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부터 럭셔리까지, 요즘 뜨는 오프라인 매장에선 “제품이 아니라 경험을 살 수 있습니다!”
안재형 기자
입력 : 2019.12.27 18:07:02
수정 : 2019.12.27 18:22:13
# 경기도 일산에 사는 30대 주부 이미경 씨는 지난 11월부터 장바구니 없이 대형마트로 장을 보러간다. 그녀가 주로 장을 보는 홈플러스에선 고객과 가까운 마트에서 가장 빠르고 신선하게 배송한다는 의미의 ‘마트직송’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예컨대 생수 매대에 가면 ‘무거운 생수는 가볍게, 모바일로 당일배송 받으세요’라는 대형 광고가 줄지어 걸려있다.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 덕분에 이 씨의 손에는 장바구니와 지갑 대신 스마트폰이 전부다. 눈으로 제품을 확인하곤 온라인 앱의 장바구니에 담은 후 일괄 구입하면 늦어도 저녁식사 준비 전 집에 배송된다. 이 씨는 “들고 다니기 무겁거나 부피가 큰 물건도 당일배송되기 때문에 마트에서 아이쇼핑 후 온라인으로 구입한다”며 “들고 올 부담이 없고 몇 시간 후면 물건이 도착하기 때문에 매장에서 산 것 같은 기분”이라고 전했다.
#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의 한 기업에 근무하는 20대 직장인 김영신 씨는 지난 가을 호주 스킨케어 브랜드 ‘이솝(Aesop)’에서 네덜란드 예술가 바트 헤스(Bart Hess)의 전위적인 필름을 본 후 팬이 됐다. 작가와 협업한 5편의 필름이 제품과 함께 전시돼 있던 이솝은 매장을 갤러리처럼 활용하는 브랜드로 이미 유명한 곳이다. 이솝 제품이 피부에 닿는 순간을 표현한 영상을 보고 제품도 사용하게 됐다는 이 씨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공간에서 일종의 컬쳐 쇼크를 경험했다”며 “자연스럽게 제품 구매까지 이어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죽는 것은 오프라인이 아니라 변하지 않은 재미없는 공간
온라인 쇼핑몰이 가져온 이른바 ‘유통혁명’은 오프라인 매장에겐 ‘몰락의 전조’와도 같았다. 실제로 2019년 대형마트는 초저가 경쟁의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온라인몰의 성장에 소비 둔화가 겹치며 오프라인 매장에선 싸게 파는 것 외엔 별다른 답이 없었다. 국내 1위 대형마트인 이마트가 2019년 2분기에 적자로 전환한 건 오프라인 매장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전문가들은 “대형마트의 몰락은 일본식 장기 불황의 전조로 해석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1990년대 일본에서 이온그룹 대형 할인점의 실적이 꺾이며 폐점이 이어진 것과 부동산 시장의 거품 소멸이 겹치며 20년 넘는 장기 불황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쇼핑몰의 성장이 오프라인 매장에게 몰락의 신호일 수밖에 없는 걸까. 최근 이러한 추세를 비웃기라도 하듯 일부러 찾아가는 오프라인 매장이 속속 등장하며 인기를 얻고 있다. 대형마트부터 하이엔드 럭셔리, 밀레니얼 세대부터 기성세대까지 제품 영역과 찾는 이들의 연령대도 다양하다. 오프라인 매장이 이들에게 제공하는 새로운 가치는 ‘경험’이다. 매장을 찾은 고객은 전문적인 지식부터 라이프스타일에 이르는 다양한 체험을 통해 그동안 쉽게 접하지 못했던 새로움 경험을 발견하고 있다.
하이엔드 럭셔리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루이비통’이 서울 청담동에 새롭게 문을 연 ‘루이비통 메종 서울’ 4층에는 세계적인 작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 8점이 전시돼 있다(~1월 19일). 루이비통은 국내 플래그십 매장을 개관하며 문화예술 콘텐츠를 마케팅에 접목했다. 루이비통 메종 서울은 현대 건축의 거장, 프랭크 게리가 수원화성, 동래 학춤 등 한국의 전통과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외관을 설계했다. 지하 1층부터 2층까지는 제품 매장, 3층은 예약제로 운영되는 프라이빗 살롱이다. 4층에는 전시 공간을 마련해 고객들을 위해 무료로 운영한다. 도슨트의 꼼꼼한 설명까지 듣다보면 이곳이 미술관인지 패션 매장인지 헷갈린다. 관람객은 가장 위층에서 전시를 본 후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자연스럽게 제품을 접할 수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엔 얼마나 멋지게 브랜드의 정체성을 표현해 제품을 진열하느냐가 매장의 관건이었다면 지금은 제품이 아닌 한 차원 높은 콘텐츠로 고객을 이끌어야 한다”며 “찾는 이들이 많아야 지갑을 여는 이들도 늘어난다”고 귀띔했다.
