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잖아. 두 사람이니 생각도 둘, 그냥 차이를 인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이고. 겨우 추스른 분위기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듣는 이 입장에서도 아차 싶었는데, 당사자 얼굴을 보니 똥 씹은 양 입술이 일그러졌다. 되먹지 못한 입방정이다. “그게 안 되니 차라리 죽어야 하나 싶기도 했다”는 말엔 괜스레 미안하고 측은했다. 오랜만에 동창들이 둘러앉은 선술집. 소주가 네댓 병 상에 오를 즈음 혀 꼬인 친구 하나가 대뜸 고민이 있다며 속마음을 툭 내던졌다. 그 고민에 걱정을 더한 또 다른 친구의 위로가 쌩한 찬바람을 불렀던 것이다.
40대 초반에 잘 다니던 중견기업을 차버리고 중국으로 건너간 A는 무역으로 성공했다. 서해를 오가며 싣고 부리는 상품이 늘 히트했다. 요 몇 년간은 뜨음했지만 “정치가 어떻게 먹고사는 경제를 갈라놓을 수 있냐”며 호언장담하는 모습도 왠지 믿음직했다.
“한 달 전에 아내가 그러더라고. 이렇게 헤어져 있을 거면 아예 따로 살자고. 나 혼자 잘살자고 이러느냐, 도대체 뭐가 문제냐, 윽박지르는 내 모습에 나도 당황스러웠어.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더라고. 첨 보는 사람들한텐 젠틀맨인데 집에선 똥고집이었더라고. 딸아이 놀란 표정이 잊히질 않아.”
1년에 3분의 2를 중국에서 지내야 하는 상황에 사업은 흥했지만 가족은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경제적 뒷바라지 하나는 차고 넘칠 만큼 충분히 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하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괜한 말이 아니었다. 나 혼자 잘살자고 이러느냐는 말은 그저 공허한 핑계에 불과했다. 사업한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부어라 마셔라 했던 일부터 하나 밖에 없는 딸 생일에 함께 있어주지 못했던 순간까지, 정지화면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부랴부랴 귀국해 수습에 나섰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잠시 떨어져 지내잔 말에 사무실에서 먹고 자던 그는 얼마 전집으로 귀가했다.
“고등학생이 된 딸이 그러더라. 유치원 때 그랬던 것처럼 계획 세우지 말고 가족여행 떠나는 게 어떠냐고. 직장 다닐 땐 그랬었거든. 그냥 훌쩍.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어디 좋은 곳 없을까. 더 취하기 전에 추천 좀 해줘봐.”
이놈, 저놈, 누구랄 것도 없이 명소를 쏟아냈다. 밤이 깊어질수록 혀는 꼬이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햇빛에 비친 호수의 잔물결이 일렁인다. 우리말로 윤슬. 찬란한 윤슬따라 걷는 길에 붙여진 이름은 ‘가족길’. 이름 따라 간다 했던가. 아장아장 걷는 아기부터 꼬옥 잡은 손 자랑하듯 크게 휘젓는 노부부까지 다양한 세대, 다양한 가족이 횡성호수 둘레길을 걷는다.
횡성호수길 5구간인 가족길은 망향의 동산에서 시작한다. ‘망향(望鄕)’이라니 무슨 사연인가 싶은데, 지난 2000년 섬강을 막은 횡성댐이 완공되면서 부동리, 중금리, 화전리, 구방리, 포동리 등 갑천면 5개리, 258세대가 호수에 잠겼다. 그러니까 망향의 동산은 수몰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추억의 장소다. 작은 공원에 수몰민의 문화를 전시한 자료관과 ‘화성정’이란 누각이 있고, 아래쪽에 장터 겸 주차장으로 쓰는 공간이 자리했다. 인공호수인 횡성호수는 주변 둘레길이 총 31.5㎞에 이른다. 둘레길은 6개 구간으로 조성됐는데, 그중 가장 찾는 이가 많은 코스가 바로 5구간이다. A코스(4.5㎞)와 B코스(4.5㎞)로 나뉜 이 길은 두 코스가 ‘원두막’ 부근에서 서로 겹치는데, 그래서인지 A코스를 가다 B코스로 빠져 다시 A코스로 돌아 나오는 이들이 많다. 6개 구간의 횡성호수길 중 출발점과 도착점이 같은 회귀 코스인데, 각각 4.5㎞인 두 길을 모두 걸어도 서너 시간이면 충분하다. 가족길이 인기가 높은 건 평탄하고 아기자기한 조형물과 쉼터가 많기 때문인데, 맨발걷기에 나선 이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A구간에는 호수길 전망대, 가족 쉼터, 산림욕장, 타이타닉 전망대, 오솔길 전망대 등이 자리했다. 피톤치드를 만끽할 수 있는 구간이다. 반면 B구간은 한눈에 호수를 담을 수 있는, 자연에 온몸을 맡기는 구간이다. 두 코스 모두 소나무, 전나무, 밤나무가 그득한데, 특히 밤나무가 무성하다. 길은 맑고 바람은 시원하다. 숲으로 둘러싸여 그늘도 넓고 깊다. 한여름엔 봄, 가을보다 물이 빠져 언저리에 허연 속살을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출렁이는 물살을 보면 해외 어딘가가 떠오를 만큼 이국적이다. 풍경에 취해 하염없이 앞만 보고 걷다간 큰코다칠 수도 있다. 한 번에 9㎞를 걷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땐 양에 맞춰 걷는 참을성이 필수덕목이다. 여기에 맛이 빠질 수 없다. 이건 필수미덕이다. 강원도 횡성은 맛의 고장 아니던가.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어사진미부터 더덕, 배추, 토마토, 안흥찐빵, 한우에 이르기까지, 횡성은 지명이자 수식어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6호 (2024년 7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