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지방공사는 연리 3% 중반에 겨우 자금을 구했다. 기준금리보다 1%포인트나 높고 개인들이 받는 담보대출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그나마도 오래 전부터 거래하던 증권사가 있었기에 겨우 채권을 팔 수 있었다. 연줄이 없었다면 아예 채권을 넘기지도 못할 뻔했다. 건설사들의 사정은 지금 훨씬 더 힘들다. A등급 이상을 유지하고 있더라도 채권을 받아주는 곳이 거의 없다. 10대 그룹에 속한 회사라도 5%대 중반의 금리라도 감지덕지를 해야 할 형편이다. 신용등급이 거의 의미가 없는 상황이다.
#금융감독원의 한 고위 인사는 며칠 전 은행에서 전화를 받았다. 대출을 해줄 테니 필요하면 언제든 오라는 것이었다. 이 인사는 “전혀 모르는 나에게까지 전화해서 돈을 쓰라고 하니 은행에 돈이 얼마나 많이 남아돌기에 그러느냐”며 기자에게 물었다.
A은행의 한 부행장은 조찬 간담회에 나갈 때마다 여기저기 명함 돌리기에 바쁘다. 예금을 유치하려는 게 아니라 돈 쓸 곳 없나 해서다. 은행 임원이라고 사무실에 앉아 찾아오는 손님을 골라 만나던 것은 옛말이다. 요즘엔 좋은 대출거래처를 잘 찾아야 능력을 인정받기 때문이다.
자금시장의 왜곡이 심각하다.
최근 한라그룹의 모기업인 한라는 만기 금리 8.44%에 104억원어치의 전환사채를 발행했다. 일반 채권도 아니고 전환사채를 기준금리의 3배가 훨씬 넘는 고금리에 발행했다. 전환사채는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어 보통 사채에 비해 낮은 금리로 발행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한라는 불가피하게 고금리 발행을 감수했다. 회사 측은 이번 전환사채 발행과 함께 차환용으로 발행한 일반사채의 금리는 9.09%라고 밝혔다.
이 회사는 지난 연말 신용평가에서 BBB등급을 받았고 현대차 최대 협력업체 중 하나인 우량기업 만도를 자회사로 두고 있다. 그렇지만 건설회사라는 굴레를 벗지 못해 정상적 방법으로는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다. 결국 회사는 자금난을 겪는다는 낙인이 찍히는 것을 불사하고 회사채신속인수제에 운명을 맡겼다.
오너가 보유중인 계열사 지분을 무상증여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만도 주식을 은행에 맡기며 일시적으로 자금을 융통하기도 했지만 그 방법 말고는 추가로 만기가 돼 돌아오는 채권을 상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이제는 PF대출도 대부분 회수해 1420억원어치만 남았고 최근 몇 년 동안 관급공사 위주로 수주를 제한해 수익성도 개선하고 있다고 했으나 금융기관의 반응은 차가웠다. 자체적으로 만기가 된 채권의 20%를 상환할 능력도 있었지만 나머지 대출을 연장하려면 그 방법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한라는 이 방법으로 자금을 융통해 한시름 덜었다. 전환사채 발행 이후 이 회사 주가가 지속해서 상승하는 게 이를 말해준다.
지금 건설업에 속한 회사들은 거의 하나같이 자금조달에 애를 먹고 있다. 10대그룹 소속에 신용도가 AA나 되는 회사들까지 고금리를 부담해야 한다. 금융기관들이 신용등급을 떠나 아예 업종 자체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쌍용건설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쌍용건설은 해외 8개국에서 3조원 규모 16개 공사를 진행하고 있고 카타르 도하 지하철 공사 등 2조원 규모의 해외 공사 확보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운영자금을 조달할 길이 막혔다.
비슷한 시기 10대그룹에 속하는 B사의 부도설이 나돌아 대형건설사 전체가 도매금으로 부실기업 취급을 당한 게 치명타가 됐다.
대형사들이 이 정도니 중소 협력업체들은 거의 죽음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당진에선 현대제철 당진공장 고로3기 건설공사를 하던 현대건설 하도급업체 제이산업개발이 지난해 11월 최종 부도처리 돼 이 회사에 각종 물품을 납품하던 지역 상인들이 대금을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은 조선이나 해운업도 마찬가지며 군소 철강사들도 차츰 악화되는 분위기를 느끼고 있다.
