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잇달아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하면서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삼성SDI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 대기업 계열사들이 잇달아 유상증자를 발표하며 국내 증시의 ‘코리아 디스카운트’ 우려와 기존 투자자들의 주주가치 훼손이 우려된다는 이유다. 유상증자는 회사가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자본을 확충할 수 있는 수단이다. 특히 대규모 설비투자나 인수합병(M&A), 차세대 기술 개발을 추진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자체 자본 확충을 통한 재무 안정성과 전략 실행력을 높일 수 있는 유효한 카드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엇갈린다. 유상증자가 ‘성장의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기존 주주의 지분 희석과 주가 하락이라는 직접적인 리스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이 자주 유상증자에 의존하는 근본적인 이유로는 낙후된 자본시장 구조와 투자자 중심의 경영문화 부재가 꼽힌다. 글로벌 기업들은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 등으로 주주환원정책을 강화하고 있지만, 국내 기업들은 여전히 ‘투자자 희생’을 감수하면서 자본을 조달하는 경향이 강하다. 유상증자 역시 이러한 구조적 문제의 결과물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기업 실적이 부진하거나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달을 경우 기업의 유상증자는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2020년, 두산중공업은 재무구조 악화로 1조 3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진행한 바 있다. 구조조정과 맞물려 있었던 만큼, 시장에서는 ‘생존을 위한 조치’로 평가했다. 결과적으로 주가는 단기 하락세를 보였지만, 재무 안정성 확보 이후 반등에 성공했다. 2021년 대한항공 역시 코로나19로 인한 항공업 위기 상황 극복을 위해 유상증자를 통해 3조 3000억원을 확보하며 아시아나항공 인수자금 마련에 활용했다. 당시 시장은 ‘산업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을 인정하며 점진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2023년 LG에너지솔루션은 기업공개(IPO) 이후 2조원 이상의 유상증자를 단행하며 배터리 설비 확충에 나섰다. 당시 시장은 ‘성장 기업의 투자 확대’라는 긍정적 시그널로 해석하며 단기 주가 조정 이후 상승세로 전환했다.
그러나 최근 대기업들의 잇단 유상증자는 자본시장업계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며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삼성SDI는 지난 3월 차세대 배터리 생산능력 확대를 위한 2조원 규모 유상증자를 발표했다. 주주배정 후 실권주 일반공모 방식으로 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배터리 개발과 생산설비 확충, 헝가리·미국 공장 내 신규 라인 구축,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 수주 대응력 제고를 위한 유상증자였다. 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 우려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캐즘 극복에 앞서 선제적 설비 투자를 확충하고 기술 경쟁력을 확보해두겠단 계산이다. 삼성SDI 측은 “전기차 및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 확대에 따라 글로벌 고객사의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으며, 이를 대응하기 위해 생산능력 확보는 시급한 과제”라고 밝혔다. 특히 전고체 배터리의 경우, 2027년 상용화를 목표로 이미 파일럿 라인 구축이 진행 중이며, 대규모 설비 자금이 필요한 상황이다.
삼성SDI는 이번 유상증자 자금 중 약 9047억원을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만든 미국 합작법인에 투자한다. 삼성SDI는 지난해 8월 GM과 약 35억달러를 투자해 연산 27기가와트시(Gwh) 규모의 공장을 미국 인디애나주 뉴칼라일에 설립하는 계약을 맺은 바 있다. 전기차 배터리 양산 목표 시기는 2027년이다. 연간 약 36만 대, 최대 48만 대 분량의 전기차 배터리를 만들 수 있는 대규모 생산 시설로 거듭날 예정이다. 합작법인에서는 니켈·코발트·알루미늄(NCA) 배터리가 ‘각형’으로 생산되고 대부분 GM의 전기차에 사용된다. 유럽 헝가리 괴드에 위치한 신공장을 확장하는 작업에도 유상증자 자금 6413억원을 투입한다. 헝가리 공장은 약 10Gwh 규모로 독일 자동차 메이커인 BMW와 세계 3위 완성차 그룹인 현대차에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할 생산 기지다. 내년부터 현대차그룹에 배터리를 납품해야 해 투자를 서두를 필요가 있다. 삼성SDI는 유휴부지를 활용해 생산 라인을 증설하고 수요가 늘어난 배터리 양산을 서두른다는 방침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캐즘에 일부에선 배터리 투자계획을 중단하거나 연기하고 있지만 어차피 트럼프 2기에 시작해야 할 사업으로 보고, 삼성이 당초 투자 계획을 그대로 이행하는 듯 하다”라고 밝혔다.
유상증자로 확보할 자금 약 4541억원은 꿈의 배터리이자 업계의 ‘게임 체인저’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설비에 투자할 방침이다. 전고체 배터리는 양극재와 음극재 사이에 이온을 전달하는 전해질을 액체에서 고체로 대체한 차세대 배터리다. 액체 전해질과 분리막을 동시에 이용하는 리튬이온 배터리에 비해 안전성이 높고 부품 수도 줄일 수 있다.
