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고개 돌리지 마시고 똑바로 쳐다보세요. 가만히 있으면 작품이 완성됩니다.”
갯배 선착장 바로 앞에 자리한 카페. 밖에서 안을 쳐다보는 이들이 하나둘 늘더니 지나가던 사람도 걸음을 멈추고 뚫어져라 안쪽을 쳐다본다.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해 고개를 한껏 쳐들어보니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의 붓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차 한잔하면 그림을 공짜로 그려준다는 안내문을 걸어두고 카페 안에서 그림 작업이 한창이다. 안으로 들어가 사정을 살펴보니 기다리는 팀만 서넛이다. 카페 사장님이 알려준 순번은 4번째. 어림잡아 한 시간은 기다려야 순서가 돌아온단다.
“요즘 같은 시대에 웬 초상화야, 아빠. 내가 사진 앱으로 뽀샤시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데.”
대학생쯤 됐으려나, 기다리기 싫어 몸을 배배 꼬던 딸이 살며시 문명의 혜택을 내밀자 짧은 스포츠형 머리가 하얗게 샌 아빠가 묵직하게 한마디 내뱉는다.
“이게 아빠 세대 스타일이야. 뽀샵한 사진보다 이게 더 기억에 남고 오래간다고. 또 그림엔 주름이 없잖아. 팽팽한 아빠를 기억할 절호의 기회다.”
아빠를 기억할 기회란 말에 잠시 생경한 침묵이 흐른 후 딸이 멋쩍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그래도 난 사진이랑 릴스만 모아놔야지. 저렇게 가만히 앉아서 포즈 취하는 것도 촬영해서 차곡차곡 모아놓을 거야. 그래야 나중에 아빠 놀려먹을 때 증거를 내밀 수 있거든.”
한 시간 즈음 지났으려나. 작업을 마친 화가가 마지막으로 그림 속에 자기 나름의 바람을 적어 내려가자 그때까지 아무 말 없던 엄마가 말문을 열었다.
“어머, 화가님도 ‘아빠 건강하세요’라네. 당신 건강 염려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걱정은. 이제 그만 맛난 거 먹으러 갑시다.”
그 모습에 딸도 한마디하며 일어선다.
“그러게. 아빤 정말 걱정도 팔자셔. 그런데 정말 그림에 주름 하나 없네. 오늘은 아빠가 한턱 쏴야겠는데요.”
어떤 사연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림을 전하는 화가의 눈도 달처럼 휘었다. 아무 말 없이 카페를 나서는 아빠의 어깨가 살짝 들썩인다. 그러곤 다시 꼿꼿해진 어깨. 그 양쪽을 엄마와 딸이 받치고 걸어간다. 카페에서 차 한잔하며 순서를 기다리던 이들이 모두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마치 우리도 응원한다는 듯….
속초 해변과 시내, 맛집과 멋집을 모두 관통하는 걷기 코스로 청초호 둘레길만 한 곳이 없다. 봄볕 따뜻한 오후에 엑스포상징탑에서 출발해 다시 탑으로 돌아오는 이 순환형 코스를 걷다 보면 아바이마을의 갯배를 만나게 된다. 속초 시내와 아바이마을 사이에 놓인 속초항 수로를 넘나드는 도선(渡船)인데, 동력선이 아니라 탑승자가 쇠갈고리로 와이어를 당겨 반대편 선착장까지 배를 끌고 가야 한다. 주로 아이들이 신기한 경험 삼아 쇠갈고리를 당기는데, 그래서 간간이 힘내라는 응원소리가 들린다. 카페를 나선 가족이 갯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때도 “화이팅!” 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그런 응원에 선착장 주변엔 간간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아바이마을 위로 관통하는 설악·금강대교에 오르면 속초 시내와 청초호, 설악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난 2012년 7월에 개통된 설악·금강대교는 구수로와 신수로 위를 지나는 아치형 교량이다. 남쪽 신수로를 넘는 교량은 설악대교, 북쪽 구수로를 넘는 교량은 금강대교다. 1999년에 설악대교가 완성된 후 2012년 금강대교가 완공되며 남북을 잇는 속초시 해안도로가 완전히 개통됐다. 사실 아바이마을 코스는 따로 도는 사잇길이 있을 만큼 이야깃거리가 풍부한데, 속초사잇길 7코스라 불리는 청초호 둘레길을 걷다 출출한 배를 채우는 장소로 제격일 만큼 순대국, 오징어순대, 냉면을 내는 맛집이 여럿이다. 그러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속초사잇길 7코스의 시작은 엑스포상징탑이다. 청호마경(靑湖磨鏡), 청초호 수면에 설악산의 웅대한 모습이 거꾸로 비춘다는 사자성어의 의미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길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색다른 명소다. 바다와 맞닿은 호수는 갈매기와 오리가 함께 떠다니고 봄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하구의 철새도래지에 푸릇한 기운이 만발해 눈이 훤해진다.
1987년 시작된 청초호 개발사업의 매립 공사로 호수의 면적이 3분의 2로 줄어들었지만 철새도래지만큼은 지금도 생태지역으로 보존되고 있다. 개발사업 이후 1999년 강원국제관광엑스포가 개최된 녹지공원에서 하구를 바라보면 서로 공존하는 도시와 자연의 아쉽지만 평화로운 조화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호수 한쪽에 마련된 이국적인 요트 계류장도 꽤 이용이 활발하다. 나무 데크를 깔아 산책로를 마련한 둘레길은 유람선 선착장, 대창조선소 옆까지 확장돼 있어 걷기 편하다. 속초수협 건물을 지나 아이마을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 다시 걷기 시작해 청학동 방향의 청초호 반로에 들어서면 골목 곳곳에 요즘 핫한 카페와 레스토랑, 베이커리가 숨어 있다. 그중 교동항이 자리했던 석봉도자기 인근과 칠성조선소가 이름난 핫플레이스다. 청초정이란 정자와 청룡, 황룡의 전설을 조형화한 상징물도 포토존으로 인기가 높다. 청초천 하구 철새도래지를 거쳐 엑스포 다리를 지나 시민공원에 들어서면 철새를 관망할 수 있는 철새관망탑이 나오고. 출발지인 엑스포상징탑에 도착한다.
여기서 잠깐, 가족과 함께 걷는다면 마무리 코스는 어디가 좋을까. 엑스포상징탑 주변에는 그야말로 속초 맛집이 즐비하다. 닭강정부터 양념갈비, 물회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그중 첫손으로 꼽히는 건 역시 물회. 평일에도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는 대형 식당이 두 곳이나 자리했다. 식사시간을 피한다고 해도 주말엔 어쩔 수 없다. 느긋하게 걷고 편하게 기다리는 지혜, 속초를 즐기는 마음가짐이다.
[글·사진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3호 (2024년 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