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서거 200주년 맞는 E.T.A. 호프만, 음악가를 꿈꾸었던 법관의 이중생활
입력 : 2022.03.04 17:03:57
수정 : 2022.03.04 17:04:24
해마다 봄 시즌을 준비하면서 ‘기념해’를 맞는 음악가들을 체크해보곤 한다. 애호가로서의 순수한 호기심 차원이기도 하지만, 각종 강의와 칼럼에서 다룰 만한 주제를 찾기 위한 직업적인 이유가 크다. 올해 기념해를 맞는 주요 작곡가로는 우선 러시아의 알렉산더 스크랴빈(탄생 150주년), 벨기에의 세자르 프랑크(탄생 200주년), 영국의 본 윌리엄스(탄생 150주년), 그리스의 야니스 크세나키스(탄생 100주년) 등이 있다. 프란츠 슈베르트(탄생 225주년), 펠릭스 멘델스존(서거 175주년), 요하네스 브람스(서거 125주년)처럼 보다 친숙한 이름들도 눈에 띄지만,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에서 25년 주기로 기념해를 챙기는 일은 좀 어색하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시기에 맞춰 이벤트성으로 한두 번 정도 다뤄볼 만한 음악가들은 있어도 재작년의 ‘베토벤’처럼 한 해 전체를 아우를 만한 거물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주목하게 된 인물이 독일의 ‘E.T.A. 호프만(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이다.
오는 6월 25일에 서거 200주기를 맞는 호프만은 소설가로 훨씬 더 유명하지만, 분명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는 밤베르크와 드레스덴에서 지휘자로 일했고, 작곡가로서 기악, 성악, 극음악을 아우르며 수십 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무대미술가, 비평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비록 그의 음악작품들 가운데 지속적인 관심을 받은 곡은 거의 없지만, 최대 성공작인 오페라 <운디네>는 한때 큰 인기를 끌면서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발전에 기여했다. 아울러 그의 환상소설들은 낭만주의 시대 이래 여러 작곡가들의 영감을 자극하여 걸출한 명작들을 탄생시켰다.
E.T.A. 호프만의 자화상. 사진 위키피디아.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법관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은 1776년 1월 24일에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이자 대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원래 세 번째 세례명은 빌헬름(Wilhelm)이었지만 나중에 모차르트에 대한 존경심에서 스스로 아마데우스(Amadeus)로 바꾼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이면서 시인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였고, 그 사촌이었던 어머니도 법조인 가문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호프만은 부모가 이혼한 후 외가에서 성장했고 가풍에 따라 법학을 전공했지만, 동시에 예술에도 남다른 재능과 애정을 보이며 음악, 미술을 함께 공부했다. 결국 그는 법관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도 버리지 않았다.
호프만의 인생 여정은 법관으로서나 예술가로서나 순탄치 않았다. 베를린을 거쳐 폴란드의 지방도시 포젠에서 법관시보로 근무할 때는 사육제 기간에 유력인사들을 풍자하는 캐리커처를 그렸다가 물의를 빚어 벽지인 플로크로 좌천되었는가 하면, 바르샤바로 발령받아 누렸던 안정된 생활은 나폴레옹 군대의 프로이센 침공으로 채 3년을 지속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한동안 호프만은 나폴레옹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도시 저 도시를 옮겨 다니다 가족과 지인들이 부상이나 죽음을 당하는 고초를 겪는다.