회사는 또한 이번 유상증자가 기업의 장기적 성장성과 수익성 강화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입장이다. 향후 주주가치를 제고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란 의미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유상증자 발표 당일, 삼성SDI의 주가는 7.5% 급락했다. 이는 투자자들이 지분 희석 및 단기적 수익성 악화를 우려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특히 주식시장에서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확대 같은 주주환원책 없이 유상증자부터 단행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삼성SDI가 글로벌배터리 기업임에도 주주 신뢰 확보에 실패한 것 아니냐는 지적으로 이어졌다. 삼성SDI의 유상증자는 국내외 투자자들에게 한국 기업의 자금조달 구조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던진 동시에 유상증자라는 수단에 있어 주주 관점이 배제된 구조에 대한 우려를 낳은 셈이다. 무엇보다 글로벌 배터리 경쟁이 격화되는 시점에서 선제 투자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유상증자라는 수단 선택에 있어서 주주의 관점이 배제된 구조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반복이라는 지적이 지속되는 이유다.
업계 전문가들은 “기업이 유상증자와 함께 명확한 수익성 로드맵과 주주환원 방안을 병행 제시하지 않는 한, 긍정적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연이어 수주 소식으로 업계의 관심이 큰 한화에어로스페이스도 지난 3월 방산사업 확대와 계열사 재편을 위해 3조 6000억원 규모의 자금을 조달한다고 밝혔다. 이는 한국 증시 역사상 최대규모 유상증자액으로 주당 60만 5000원에 595만 500주를 발행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전체 유통주식의 13.05%에 달한다. 문제는 유상증자 발표 직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주가는 13% 넘게 급락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한화그룹 계열사 주가도 동시 하락세를 보였다. 소액주주 중심으로는 한화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밑작업이란 비판이 제기됐다. 이보다 한달여 앞선 2025년 2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다른 한화그룹 계열사인 한화임팩트파트너스와 한화에너지 등에 1조 3000억원을 주고 한화오션 지분 7.3%를 사들인 계약이 결정적이었다. 이는 한화그룹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키우는 데 핵심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논란이 커지자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측은 4월 김동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표이사가 자사주 30억원을 매입하는 등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무리한 유상증자 논란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금융감독원은 삼성SDI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대규모 유상증자 계획에 대해 투자자 보호와 정보 투명성 확보 차원에서 제동을 걸고 나섰다. 금감원은 유상증자 중점 심사 제도를 통해 양사에 유상증자 당위성과 자금 사용계획, 주주 소통 절차 등을 보완하라고 요구했다.
유상증자 중점심사 제도는 2025년 2월 처음 도입된 제도로, 자금조달 과정에서 주주 권익 훼손 우려가 큰 대형 유상증자에 대해 사전 심사와 정정요구를 강화하는 제도다. 금감원은 이 제도의 첫 적용 대상으로 삼성SDI를 지목했다. 금감원은 자금 사용처의 명확성, 주주와의 소통 계획 등을 문제 삼았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더 강한 조치를 받았다. 당초 3조 6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계획했던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금감원의 두 차례에 걸친 정정 요구를 받았다. 금감원은 유상증자 필요성과 자금 사용 계획이 명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후 회사 측은 증자 규모를 약 2조3000억원으로 줄이고 정정 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금감원은 여전히 정보가 부족하다며 추가 정정을 요구한 상태다. 현행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정정 요구를 받은 기업이 3개월 내에 정정 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을 경우, 해당 증권신고서는 철회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에 따라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금감원의 추가 지적 사항을 반영해 신속한 정정을 마무리해야 유상증자 일정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기업의 유상증자가 단순한 자금조달 수단을 넘어, 주주 권익에 직결되는 사안이기 때문에 정보의 투명성과 사전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금감원의 이번 조치는 유상증자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국내 기업 문화에 대한 경고이자, 자본시장 신뢰 회복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 평가된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유상증자를 계획하는 기업들이 금감원의 기준에 맞춰 보다 구체적인 계획과 주주 친화적 보완책을 제시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내의 사정과 달리 미국과 유럽 기업들은 유상증자를 최후의 수단으로 취급하는 경향성이 짙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은 매년 수십조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하며, 성장을 위한 자금은 사채 발행이나 현금흐름으로 충당한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외부 차입보다 기존 주주의 지분을 깎는 유상증자를 선호한다.
이는 투자자들로 하여금 한국 주식에 ‘언제 또 유증할지 모른다’는 위험 부담을 증대시키는 요인이다. 그 결과, 낮은 주가수익비율(PER)과 주가순자산비율(PBR)은 ‘성장성 저평가’가 아니라 ‘경영진에 대한 불신’을 반영하게 된다. 특히 유상증자 발표 이후 주가 하락은 대부분 단기에 그치지 않는다. 수개월간 회복이 지연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이는 장기투자 매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다. 자본업계 관계자는 “자본 확충은 결국 기업의 성장을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며 “그러나 한국 기업들은 자사주 매입은 커녕 배당 확대도 외면한 채 유상증자만 반복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즉 소액주주는 기업의 성장에 동참하는 파트너가 아니라, 언제든 희생 가능한 ‘지갑’으로 취급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구조가 고착화 돼 한국 주식시장에 대한 신뢰가 회복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외국인 투자자는 물론, 국내 장기 투자자 조차도 한국 기업에 대해 ‘반복되는 자본 요구’를 우려한다는 뜻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향후 기업이 주주와의 사전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주주친화정책을 병행하지 않을 때 시장은 즉각적으로 신뢰를 거둔다”며 “’기업 성장 = 주주 이익’이라는 철학이 자리를 잡아야 유상증자도 시장의 환호 속에 진행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