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당장 은퇴해야 한다면?’ 공포감을 느꼈다면 원인은 ‘부족한 노후 준비’일 것이다. 노동인구 부족·자금 고갈 등의 문제로 국민연금 지급 시기는 점차 늦춰질 것으로 예상된다. 은퇴 이후 연금을 받을 때까지 소득이 없는 기간을 의미하는 ‘소득 크레바스’는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이를 헤쳐나갈 대안 중 하나인 퇴직연금의 중요성은 당장 체감이 어렵지만, 은퇴를 앞둔 이들에게는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다.
마주한 현실은 참담한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332조원에 이르지만, 적립금의 수익률은 연금 선진국 대비 매우 떨어진다. 우리나라의 퇴직연금 5년간 평균 수익률은 2.4% 수준으로 미국, 호주, 영국의 7~9%대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원인은 적립금 대부분이 비교적 낮은 금리의 예금 상품에 편중돼 운용한 결과로 꼽힌다.
지난 7월 12일 ‘디폴트옵션(Default Option)’이 전면 시행됐다. 확정기여형 퇴직연금(DC)이나 개인형퇴직연금(IRP) 가입 고객은 근로자 퇴직연금보장법에 따라 반드시 하나의 디폴트옵션 상품에 가입해야 한다. 디폴트옵션 시행 이전 가입자의 퇴직연금 상품 만기 도래 시 만기 전 영업일까지 별도의 의사표시가 없으면 같은 상품으로 자동 재예치가 되었다. 7월 12일 이후 만기가 도래하는 상품은 대기성 계정인 고유계정으로 입금되어 운용된다.
이전과 같이 관성적인 운용을 지속하면 퇴직연금의 운용수익률이 낮아질 수 있는 만큼 별도의 운용을 지시하도록 유도하는 제도가 바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이라 할 수 있다. 이 제도가 도입된 취지는 퇴직연금 수익률이 낮아 노후 소득 보장 효과가 미미했기 때문에 퇴직연금 적립금을 주식, 펀드 등에 투자해 수익률을 높여보자는 것이다.
시작은 나쁘지 않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은 디폴트옵션 상품의 수익률을 공시하고 있다. 올 1분기와 2분기 디폴트옵션 상품의 성적을 살펴보면 296개 승인상품 중 223개가 판매 운용 중이며 상품의 6개월 평균 수익률은 약 5.8%로 퇴직연금 10년 평균 수익률인 1.92%와 비교하면 약 3배에 달한다. 6개월 기준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상품은 ‘KB국민은행 디폴트옵션 고위험 포트폴리오 1’로 무려 14.16%의 수익률을 거두기도 했다.
2023년 6월 말 기준 디폴트옵션 상품 적립금은 총 1조1018억원(DC 3006억원, IRP 8012억원)으로 1조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퇴직연금 가입 근로자가 디폴트옵션을 지정해도 당장 기존 운용 상품이 변경되지는 않는다. 디폴트옵션은 퇴직연금 가입자가 가입한 금융 상품이 만기가 도래했는데도 운용 지시를 하지 않았을 때 비로소 적용된다. 펀드처럼 만기가 없는 실적배당 상품에는 디폴트옵션이 적용되지 않는다. 정기예금, 이율보증보험, ELB 등 만기가 있는 원리금 보장 상품에 디폴트옵션이 적용된다. 실적 배당 상품 중에도 만기가 정해져 있는 자산은 디폴트옵션 적용 대상이다. 따라서 만기가 있는 금융 상품에 가입하고 있다면 만기가 언제 도래하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가입자가 만기 상환 금액에 대해 운용 지시하지 않으면 디폴트옵션이 적용될 때까지 현금성 자산으로 남아 낮은 금리로 운용된다.
기존 상품의 만기가 도래했는데도 가입자가 별도로 운용 지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금이 방치되는 시간은 총 6주다. 상품 만기 도래 후 4주간의 운용 지시가 없으면 금융회사가 디폴트옵션 적용 예정임을 가입자에게 통지하고 그 이후에도 2주 안에 운용 지시가 없으면 디폴트옵션이 적용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가입자가 자신의 연금 운용 방향을 설정했다면 이러한 공백 기간을 최대한 줄이는 게 유리할 수 있다.
