월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35억 달러 규모의 스테이블코인 유입이 생기면 10일 이내에 3개월 만기 미국 국채 수익률을 2~2.5 베이시스포인트(bp) 하락시켰다.
스테이블코인을 위한 제반 사항이 정리된 미국과 달리 한국은 이제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한국에서 상당한 자본을 빨아들이는 존재다. 올 상반기 국내 5대 원화 거래소(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고팍스)의 스테이블코인(USDT·USDC) 거래대금은 591억 2530만달러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원화로는 약 80조 8192억원에 달하는 수치다.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하면 188.3% 급증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또한 국내에서 해외로 전송된 가상자산 중 절반은 스테이블코인으로 나타났다. 이렇다 보니 스테이블코인은 국내 정부에서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스테이블코인이 무엇이냐다. 예컨대 상품권은 현금과 유사한 구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한은이 관리하지 않는다. 화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1개당 1달러로 고정되어 있기에 사용자들이 화폐와 동일하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비트코인을 화폐로 인정하지 않던 한국은행이 스테이블코인에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다. 유상대 한국은행 부총재는 지난 6월 기자간담회에서 “스테이블코인의 화폐성(Moneyness)이 작지 않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한은은 기존 금융시스템을 그대로 전산화한 형태를 고집하고 있다. 화폐 발행권과 최종 청산소로서의 역할을 중앙은행이 여전히 쥐고 있는 형태다.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와 예금(CD)토큰을 한은에서 지속 주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기존 화폐의 ‘2층 시스템’을 본 떠 만들어진 게 CBDC와 CD토큰 구조다. 오래전 중앙은행이 없던 시절에는 시중은행이 어음을 발행하면 이를 통해 결제를 하고, 이후에 은행들이 모여 청산하는 과정을 거쳤다. 지금은 청산소 역할을 중앙은행이 한다. 이 같은 구조에 블록체인을 활용할 경우 기존 발행어음(예금)을 CD토큰이 대체하고, 이를 청산하는 과정은 CBDC를 주고받아 해결한다. CD토큰을 통한 결제는 은행끼리 중앙은행이 발행해 담보가 확실한 CBDC만 주고 받으면 최종 청산이 된다. 한은은 2층 구조를 모두 블록체인화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한은과 시중은행 간 거래라도 블록체인화하길 원한다. 이는 기존의 중앙은행의 역할을 유지하고 싶다는 얘기다.
한은이 이 같은 구조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로 ‘코인런’을 얘기한다. 스테이블코인의 가치 안정성·준비자산에 관한 신뢰가 훼손될 경우 디패깅이 발생하고 단기자금시장 충격, 은행 유동성 리스크 등을 통해 금융시스템 리스크로 확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화정책이 불투명해지는 것도 문제다. 보통 화폐를 발행하면 내수시장에서 소비를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하는데,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가상자산 시장을 통해 해외로 빠지거나 사실상 온라인 카지노와 비슷한 가상자산 거래소 등으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또한 스테이블코인에 속도를 내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시대에 가장 큰 위기를 맞게 된 건 은행이기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자는 사실상 은행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내로우뱅크’가 된다. 내로우뱅크는 제한된 은행업을 하는 은행을 뜻한다. 스테이블코인들은 예금을 받는 역할의 한정된 은행이 되는 셈이다. 게다가 일부 스테이블코인은 이자를 지급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대출을 통한 신용창출 기능이 없는 내로우뱅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이자율에 따라 기존 은행의 수요를 상당 부분 빼앗아갈 수도 있다. 이미 스테이블코인은 가상자산거래소에 예치만 해도 5~10% 이상의 연이자를 준다. 이는 향후 스테이블코인이 확장될 때 은행에 실존적인 위기가 될 수 있다. 특히 신용이 낮은 제2금융권 은행의 경우 스테이블코인이 허용되면 빠르게 자금 이탈이 발생해 ‘뱅크런’이 나타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부상하면서 ‘자유 은행 시대’도 다시 언급된다. 1829년 미국 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앤드루 잭슨은 준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하던 제2미국은행을 폐쇄했다. 주 정부들은 은행 인가 기준을 완화해 은행 설립을 자유화했고 은행이 자체적으로 화폐(은행권)를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에 1860년에 이르러서는 자체 화폐를 발행하는 은행의 수가 무려 8000개에 달했다. 자격 미달인 은행들이 우후죽순 설립되고 수천 가지의 민간 화폐가 유통됨에 따라 뱅크런과 은행 파산 등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결국 미국 정부는 은행 인가 기준을 강화하고 민간은행의 자체적인 화폐 발행을 금지하게 되면서 자유은행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후 정부의 인가를 받은 은행들이 단일 화폐를 발행하는 연방인가 은행제도를 거쳐 1913년 중앙은행인 연준이 설립됐다.