한편 나폴레옹 군대가 바르샤바를 점령하면서 실직한 호프만은 이참에 예술가 겸 작가로 진로를 변경하기로 결심한다. 1807년 여름, 베를린으로 이주한 그는 궁핍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여섯 개의 찬가’를 비롯한 작곡을 시도했고, 그 이듬해 가을에는 극장 매니저로 와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밤베르크로 이주했다. 밤베르크는 그에게 영광과 좌절을 나란히 안겨준 애증의 도시였다. 밤베르크 시절에 그는 훗날 그에게 결정적인 명성을 안겨준 첫 단편소설들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라이프치히의 유력 신문에 평론가로 등단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비평 중에서 베토벤의 ‘c단조 교향곡(운명 교향곡)’을 극적인 이미지로 해석하고 분석하며 열광적으로 찬미한 글은 특히 유명하다. 반면에 밤베르크에서 지휘자로 일하려던 계획은 극장 감독과의 갈등 속에서 무산되었고 대신 그는 무대연출가, 장식가, 극작가로서의 직분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가 하면 성악 레슨을 해주던 열다섯 살 소녀 율리아 마르크를 향해 (유부남이면서도) 연정을 불태우다 실연을 당하기도 했다. 그 후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서 잠시 지휘자로 활동하던 호프만은 나폴레옹이 패망하자 베를린으로 돌아가 다시 관직에 몸담는다.
마침내 그에게 성공과 명성이 찾아왔다. 1814년에 그때까지 써둔 단편소설들을 묶어서 출판한 <칼로풍의 환상작품집>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816년에는 밤베르크에서 완성한 오페라 <운디네>가 베를린 왕립극장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다만 베를린 시절 창작활동의 무게중심은 문학 쪽으로 옮겨져 단편집 <밤의 풍경들>, <세라피온 형제들>, 장편 <악마의 묘약>,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 등 방대한 수량의 소설들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베를린에서 그는 낮에는 성실하고 유능한 법관으로 공직에 봉사하고, 밤에는 창작에 몰두하는 한편 시내의 단골 술집에서 폭음과 장광설을 즐기는 기인 같은 이중생활을 영위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밤의 호프만’ ‘도깨비 호프만’이라고 불렀고, 그가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토론을 벌이던 ‘루터와 베게너’라는 주점은 도시의 명소가 되어 수많은 문학 순례객들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말년에 메테르니히 체제하의 굴절된 정치 상황 속에서 저항의식을 표출하기도 했던 호프만은 음주벽과 와병으로 인해 46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낭만주의 예술가의 분열적인 삶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기괴한 상상력과 고도의 풍자, 유머로 독자를 매혹하는 E.T.A. 호프만의 소설들은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과 세계 각지에서 각광받아왔다. 오늘날 그는 ‘환상문학의 대가’로 기억되지만, 동시에 공포소설과 추리소설의 선구자로도 평가받는다. 일례로 1817년의 단편 <모래 사나이>는 과학과 초자연, 이성과 광기가 교차하는 섬뜩한 사건과 오묘한 함의로 공포소설 장르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고, 1819년의 중편 <스퀴데리 양>은 범죄소설의 요건을 갖추고 있어서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니콜라이 고골, 찰스 디킨스, 빅토르 위고, 오노레 드 발자크, 샤를 보들레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프란츠 카프카, 알프레드 히치콕 등 그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호프만의 소설에서 소재를 취한 음악작품으로는 차이콥스키의 발레음악 <호두까기 인형>,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그리고 슈만의 피아노곡 <크라이슬레리아나>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는 호프만의 자아가 투영된 캐릭터로 알려진 ‘카펠마이스터(궁정악장) 크라이슬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을 끈다. 호프만의 작품 속에서 크라이슬러는 ‘진정한 의미의 천재적 낭만주의 예술가로서 지극히 민감하고 쉽게 자극되는 성향을 지닌 인물’로 그려지며, 그의 행적은 ‘예술과 세계의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분열적 불안상태’에 휩싸이곤 했고, 그의 내면은 ‘어두운 심연과 내적 분열’로 가득 차있으며, ‘주위 세계와 충돌하여 타협하지 않고 광기로 치달을 위험’을 안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평생을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분열적인 삶을 살다가 결국 광기로 침몰해버린 ‘낭만주의 음악가의 전형’ 로베르트 슈만의 초상과도 겹쳐진다.
[황장원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