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vs 에도아르도 폰티 `자기 앞의 생` | 인간은 원래 울게 되어 있다는 자명한 진실
김유태 기자
입력 : 2022.10.31 11:02:01
수정 : 2022.10.31 11:02:18
프랑스 소설가 에밀 아자르(Emile Ajar)를 아십니까. 문학이 죽어버렸다는 자조가 어렵지 않게 들려오는 오늘, 저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를 알고 있는 분들이라면 저 이름에서 파생되는 어떤 숙연함을 피하기는 어렵겠지요. 에밀 아자르는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Romain Gary)의 필명입니다. 로맹 가리가 누구인가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으며, UN 파견 외교관을 거쳐 영화감독으로 변신하는 등 격정 넘치는 삶을 살았던 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작가이길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에도아르도 폰티 감독이 넷플릭스를 통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2020년작 영화 <자기 앞의 생>의 동명 원작 소설은 로맹 가리가 필명 에밀 아자르로 발표한 뒤 그에게 두 번째 공쿠르상을 안긴 작품입니다. “나는 마침내 온전히 나를 표현했다”라는 말을 남기며 그가 입에 권총을 물고 사망할 때까지, 로맹 가리가 곧 에밀 아자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명배우 소피아 로렌이 주연한 영화로도 화제를 모은 이 영화를 지금까지 3회 보았고, 오래전 읽었던 에밀 아자르의 작품 <자기 앞의 생>과, 이 책에 함께 수록된 로맹 가리의 회고록인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을 지난 며칠 동안 깊게 읽었습니다. 1975년 소설로 출간된 <자기 앞의 생>은 우리 시대의 넷플릭스에서 어떻게 육화되었을까요.
▶노인과 아이, 초월하는 생
영화와 소설의 줄거리 뼈대는 엇비슷합니다. 소설은 유대인 로자 아줌마와 아랍인 소년 모모의 모성애와 인간애를 다룹니다. 로자 아줌마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매춘으로 밥벌이를 하는 여성들의 아이를 대신 보육하는 노인입니다. 가끔씩 기억이 흐려질 만큼 건강이 악화된 로자는 아이 모모를 맡는 상황에 놓입니다. 너무나도 다른 배경을 가진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눈치싸움. 노인과 아이는 다투며 갈등하지만 결국 로자의 죽음 앞에서 화해하고 이해하기에 이릅니다. 인종, 종교, 나이, 성별 등 무엇 하나 교집합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모든 조건을 초월해 생(生)을 완성해내는 것이지요. 나치에게서 끔찍한 비극을 겪은 로자 아줌마의 아픔, 매춘부였던 엄마에게서 버림받았다고 괴로워하는 모모의 상처는 서로에게 거울처럼 비치다가 결국 서로를 쓰다듬는 생을 이루어냅니다.
이 내용이 텍스트에서 스크린으로 옮겨가면서 진행된 변화는 사실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영화에서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첫 만남은 모모가 로자 아줌마의 은촛대를 시장에서 훔치면서 시작됩니다. 소설에서 모모는 그보다 어렸던 3세 무렵에 이미 로자 아줌마에게 맡겨진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영화와 달리 소설의 모모는 환각제를 배달하거나 로자 아줌마에게 심각하게 반항하는 비행 청소년으로까지 비화되진 않습니다.
▶손에 쥔 한 알의 달걀
소소한 차이를 뒤로하고 깊은 차이를 살펴봅니다. 첫째, 로맹 가리가 소설에 언급한 생(生)에 관한 고찰입니다. 영화에 나오지 않는 지점들이지요. <자기 앞의 생>의 영어 제목은 <The Life Ahead>입니다. 영화에서는 생(life)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고 그저 생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의 풍경만 거론됩니다. 그러나 원작에서 ‘생’은 어린 모모에게서 지속적으로 ‘관찰되는’ 무엇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생을 사물화 혹은 의인화합니다. 마치 생이란 것이 인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무엇이라는 듯이 말이지요. 소설의 첫 부분에서 모모는 한 상점에서 달걀을 훔치고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나는 그녀(상점 여주인)가 나를 잘 구슬려서 달걀을 도로 찾으려고 그러는 줄 알고 호주머니 깊숙이 든 달걀을 더 꼭 쥐었다. 그녀는 벌로 나를 한 대 갈겨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일어서서 진열대로 가더니 달걀을 하나 더 집어서 내게 주었다. (중략) 나는 손에 달걀을 쥔 채 거기에 있었다. 그때 내 나이 여섯 살쯤이었고, 나는 내 생이 모두 거기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18쪽)
보통의 우리는, 나의 삶이 곧 나의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내게 주어진 생을 ‘나’라는 정체와 동일시합니다. 모모는 생을 자신이 아닌 그 무엇으로 진술합니다. 왜일까요. 매춘 여성의 사생아,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엄마. 나약하고 소외된 자리로 밀려난 모모 자신에게는 생을 의지대로 움직여볼 수 있는 힘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생은 모모보다 강했으니까요. 훔친 달걀을 꼭 손에 쥐고 생을 자신의 의지대로 해볼 수 있음을 잠시나마 감각해보는 일만이 모모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생을 자신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으로 인식하는 모모의 관념은 총 311쪽짜리 소설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됩니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120쪽)
생은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관조하고 모모와 로자 아줌마는 생을 관조합니다. 로자 아줌마가 허깨비를 본 듯이 비를 맞으며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은 심연 속에서 생의 눈(眼)을 쳐다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달걀 안에는 무궁한 잠재성이 숨겨져 있지만 그것을 열기 전까지는 그 어떠한 가능성도 차단되어 있는 상황을 반증하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생이란, 이미 훔쳤거나 아직 훔치지 않은 달걀과 같은 그 무엇일까요.
