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이제 어리지 않아.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이번엔 나가보라니까.”
“됐네요. 그런데 힘 빼기 싫네요.”
누가 봐도 다정해 보이는 모녀가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말고 갑자기 말다툼(?)이다. 정상이 코앞인 산길이라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아 의도치 않게 대화가 귀에 얹혔다.
“내년이면 30대 중반 아니니. 선 보는 게 뭐 어때서 그래. 그러다 눈 껌뻑이면 마흔이라니까. 너 혹시 자만추 어쩌고 그런 거 생각하는 거야?”
“나이는 참. 난 내가 책임질 테니 엄마는 엄마 걱정이나 하세요. 엄마도 혼자면서.”
“난 네 아빠가 먼저…. 으이구.”
“아빠가 하늘에서 기다린 지 너무 오래됐다니까. 잊어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멋진 남친 하나 만들어도 누가 뭐라지 않을 거야. 나 없음 혼자 심심해서 어쩌려고. 하하.”
“너 없어도 나 좋다는 친구들 많다니까. 엄마 인싸야 인싸.”
옥신각신하다 나무 계단 옆에 핀 얼레지, 남산제비꽃, 진달래 등 봄꽃으로 주제를 옮기고 돌아오길 서너 차례. 정상까지 100m 남았다는 이정표를 돌고 약 10여 분간 어르고 달래던 엄마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정상이 이렇게 생겼구나. 엄마, 우리 저 표지석에서 사진 찍어야지. 줄부터 서야겠네.”
딸의 호들갑에도 움직임 없이 바다를 응시하던 엄마가 한 마디 한다.
“딸, 우리 내년 봄에도 여기 또 오자. 바다가 이렇게 넓었구나.”
그 말에 딸이 뾰로통하며 화답했다.
“나 애인 생기면 애인하고 올 텐데. 힝.”
“지지배. 그러든지!”
경상남도 통영에 도착했다. 미륵산에 가려면 통영의 미륵도로 가야한다. 서울에서 출발해 5시간 반. 참, 멀다. 그럼에도 지치지 않는 건 바다 때문이다. 통영 시내를 빙 두른 바다의 상쾌한 짠 내가 싫지 않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통영중앙전통시장의 활기찬 기운도 마음을 들뜨게 한다. 육지와 미륵도를 연결하는 충무교는 이젠 개통(1967년) 당시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정겨움은 그대로다. 다리가 보수되기 전엔 뽀뽀다리라 불리기도 했다는데, 인도 폭이 한 사람 겨우 지나가기에도 버거워 연인끼리 깻잎처럼 꼭 붙어 다녔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여하튼 보수 전이나 후나 충무교는 위로는 사람과 차들이, 아래로는 제법 큰 배들이 지나는 통로다. 물때와 상관없이 수심이 깊어 늘 배가 지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양의 나폴리라는 통영의 수식어는 어쩌면 이러한 풍경에 기인하다.
반칙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이번에 케이블카(성인 왕복 1만7000원, 소인 1만3000원)를 타고 미륵산에 오르기로 했다. 해발 461m인 이 야트막한 산에 분명 케이블카를 놓은 이유가 있을 거란 의문이 더 컸다. 미륵근린공원 앞에 자리한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에서 출발하는 여정은 생각보다 꽤 길다. 2008년 4월에 개통했으니 올해로 16년 차. 당시 스위스의 최신 기술로 완성했다는 곤돌라 방식의 이 케이블카는 길이만 총 1975m나 된다. 소요 시간은 약 9분. 평일에도 길게 늘어선 줄은 계절의 영향이 크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 게다가 산 곳곳에 핀 알록달록한 봄꽃까지. 차려진 상 위에 살포시 숟가락 얹으려 나들이 나선 이들로 주차장부터 분주하다. 케이블카에 오르면 반대편에 앉아야 볼거리가 많다. 오를 때나 내릴 때 모두 바다 쪽을 볼 수 있다. 아, 그래서 이곳에 케이블카가 놓인 건가 싶게 해발이 높아질수록 통영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총 3층으로 이뤄진 상부역사는 1층이 휴게실, 2층은 승강장, 3층은 전망대로 구성됐다. 1층에 미륵산 정상으로 등산로가 이어지는데, 그렇다고 3층 전망대를 지나치면 훌륭한 사진 스폿을 놓치는 셈이다. 이럴 때일수록 천천히 둘러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얼마나 긴 시간을 들여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왔는데, 서둘긴….
나무 데크가 놓인 정상 등산로에는 한려수도 전망대와 통영항 전망대가 마련돼 있다. 그러니까 오를 땐 한려수도, 내려올 땐 통영항, 이렇게 번갈아 길을 오가는 게 득이다. 쉬엄쉬엄 오르면 20분 남짓 걸리는 길은 대부분 계단이다. 계단에 자신이 없다면 일찌감치 상부역사 전망대에서 멈춰야 한다. 욕심부리다 내려올 때 후회할 수도 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차이는 있다지만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다도해도 일품이다. 정상에 도착하면 표지석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 또한 이색적이다. 정상 주변은 어느 곳에 포커스를 맞춰도 기막힌 풍광에 입이 떠억 벌어진다. 그야말로 탁 트였다. 맑은 화선지에 먹물이 튀듯 놓인 작은 섬들이 다도해를 가득 채우고 있고, 그 반대편은 통영 시내가 오롯하다. 날이 맑으면 여수도 보인다니 망원경 하나쯤 갖고 오르는 것도 그 나름의 방법이다. 아, 하산 후 먹을거리를 찾는다면 ‘다찌’ 한 상이 유명하다. 통영식 술상인데, 술을 주문하면 갖가지 해산물 안주가 함께 나오는 식이다. 당일 조업한 해산물만 사용해 신선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글·사진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4호 (2024년 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