루이비통 메종 서울
아예 물건을 팔지 않고 브랜드 체험관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서울 성수동에 문을 연 ‘아모레 성수’에선 화장품을 써볼 순 있지만 살 순 없다. 진열된 제품만 약 3000여 종. 이 모든 제품은 판매가 아니라 체험용이다. 아모레퍼시픽이 밀레니얼 세대를 위해 기획한 공간인데, 브랜드 체험이란 본질에 엔터테인먼트와 휴식의 가치를 담았다. 공간은 크게 제품이 전시된 ‘뷰티라이브러리’와 화장품을 마음껏 써볼 수 있는 ‘가든라운지’, 시그니처 아이템인 성수토너를 판매하는 ‘성수마켓’, 플라워리스트가 상주하는 ‘플라워마켓’, 그리고 ‘오설록카페’로 나뉜다. 입구에 들어서면 클렌징 룸이 보인다. 마치 ‘제대로 놀다 가라’는 듯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헤어밴드와 수건, 산소발생기를 비치해 창밖의 정원을 보며 여유롭게 세안할 수 있다. 원하는 화장품을 바구니에 담아 소파에 앉아서 테스트할 수도 있다. 건물 가운데에 중정처럼 자리한 ‘성수가든’은 아모레성수의 포인트다. 이곳엔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식물을 심어 각각의 식물이 지닌 놀라운 생명력을 관찰할 수 있게 설계했다. 자동차 정비소를 개조한 건물 내부는 높낮이가 다른 바닥이나 옛 흔적이 레트로를 연상케 한다. 이곳에선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문화강좌 외에 아모레퍼시픽 사내 전문가의 향, 꽃꽂이 등의 강좌가 진행될 예정이다.
‘좋은 수면은 취향이 반영된 삶’이란 슬로건으로 유명한 침대브랜드 ‘시몬스’는 3년이나 공들여 경기도 이천시에 ‘시몬스 테라스’를 만들었다. 잠자리와 관련한 모든 경험을 제공하는 일종의 복합수면공간이다. 수면과 관련한 라이프스타일을 직접 경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쇼룸인데, ‘헤리티지 앨리’라는 공간에선 전문 큐레이터가 150년의 시몬스 역사와 브랜드에 대한 투어를 진행한다. 이 과정을 통해 방문객들은 침대의 역사와 제조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호텔’이라 이름 붙은 공간에선 침대 매트리스 속 소재까지 직접 체험할 수 있다. 공간을 이동하다 쉬고 싶으면 내부의 커피숍에 들러 쉴 수도 있다. 건물 밖엔 ‘팜가든’이란 정원도 마련돼 있어 수면에 도움이 되는 식물들의 향과 관리법 등을 익힐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을 체험하고 만약 제품을 사고 싶다면 지하에 마련된 ‘테라스’ 공간에서 구매할 수 있다. 여기선 고객의 수면습관을 체크해 매트리스를 추천해 준다. 잠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체험할 수 있게 설계된 셈이다. 2018년 문을 연 시몬스 테라스는 최근 누적 방문객 10만 명을 돌파했다.
아모레 성수
그런가하면 생활용품 기업 ‘쿠첸’은 서울 삼성점, 서래마을점, 경기도 정자점 등지에 ‘쿠첸 체험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쿠첸의 인덕션과 밥솥 등을 사용해 전문 셰프에게 다양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쌀 씻는 법부터 밥솥 관리법까지 배우고 다양한 밥솥으로 지은 밥맛을 비교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요가복 업체 ‘룰루레몬’은 국내 5개 전 매장에서 무료 요가, 필라테스, 러닝 강좌를 운영 중이다. 제품을 구매하지 않더라도 운동복 차림으로 참가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서울 청담동의 ‘카페 드 바디프랜드 청담’에선 고급요리를 즐기며 안마의자를 체험할 수 있다. 최고급 인테리어로 멋을 낸 매장은 브랜드 고급화의 첫걸음이자 상징과도 같다. 레스토랑, 카페, 빵집 등 먹거리 공간과 안마의자, 천연 라텍스 침대, 정수기 등 바디프랜드 제품 전시장을 결합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테이블에 내놓는 모든 음식은 호텔 출신 셰프가 엄선한 유기농 식재료를 사용한다.
동서식품이 서울 이태원에서 운영하는 카페 ‘맥심 플랜트’에선 24가지 블렌딩 커피 중 취향에 맞는 커피 추천은 기본, 전문적인 커피교육도 받을 수 있다. 2018년 4월 문을 연 후 1년 만에 누적 방문객 20만 명을 돌파했다.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흔한 플래그십 스토어에 그칠 수 있었던 맥심플랜트는 이제 이태원의 핫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공간 운영을 통해 약 40여 년이 된 동서식품의 맥심 브랜드도 인스턴트커피란 인식에서 전문성 있는 커피란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맥심은 1968년 설립된 동서식품이 1980년에 국내에 소개한 브랜드다. 미국 제너럴푸즈와 합작사인 동서식품이 미국의 유명 브랜드인 맥심을 들여온 것인데, 현재 미국에선 거의 사용하지 않고 한국과 일본에서만 쓰이고 있다. 맥심플랜트에는 지하에 소규모 로스팅 시설이 있어 직접 볶은 커피로 음료를 만든다. 3층에 마련된 ‘더 리저브(THE RESERVE)’에선 다양한 형태의 스페셜티 커피를 판매하고 있다.
