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 그리고 히데코.’ 두 인물의 이름을 기억한다면 아마도 박찬욱 감독의 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화 <아가씨> 주연을 맡은 배우 김민희·김태리의 극중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아가씨>는 사라 워터스의 장편소설 <핑거스미스>가 원작입니다. <핑거스미스>는 한국에도 출간된 소설인데 2002년 부커상 후보에도 오른 유명 작품입니다. 원작자 사라 워터스가 영화를 세 번이나 봤다고 말했을 만큼 <아가씨>는 호평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400만 명 넘는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아 <아가씨>를 관람했습니다. 인간의 거짓말과 속임수, 그리고 속고 속이는 ‘덫’에 대한 서사를 담은 영화 <아가씨>와 원작 <핑거스미스>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핑거스미스>는 700쪽이 넘는 소설이지만 한 번 펼치면 놓기가 싫어질 정도로 <아가씨>보다 더 흥미로운 걸작입니다.
주요 인물의 이름부터 복습할까요. <아가씨>는 숙희(김태리)와 히데코(김민희)가 중심인물이고, 후지와라 백작(하정우)과 코우즈키(조진웅)가 등장합니다. 코우즈키의 저택에서 집사 역할을 하는 사사키 부인(김해숙), 또 숙희가 히데코에게 오기 전 성장했던 보영당의 주인인 복순(이용녀)의 얼굴도 기억나실 겁니다. <아가씨>는 20세기 초 일본령 조선이 배경이지만, <핑거스미스>의 배경은 19세기 영국입니다. 소설 속 중심인물은 수전(숙희)과 모드(히데코), 젠틀먼(후지와라 백작)과 크리스토퍼(코우즈키), 그리고 석스비 부인(복순)입니다.
소설의 인물의 이름을 기준으로 줄거리를 기억해 볼까요. 수전은 장물아비가 본업인 전문 범죄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석스비 부인이 수전을 소매치기로 키워냈습니다. 석스비 부인의 지인인 사기꾼 젠틀먼은 수전의 도움을 받아 귀족집안의 젊은 여성 모드와 혼인한 뒤, 그 직후 모드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모드가 상속받은 유산 전액을 가로채려 합니다. 수전은 젠틀먼에게 돈을 받기로 약속하고 저 위험한 장난에 합류합니다.
하지만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건 모드가 아니라 수전이었습니다. ‘사실 수전은 수전이 아니라 모드라는 이름의 귀족인데 자꾸만 자신을 하녀 수전으로 생각한다’며 정신병원에 가두고는, 자신을 학대하는 삼촌 크리스토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모드의 치밀한 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수전과 모드가 서로에게 매료되면서 처음의 계획이 무너지고, 둘은 젠틀먼을 속여 둘만의 길을 가기로 합니다.
여기까지는 소설 <핑거스미스>와 영화 <아가씨>의 설정이 동일합니다. 하지만 원작소설의 각색 과정에서 <핑거스미스>에 깃든 상당량의 은유와 상징이 사라졌습니다. 우선 <핑거스미스>의 제목에 담긴 의미부터 살펴볼까요. 핑거스미스(fingersmith)란 소매치기나 도둑을 뜻하는 은어입니다. 수전(숙희)의 본업이 핑거스미스이지요. 수전이 모드(히데코)를 만나게 된 이유도 그녀가 속임수로 사기를 치는 핑거스미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숙맥인 모드의 삶을 훔치고 돈을 가로채 사욕을 채우려 합니다. 수전처럼 젠틀먼(후지와라 백작)도 핑거스미스입니다. 그런데 또 수전을 정신병원에 가둔 건 정작 모드와 젠틀먼이었으니, 모드 역시 핑거스미스인 셈입니다.
그런데 하인들의 도둑질을 당하는 피해자인, 모드의 삼촌 크리스토퍼는 아예 조카의 삶 전체를 훔친 최악의 악한입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갖진 조카 모드가 음란서적을 낭독하도록 훈련시킨 성도착증 환자이니까요. 심지어 크리스토퍼는 조카에게 물려줘야 할 재산을 모두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버립니다. 모드는 소리칩니다. “삼촌(크리스토퍼)에게는 오직 자기 책이 전부야! 삼촌은 나를 책처럼 만들어버렸어. 누구도 고르거나 집거나 좋아해선 안 되는 책이 되어버렸어. 나는 어두침침한 이곳에 영원히 박혀 있을 운명이라고!”(162쪽) 이 저택에선 주인인 크리스토퍼부터 말단 하급들까지 전부 도둑입니다. 제목 ‘핑거스미스’는 그 점을 은유합니다.