디폴트옵션 운용 대상 상품은 투자 위험에 따라 ▲초저위험(원금 보존 중시) ▲저위험(투자 손실 민감) ▲중위험(우수한 장기성과 중시) ▲고위험(높은 수익률 추구 및 장기투자) 등 4가지 그룹으로 나뉜다.
고용노동부와 금감원은 가입자의 합리적인 상품 선택을 돕기 위해 디폴트옵션 상품의 가입 규모, 수익률 등 운용 실적을 공시하고 있으니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본인의 투자성향을 고려해 디폴트옵션을 지정하면 된다.
상품의 만기가 끝난 후 대기 기간에도 가입자는 가입한 금융사의 모바일 앱이나 웹을 통해 언제든지 운용 지시를 할 수 있다. 디폴트옵션 상품에도 먼저 가입이 가능하다. 이때 가입자는 부담금과 만기 상환 금액 중 일부에 대해서만도 운용 지시를 할 수 있다. 이러면 운용 지시하고 남은 금액에만 디폴트옵션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만기 상환 금액 900만원 중에서 200만원에 대해서만 운용 지시했다면 나머지 700만원에 디폴트옵션이 적용된다. 가입자가 희망하면 디폴트옵션 적용 예정인 자금을 추후 운용을 위해 계속해서 현금성 자산으로 남겨둘 수도 있다.
만약 DC/IRP 가입자가 법적 의무인 디폴트옵션 지정을 미룬다고 하여 처벌이나 과태료를 부과받는 것은 아니다.
한편 고객이 거래 금융기관이 제시하는 디폴트옵션 상품의 우수성을 인지하여 직접 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를 ‘옵트인(Opt-in)’이라고 한다. 또한 이미 운용 중인 디폴트옵션 상품을 다른 상품으로 변경할 수도 있다. 디폴트옵션은 어디까지나 가입자가 적립금 운용을 지시하지 않을 때 대비하기 위한 제도이므로 가입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운용 중인 디폴트옵션 상품을 다른 상품으로 바꿀 수 있다. 이렇게 상품을 바꾸는 것을 ‘옵트아웃(Opt-out)’이라 하는데 별도로 의사표시를 할 필요는 없다. 운용 중인 디폴트옵션 상품을 매도하고 다른 상품을 매수하면 된다.
디폴트옵션 상품의 운용과 관련된 정보는 고용노동부와 금감원 홈페이지에서 개별 상품의 적립 금액, 운용 현황, 수익률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수익률은 원리금 보장 상품은 공시 시점에 적용되는 적용 이율로 공시하고, 펀드 상품은 과거 기간 수익률을 공시한다. 펀드로 구성된 포트폴리오는 개별 펀드의 과거 기간 수익률을 가중평균해 공시하고, 원리금 보장 상품과 펀드가 혼합된 포트폴리오는 원리금 보장 상품의 과거 공시 금리를 기준으로 펀드의 과거 기간 수익률과 가중평균해 공시한다. 장기간 운용하는 퇴직연금인 만큼 장기 수익률과 운용보수를 비교해 살펴보는 것이 좋다.
디폴트옵션 관련법에서는 타깃데이트펀드(TDF), 밸런스드펀드(BF), 스테이블밸류펀드(SVF), SOC펀드만 디폴트옵션이 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하지만 스테이블밸류펀드와 SOC펀드는 단독으로 디폴트옵션 상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단독으로 디폴트옵션 상품이 될 수 있는 펀드는 TDF와 밸런스드펀드라고 봐도 무방하다.