▶해외에선 데이터를 파는 전자매장도 등장해
만약 획기적인 전자제품을 만들어 해외에 있는 고객들에게 팔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판매담당을 비롯해 인력과 마케팅조사,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 매장을 내는 일도 알아봐야 한다. 든든한 자금줄이 없다면 대기업이라도 선뜻 투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를 월간 구독 개념으로 서비스해주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이 있다. 매월 저렴한 비용으로 세계 최고의 고객들에게 스타트업 제품을 판매할 수 있게 해 주는 오프라인 매장 서비스회사 ‘베타(B8TA)’가 그 주인공이다. 2015년 실리콘밸리 한복판인 팰로앨토에 처음 1호점을 낸 베타는 현재 미국 내 24개 매장을 운영할 만큼 성장했다.
베타의 매장은 언뜻 탁자 위에 최신기기들이 진열된 평범한 오프라인 매장 같다. 그런데 이곳엔 판매 직원이 없다. 최신 전자제품을 실컷 만지고 실행해도 뭐라 하는 이가 없다. 심지어 매장에서 구경하고 구입은 온라인몰에서 하라고 권한다. 물건을 팔아주는 것도 아닌데 이곳에 제품을 진열하려는 제조사들은 그야말로 이중 삼중으로 줄을 서있다. 베타는 제조사에 판매수익보다 더 중요한 걸 제공한다. 제품에 대한 주고객층과 그들의 평가 등에 관한 빅데이터가 그것이다. 베타 매장의 천장에는 20여 대 이상의 카메라가 방문객의 움직임을 세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성별, 연령대, 제품에 대한 관심도,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는지는 기본, 이 모든 데이터가 제조사에 전달된다. 제조사가 베타 매장에 입점하려면 매달 소정의 수수료를 내야 하지만 직접 오프라인 매장을 내는 것과 비교하면 절반 이하의 가격이다. 여기에 제조사가 직원을 파견해 제품 설명에 나서지 않아도 베타 직원들이 직접 제품을 학습한 뒤 마치 파견 나온 직원처럼 설명하며 제품에 대한 고객평가를 수집한다. 고객의 입장에선 혁신적인 신제품을 가장 먼저 갖고 놀 수 있는 공간이고, 제조사 입장에선 고객의 니즈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여기에 전통적인 유통업체들도 베타를 유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앞서 밝혔듯 찾는 이들이 많아야 지갑을 여는 이들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시몬스 테라스
▷디지털 시대의 경쟁, 은행지점도 변화에 동참
인터넷 뱅킹 서비스로 방문객이 급격히 줄고 있는 은행도 이러한 매장의 변화에 동참하고 있다. 특히 하나의 앱으로 모든 은행의 계좌를 관리할 수 있는 오픈뱅킹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디지털 부문의 경쟁이 오프라인 지점으로 옮겨가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NH농협은행은 강원도 춘천시에 위치한 강원영업부에 은행과 편의형 마트가 결합된 특화점포인 ‘하나로미니 인 브랜치’ 2호점을 개점했다. 이곳은 금융 서비스뿐만 아니라 주요 생필품과 지역 특산품, 농업인이 생산해 출하한 로컬푸드, 농산물, 축산물 등 신선식품을 구매할 수 있는 상권밀착형 금융 서비스 점포다. 이대훈 농협은행장은 “하나로미니 인 브랜치가 지역의 대표적인 특화점포로 많은 고객들이 찾아주시길 기대한다”며 “향후에도 이런 특화점포를 지속적으로 늘려가겠다”고 강조했다. KB국민은행은 기존 영업점의 1층은 카페, 2층은 대출 상담, 3층은 증권, 4층은 라운지 형태로 리모델링한 서울 서초동종합금융센터를 선보였다. 카페 형태의 1층 디지털존에는 스마트텔러머신(STM), 자동현금인출기(ATM), 공과금자동수납기 등을 배치해 단순 창구업무를 볼 수 있도록 했다. 4층엔 전문적인 금융 세미나와 문화 콘텐츠를 제공하는 ‘스타라운지’, 세무·부동산 등 전문적인 금융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산관리자문센터가 들어섰다. 금융권에서 처음으로 특화점포를 선보인 곳은 우리은행이다. 2016년 3월 서울 동부이촌동에 커피브랜드 ‘폴바셋’과 결합한 ‘카페인브런치’를 오픈했다. 잠실 롯데월드몰에는 크리스피크림 도넛 매장과 베이커리인브랜치를 개점하기도 했다. KEB하나은행의 ‘컬처뱅크’도 대표적인 은행권의 특화점포다. 현재 5호점까지 오픈한 컬처뱅크는 공예, 책, 가드닝 등 다양한 테마를 통해 고객과 소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