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질서가 요동치고 있다. 그 중심에 스테이블코인이 있다. 단순한 암호화폐가 아니다. 국가 간 패권 경쟁의 도구이자, 화폐의 근본을 흔드는 게임체인저다. 인공지능(AI), 디지털 전환, 지정학적 재편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화폐 전쟁의 양상도 바뀌고 있다. 전통적인 ‘국가 대 국가’ 구도는 흐려진다. 이젠 ‘중앙은행 대 민간기업’ ‘규제 대 기술’이라는 새로운 전선이 펼쳐지고 있다.
화폐를 단지 거래 수단으로만 보는 시대는 끝났다. 디지털화폐는 곧 기술 주권이자 데이터 주권, 경제 주권이다. 주권 경쟁의 새로운 전장이 열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중국 경제평론가 쑹홍빙이 쓴 ‘화폐전쟁’은 이런 시대를 예고했다. 그는 금융위기를 단순한 경제 충격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 간 통화 패권 다툼의 서막으로 해석했다. 그 시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휘청이던 미국은 중국에 국채 매입을 애걸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오바마 대통령까지 직접 베이징을 찾았다. 중국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위안화 국제화에 나선다. 위안화 스와프 확대, 역내 결제 시스템 정비, 특별인출권(SDR) 편입까지.
이제 전장은 디지털화폐로 옮겨 갔다. 스테이블코인은 미국과 중국 두 나라가 다시 정면충돌하는 전장의 무기가 됐다. 미국은 민간기업에 조건부 면허를 주고, 공공 결제 시스템과 연결해 실전 운영에 나섰다. 페이팔, 써클 등 민간 기업이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인 것. 이를 ‘통제 가능한 민간 화폐’로 설정하고 글로벌금융의 새 질서를 설계 중이다.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e-CNY)로 아예 국가 차원의 공공화폐 실험에 나섰다. ‘중국판 스위프트’ 구축과 디지털 무역 결제 플랫폼 개발도 병행한다. 디지털화폐가 무역, 외환, 투자 흐름까지 좌우하는 시대가 성큼 다가온 셈이다. 일본 마저도 스테이블코인을 법제화해 은행·신탁사·전자결제업체가 참여할 수 있게 했다.
한국은 여전히 구경꾼이다. 위기의 본질보다 ‘위험’을 더 두려워한다. 민간 스테이블코인 실험은 금융당국과 은행권 반대로 번번이 좌절이다. 한국은행은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를 개발 중이라지만 테스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폐쇄적 실험, 민간, 기술 생태계와의 단절. 기술 검증이란 이름 아래 혁신은 봉쇄되고 있다. 한국은행이 마지막 보루로 모든 것을 틀어쥐려는 모양새다. 스스로 혁신의 주체가 아닌 심판자가 될 셈이다. 은행권도 다르지 않다. 기존 수익모델 보호에만 몰두하면서 플랫폼 기술로 확장하려는 민간의 시도를 외면한다. 이렇게 규제와 관료주의, 개별적 이해에 갇혀서는 희망이 없다. 글로벌 흐름을 따라가지 못할 터다. 디지털 원화는 단순한 결제수단이 아니다. 무역, 관광, 플랫폼 결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원화의 영향력을 확장할 전략적 도구이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를 놓친다. 중앙은행과 은행권에만 맡기면 늦는다. 규제기관은 ‘무엇을 막을지’가 아니라 ‘무엇을 열어줄지’를 고민해야 한다.
기술 실험은 생존 전략이다. 정부는 금융산업이 아닌 경제 전체의 디지털 재설계에 나서야 한다. 지금은 금융질서를 지키는 시대가 아니라, 새로 쓰는 시대다. 스테이블코인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가 됐다. 한국은 더 이상 관망자가 되어선 안 된다. 이제는 행동할 때다.
[장종회 월간국장 매경LUXMEN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