먼저 TDF는 ‘Target Date Fund’의 영문 머리글자를 조합해서 만든 말이다. 우리말로 하면 ‘목표시점 펀드’라고 할 수 있다. TDF는 적립금을 다양한 국가와 자산에 분산해서 투자하고, 목표시점에 맞춰 펀드 내 자산 편입 비중을 자동으로 조정해준다. 자산 비중 조절은 미리 정한 경로에 따라 진행된다. 목표시점까지 기간이 많이 남았을 때는 주식과 같이 변동성이 큰 자산의 비중을 높게 유지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그 비중을 낮춰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시간 흐름에 따라 주식 등 위험자산 비중이 차츰 줄어드는 모습이 비행기가 착륙하는 경로를 닮았다고 해서 글라이드패스(Glide Path)라고도 부른다.
TDF를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선택할 때는 반드시 목표시점을 확인해야 한다. TDF 상품 이름에 네 자리 숫자가 들어 있는데, TDF의 목표시점을 나타낸다. 2030, 2040 등이 붙은 상품 이름은 해당 시점 무렵에 은퇴할 예정인 투자자를 위한 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목표시점을 표시하는 네 자리 숫자를 TDF에서는 ‘빈티지(Vintage)’라 부르기도 한다.
다음으로 밸런스드펀드(BF)는 투자위험이 다른 다양한 자산에 분산 투자하고, 금융 시장 상황과 펀드 내 자산가치 변동 등을 고려해 주기적으로 자산 비중을 조절하는 펀드다. TDF와 밸런스드펀드는 모두 주식과 채권 등 다양한 자산에 분산 투자하는 자산배분펀드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밸런스드펀드는 가입자의 투자성향이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시간의 경과와 무관하게 정해진 자산 배분 비중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따라서 밸런스드펀드를 선택할 때는 주식 등 위험자산을 최대 얼마까지 편입할 수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자산 비중을 재조정하는 시기와 방법도 확인해야 한다.
이외에 펀드와 원리금 보장 상품을 혼합한 포트폴리오 형태의 디폴트옵션 상품도 있다. 다양한 포트폴리오 상품 중 구성하는 상품을 살펴야 한다. 디폴트옵션 상품에는 최대 3개까지 상품을 편입할 수 있다. 포트폴리오는 구성 상품에 따라 펀드형, 원리금 보장형, 혼합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단일 상품과 마찬가지로 포트폴리오 상품의 위험 등급도 초저위험, 저위험, 중위험, 고위험의 4단계로 구분한다. 위험 등급은 포트폴리오 내에 포함된 개별 상품의 위험도를 가중평균해서 산출하므로 투자성향에 따라 고를 수 있다.
Q. 디폴트옵션 가입 유형은?
퇴직연금은 기업(사용자)이 적립금을 운용하는 확정급여형(DB), 가입자가 직접 적립금을 운용하는 확정기여형(DC), 개인형퇴직연금(IRP) 총 3종류가 있다. 확정급여형은 디폴트옵션 대상이 아니며 나머지 2가지 유형은 의무다.
Q. DC형 퇴직연금과 IRP의 디폴트옵션 상품을 다르게 선택할 수 있을까?
DC형 퇴직연금 가입자는 연말정산 세액공제 등을 목적으로 IRP에 가입할 수 있다. DC형 퇴직연금과 IRP 계좌 모두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각각 디폴트옵션 상품을 선정해야 한다. 이때 디폴트옵션 상품은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다.
Q. 디폴트옵션 상품을 여러 개 선택할 수 있을까?
가입자는 퇴직연금 사업자가 제시하는 디폴트옵션 상품 중에서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이미 퇴직연금 적립금을 디폴트옵션 상품에 투자하고 있는 경우에는 다른 디폴트옵션 상품에는 적립금을 투자할 수 없다. 하지만 운용 중인 디폴트옵션 상품이 하나일 때 해당 상품을 추가로 매수할 수는 있다.
Q. 이미 디폴트옵션이 적용되고 있는데, 디폴트옵션 상품을 변경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 디폴트옵션이 적용된 이후에도 언제든지 디폴트옵션 상품을 변경할 수 있다. 이 경우 기존에 운용 중이던 디폴트옵션 상품은 그대로 운용되고, 이후 새로이 납부되는 금액부터는 디폴트옵션 절차에 따라 새로 지정한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운용된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