▶모성의 암사자와 신기루
영화 <자기 앞의 생>을 먼저 본 분들이라면 모모의 얼굴을 핥아주는 암사자의 느닷없는 등장에 다소 의아하셨을 것 같습니다. 모모가 볼펜으로 암사자의 얼굴을 스케치북과 노트에 그리는 시퀀스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긴 합니다만 암사자의 환영이 등장하는 장면은 다소 맥락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거실의 카펫에서, 암사자의 환영과 뒹구는 모모의 취미는, 사실 원작에서는 로자 아줌마의 이야기 덕분이었습니다. 로자 아줌마는 모모에게 자주 말했습니다. “동물세계의 법이 인간세상의 법보다 낫단다. 암사자의 세계가 그러하단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암사자를 칭찬했지요. 모성을 갈망하는 모모로서는, 로자 아줌마가 일러준 암사자가 자신을 달래주는 엄마와 같은 존재로 인지되는 것이지요.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끝내 등장하지 않는 모모의 엄마는 결국 신기루의 암사자로만 나타날 뿐이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로자 아줌마를 대신한 암사자의 등장에 모모가 함박웃음을 짓는 이유는 로자 아줌마가 알려준 암사자의 온기 어린 애정 때문일 겁니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로자 아줌마는 암사자의 환영을 보는 모모에게 화를 내며 의사 코엔 선생에게 모모를 데려가 정신감정을 의뢰하기까지 합니다. 로맹 가리의 팬이라면 그 장면은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자리에 누워 잠들기 전에 이따금 상상 속에서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 문을 열고 나가보면, 거기에는 새끼들을 돌보기 위해 집안으로 들어오려는 암사자가 한 마리 있었다. 암사자들은 새끼를 위해서라면 절대 물러서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데, 그것이 정글의 법칙이며, 암사자가 새끼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암사자를 신뢰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다.’(76~77쪽)
▶인간의 본질, 인간의 조건
세 번째 차이점. 영화에는 소설의 중요한 클라이맥스 부분이 통째로 생략되어 있습니다. 모모의 친아빠가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매춘부의 포주 역할을 했던 모모의 생부는 아내이자 모모의 생모(아이샤)인 그녀를 살해한 범죄자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그는 로자 아줌마 앞에서 아들을 돌려달라며 자신을 변명합니다. 생부는 이제 막 정신병원에서 풀려났다며 ‘회교도 어린아이’인 모하메드(모모)를 내놓으라고 로자 아줌마에게 간청합니다. 사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아들인 모모에게서 축복을 받으려는 이기적인 마음이 더 컸지요.
로자 아줌마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모를 내줌으로써 원망의 생부를 축복해줄 마음은 일점도 없었습니다. 한참을 모모 생부와 실랑이하던 로자 아줌마는 “당신의 실제 아들(모모)을 회교도가 아닌 유대인으로 길렀다. 뭐 그래봤자 바르 미츠바(유대식 성년식을 남자아이 또는 그 의식)를 치른 것하고 항상 코셰(유대교 계열에 맞는 식품)를 먹은 것 정도”라고 거짓말을 해버리지요.
이후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는 부디 원작 228쪽에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는 로자 아줌마의 입을 빌려 신앙 유무에 따라 쪼개져버린 두 세계의 충돌과 봉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는 모든 차이를 초극하여 마음의 합일에 이르렀습니다. 로자 아줌마와 모모는 인종(유대인-아랍인)뿐만 아니라 종교(유대교-회교)가 달랐고 나아가 나이(노년-소년), 언어(히브리어-아랍어), 성별(여성-남성) 등이 모두 달랐습니다. 결국 생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러한 ‘조건’들은 인간의 본질 앞에서는 모두 무용(無用)하다는 사실을 소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