<핑거스미스>에는 정말 중요한 ‘속임수’ 하나가 숨겨져 있습니다.
<아가씨>에서 숙희와 히데코의 신분은 고정된 상태입니다. 히데코는 귀족이고, 숙희는 최하층민 소매치기이지요. 그런데 <핑거스미스>에는 <아가씨>엔 없는 충격적인 반전이 숨겨져 있습니다. 결론부터 알려드릴까요. 모드의 자리는 원래 수전의 것이었고, 수전의 자리가 원래 모드의 것이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 한 귀족집안의 숙녀가 17년 전 석스비 부인의 집을 다급히 찾아왔습니다. 숙녀는 아버지와 오빠에게 아기를 빼앗길 상황이 되자 석스비 부인에게 아기가 평범하게 자라게 해달라고 부탁한 뒤 사망합니다. 숙녀는 석스비 부인에게 이러한 내용이 담긴 일종의 계약서를 받아두었습니다. 석스비 부인은 이 아기에게 상속될 유산을 훗날 차지하기 위해 사기극을 설계합니다. 부잣집 아기를 석스비 부인 자신이 정성껏 키우고(훗날의 수전), 다른 아기를 귀족 집안에 대신 보낸 것이었습니다(훗날의 모드). 석스비 부인은 숙녀가 건네준 종이를 평생 품속에 넣고 수전과 모드가 어른이 돼 결혼할 나이가 되기만을 기다렸으며(유산이 상속되므로), 이러한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젠틀먼이 석스비 부인과 함께 사기극에 동참했습니다. 만약 수전이 귀족가에 갔다면 변태적인 성욕을 가진 삼촌 크리스토퍼에게 음란서적을 낭독하는 음울한 삶을 살아야 했을 텐데, 그걸 막아준 ‘은인’입니다. 따라서 수전과 모드는 기억하지 못하는 출생의 비밀조차 석스비 부인의 속임수였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서로를 속이려 들고, 또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마저 속는 이중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목 ‘핑거스미스’는 모두가 모두를 속이는 세상, 모두가 모두에게 속는 세상을 압축하는 은유적인 단어가 됩니다. 타자의 것, 나아가 타자 그 자체를 훔치려 드는 세상을 이 소설은 포착하고 있습니다. 속고 속이는 과정에서 세상은 죄책감을 느끼는 자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자로 양분되는데, 소설의 경우 주인공 수전과 모드만이 죄책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평범한 선인으로 기억되게 됩니다. 그 동력은 사랑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 <아가씨>는 외설적인 장면 때문에 ‘야한 영화’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요소 때문에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가려진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영화 속 코우즈키(크리스토퍼)가 말하는 ‘무지(無知) 경계선(소설에선 무지의 한계선)’이란 단어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소설에서, 크리스토퍼는 서재에 들어오려는 모드에게 “무지의 경계선을 넘어오지 말라”고 다그칩니다. “다시 한 번만 더 그러면, 피가 날 때까지 눈에 채찍질을 하겠다. 그 손이 가리키는 곳이 이곳에서 무지의 한계선이다. 때가 되면 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명령에 따라서이고, 네가 준비가 되었을 때다. 알겠느냐?”(242~243쪽)
크리스토퍼는 이 저택에서 ‘금기’를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 절대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크리스토퍼를 성서적으로 해석하면 그는 가장 강력한 권좌에 오른 절대자, 즉 신이 됩니다. ‘무지의 경계선’을 넘으려는 수전과 모드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를 떠올리게 하지요. 그들은 지(知)와 무지의 경계를 넘어 금단의 과실인 선악과를 취하려 합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고, 다시 아담이 하와의 유혹에 넘어가면서 자신들의 정체성(벌거벗은 자)을 획득하는 것처럼, 영화 속 숙희와 히데코, 소설 속 수전과 모드는 ‘무지의 경계선’이라는 금기를 깨버린 뒤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알게 되지요. 소설 속 ‘무지의 경계선’이 영화에선 똬리를 튼 뱀 모양의 조각상이란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소설에서 크리스토퍼의 책들은 인간의 심연에서 꿈틀거리는 쾌락과 욕망의 다른 형태이며, 그 쾌락과 욕망을 절대자인 크리스토퍼가 부도덕하게 목록화한다는 점에서 그는 선신이 아니라 악신입니다. 수전과 모드가, 또 숙희와 히데코가 타락해버린 절대자의 동산(크리스토퍼의 저택)을 떠나 다른 세계로 향하는 결말은, 따라서 그들에게 자기만의 낙원을 찾아 떠나는 여정, 즉 출애굽과도 유관합니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