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약을 먹지 않으면 일상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대신 이 약을 먹으면 반년 안에 5~10㎏이 늘 수 있어요.”
정신과 진료실에서 흔히 오가는 이야기다. 조현병, 조울증, 우울증 같은 중증 정신질환 환자에게 약물치료는 필수다.
그러나 항정신병제나 항우울제 상당수는 식욕을 자극하거나 대사를 늦춰 체중을 불린다. 실제로 전 세계 정신질환자의 60% 이상이 과체중 혹은 비만이라는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하는데, 이는 일반인보다 2~3배 높은 수치다.
문제는 ‘얼마나 찔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같은 약을 먹어도 누구는 살이 거의 안 찌고, 누구는 순식간에 10㎏이 늘어난다. 원인은 유전, 호르몬, 식습관, 운동량, 스트레스 등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연구는 ‘평균적으로 살이 찐다’는 사실만 알려줬을 뿐, 개개인에게 닥칠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 결과 많은 환자가 약 복용을 중단하거나 망설였고, 이는 치료 실패와 재발로 이어지기도 했다.
중앙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선미 교수와 가정의학과 이혜준 교수 연구팀은 이 난제를 풀기 위해 인공지능(AI)을 불러왔다.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 환자를 대상으로 24주간 정신약물을 투여하며 체중 변화를 추적하고, 일정 수준 이상 체중이 늘면 비만치료제를 추가로 24주간 투여해 효과까지 살핀다.
수집하는 데이터는 무려 수백 가지. 키, 체중, 허리 둘레, 체지방량 같은 기본 신체 계측부터, 혈액검사, 식습관, 운동량, 수면패턴, 심리상태까지 빠짐없이 모은다.
이렇게 축적된 빅데이터를 중앙대 공과대학 AI대학원 김영빈 교수팀의 딥러닝 모델이 학습한다.
목표는 명확하다. 환자마다 어떤 정신약물이 체중을 얼마나 불리는지, 어떤 비만치료제가 효과적인지를 예측해 ‘맞춤 처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진료실에서 환자 정보를 입력하면 AI가 ▲정신약물별 체중 증가 위험 ▲추천할 비만치료제 후보를 한눈에 보여준다. 의사는 처음부터 가장 적합한 조합을 선택해 부작용을 줄이고, 치료를 꾸준히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연구팀은 2026년경 알고리즘의 정확도를 검증하고, 이를 병원 시스템에 탑재해 국내외 의료 현장에 보급할 계획이다. 향후에는 당뇨병 약, 고혈압 약 등 다른 만성질환 약물의 부작용 예측에도 AI를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신약물로 살이 찐 몸을 보며 자존감이 무너지고 우울이 재발하는 악순환은 이제 AI 덕분에 끊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번 연구는 개인별 데이터에 기반해 ‘나만의 약 반응’을 예측한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다. 환자는 막연한 두려움 대신 ‘구체적 숫자’를 보고 안심할 수 있고, 의사는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를 손에 넣는다.
김선미 중앙대병원 교수는 “약 복용으로 생길 체중 변화와 비만치료제 효과까지 예측하면 부작용 때문에 약을 끊는 사례를 줄일 수 있다”며 “결국 정신질환 증상 관리뿐 아니라 비만 합병증, 대사질환, 심혈관질환까지 예방하는 맞춤 치료가 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물론 넘어야 할 과제도 있다. 글로벌 데이터를 확보해 AI의 정확도를 높이고, 의료정보 보안과 알고리즘의 설명 가능성(XAI) 확보 등 윤리적 설계도 필요하다. 연구진은 “설계 단계부터 환자와 보호자가 참여해 투명성을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정신약을 먹으면 살찐다’는 두려움은 이제 AI가 대신 짊어진다. 치료실은 점점 더 ‘맞춤형’이 되고, 환자는 두려움 대신 안심을 선택한다. 부작용 없는 정신건강치료의 새 시대가, 지금 중앙대병원의 AI 연구실에서 시작되고 있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