문제는 중앙은행, 시중은행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면 효과가 있냐는 것이다. 한국은행의 원화 스테이블코인(또는 CBDC) 대응 전략에는 3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첫째, 폐쇄된 프라이빗 블록체인까지 만들어 직접 발행. 둘째, 이더리움이나 트론같은 퍼블릭 블록체인에 발행. 셋째, 원화스테이블코인 전면 금지 등이다. 문제는 3가지 모두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침투를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첫째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퍼블릭은 중앙화한 주체의 허가를 필요로 하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탈중앙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프라이빗 체인은 중앙화된 주체가 체인을 운영하고, 운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 주체의 허가를 받는 방식을 뜻한다. 한은이 구축 중인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가 중앙은행이 발행 및 관리하는 것으로 허가받은 이용자만 참여하는 프라이빗 블록체인에 속한다. 프라이빗 블록체인의 경우 활용도가 극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글로벌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의 가장 큰 과제는 다른 블록체인과의 상호운용성이다. 예컨대 이더리움에서 발행한 스테이블코인과 트론에서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을 같이 오가며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기술적으로 여전히 매우 어렵다. 기술적 능력이 부족한 한은이나 은행들이 프라이빗 블록체인을 쓰면서 이런 한계까지 극복하는 건 매우 많은 시간과 투자가 필요할 것이다. 만약 상호운용성을 고민하지 않고 폐쇄된 채로 둔다면 그냥 지금의 화폐 구조를 그대로 블록체인에 올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비자단에서의 결제 단계 간소화 등의 스테이블코인의 이점은 전혀 없다.
둘째로 퍼블릭체인에 발행하는 경우를 고민해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테더나 USDC가 이런 경우다. 이들은 자체 블록체인을 개발하지 않고, 일부 블록체인에 ‘발행자’로서만 존재하는 형태로 사업을 한다. 문제는 이 경우 관리 주체의 결정에 따라 체인의 운영 원칙이나 방향이 바뀔 수 있다는 리스크가 있다. 또한 퍼블릭체인이 해킹을 당하거나 하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가 그대로 1금융권이나 중앙은행에 전가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런 경우에도 체인에 대한 운영 권한이 없어 상황을 주도적으로 제어할 수조차도 없다.
셋째는 원화스테이블코인의 전면 차단이다.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블록체인은 탈국경성을 가진다. 신원인증(KYC)도 필요 없다. 그냥 현금을 쓰는 것과 같다. 해외 가상자산 거래소를 이용해서 테더를 사고 이를 토대로 현실에서 물건을 사는 건 구매자와 판매자가 테더를 주고 받기로 약속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미국이 테더와 같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를 제어할 수 있었던 건 미국 본토 내의 금융시스템에 들어오는 걸 근거로 규제 준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규제와 상관없이 발행되는 달러 스테이블코인도 여전히 매우 많다. 테더는 미국 시장에서 사업하고 싶기 때문에 규제를 준수하는 것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누구나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국외에서 발행할 수 있다. 다만 아무도 당장 쓰지 않으니 발행 수요가 없을 뿐이다.
블록체인의 가장 큰 특징은 탈국경성이다. 블록체인은 국경을 무너뜨린다. 테더가 정확히 달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사실상 달러처럼 사용된다는 걸 감안한다면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달러를 쉽게 가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상자산거래소에서 구매하면 끝이다. 달러를 쓰는 것도 그렇다. 해외에 가서 테더로 결제하는 건 점점 쉬운 일이 되고 있다. 카카오택시와 배달의민족, 삼성페이를 합친 것과 비슷한 동남아의 슈퍼앱 그랩에선 스테이블코인 결제가 가능하다. 한국인도 앱을 깔고 스테이블코인을 전송하면 바로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탈국경성을 가진 달러의 출현이 통화 주권의 위협이라는 말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달러를 쓰는 시대가 온다면 원화의 설 자리는 없다. 그동안은 한국에서 금융 서비스를 누리기에 달러보다 원화가 훨씬 편했는데 그 문턱이 무너진다는 의미다. 이 같은 이유에서 올 들어 지속적으로 필요성이 제기되는 게 ‘원화 스테이블코인’이다. 지난 3월 해시드오픈리서치(HOR)가 발간한 ‘원화 스테이블코인 필요성과 법제화 제안’이란 제목의 보고서가 대표적이다. HOR은 추후 가상자산과 실물 경제의 경계가 흐려지는 임계점에 도달할 경우 원화의 사용성과 통제력 약화는 불가피해질 것이라 진단했다. 현재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개인 스마트컨트랙트와 연동된 비자(Visa)나 마스터카드(Mastercard), 혹은 페이팔(Paypal), 스트라이프(Stripe), 쇼피파이(Shopify) 등의 온라인 결제 솔루션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으로 직접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향후 우리나라도 이 같은 결제 솔루션이 보편화되면 원화 자산이 부재한 상황에서 현재와 같이 달러화 스테이블코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HOR은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핀테크나 결제, 자산관리 등에 USDT 등의 달러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연동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어 한국 디지털 자산 시장 전반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재명 정부의 인수위 성격을 갖는 국정기획위원회의 자문위원인 강형구 한양대 경영대 교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삼성전자가 스테이블코인을 내부 송금에 활용하면 연간 최소 4840만달러(약 668억원)에서 최대 1억 390만달러(약 1434억원)를 절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삼성전자와 같은 다국적 기업이 내부에서 자금을 이체할 때 본사와 해외 자회사 또는 해외법인 간에 외화 송금이 이뤄진다. 이때 달러 등 외화를 매수하고 매도할 때 환전 비용(FX스프레드)과 중개 은행 수수료 등 여러 간접 비용이 발생한다.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 FX스프레드와 송금 수수료 등의 부담이 사실상 사라져 연간 최대 1억달러 이상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최근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