최은영 한진해운홀딩스 회장이 한진해운 지분을 포기하고 회사를 시숙 회사인 한진그룹으로 넘기기로 한 것도 자체 신용으로는 더 이상 자금을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진해운홀딩스는 8월까지 회사를 넘기기로 하고 최근 대우증권을 주간사로 선정해 회사 분할합병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엔 성동조선이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었고 STX는 아예 금융권에 운명을 넘겨 최근 강덕수 회장이 완전히 물러난 바 있다.
최근엔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지방파산제를 제기하면서 지방 공기업들까지 자금난에 봉착했다. 한때 지자체 가운데 자금이 가장 풍부하다는 소리를 듣던 용인시 산하의 용인도시공사는 요즘 자금 돌려막기에 바쁘다. 4000억원 상당 부채의 만기가 수시로 돌아오지만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용인시의 지급보증을 받아 겨우겨우 위기를 넘기는 형편이다. 이처럼 서민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건설업이나 공기업을 중심으로 자금사정이 악화되면서 단종면허의 군소건설업체나 건자재 판매상들이 일차 희생양이 됐고 이어 영세상공인이나 자영업자들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지난해 정부가 투자자 보호 명목으로 전자단기사채 제도를 도입해 어음발행이 전년 대비 장수 기준 22%, 금액 기준으로는 13.1%나 줄었지만 부도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4195장이었던 부도어음은 12월엔 5982장으로 급증했다가 올해 1월엔 연초효과로 3488건으로 줄어든 바 있다.
파산이나 회생사건 통계에서도 이런 양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파산사건은 461건으로 2012년의 396건보다 16.4%나 늘었다. 또 개인사업자나 급여자를 대상으로 하는 회생단독사건은 727건에서 830건으로 늘었고 법인을 대상으로 하는 회생합의사건도 803건에서 835건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동안 개인파산 건수는 5만6983건으로 전년(6만1546건)보다 줄었지만 개인회생 신청은 10만5885건으로 전년도(9만368건)보다 17.2%나 증가하며 3년째 증가 추세를 보였다.
이처럼 경제전반에 어두운 그림자가 깔리면서 취업문이 사상 최악으로 좁아지고 있다. 대학들에 따르면 소위 SKY대의 상경계열 졸업생조차 상당수가 제대로 취업을 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민 경제가 오죽 팍팍했으면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한 조찬 강연에서 한국은행을 겨냥해 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에 통화신용정책의 초점을 맞추라고 공개 주문까지 했다.
은행엔 돈이 넘친다
특정 업종의 기업이나 서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시중 자금이 제대로 돌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중의 돈은 어디로 갔을까. 전문가들은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총량 자체는 충분한데 돌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돈이 금융기관과 대기업, 연기금 등에 몰려 있는데 정작 필요한 부분으로는 흐르지 않는 ‘돈맥경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실제로 은행들은 자금이 남아돈다고 걱정을 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대형 시중은행 자금부장은 “지금 유동성은 풍부하다. 대기업은 아주 넉넉하고 중소기업들은 부족할 것이다. 대기업이나 가계와 중소기업이 느끼는 자금사정은 다르다. 선진국 경기가 회복되는 상황이라 주요 대기업들은 그 영향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중소기업 경기는 여전히 둔화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보니 은행에 돈은 넘치는데도 풀 곳이 없다. 요즘 어느 은행이나 지준(지불준비금) 여유는 충분하다. 세상이 바뀌었다. 지금 금융은 수요자 마켓이지 공급자 마켓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 자금부장은 특히 “지금은 예금을 유치하는 게 의미가 없다. 조달은 얼마든지 탄력적으로 할 수 있다. (높은) 금리 줘가며 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 은행에 자금이 넘치다보니 해마다 연초가 되면 쏟아져 나오던 특판 예금상품이 싹 사라졌다. 각 은행들은 지난 연말에 회수한 대출금을 금고에 수북이 쌓아놓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대금리를 줘가며 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시중은행에 자금이 얼마나 넘치는지는 한국은행의 RP(환매조건부채권) 매각이나 통안채 매각을 아주 반긴다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한은이 RP나 통안채를 파는 것은 은행에 놀고 있는 자금을 받아주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2월 17일 실시한 통안증권 매각엔 182일물 7000억원어치를 파는데 2조2000억원의 신청이 몰렸다. 또 1조4000억원어치를 판 91일물 매각에도 2조4200억원의 신청이 들어 왔다. 이에 앞서 2월 13일 RP 매각 때는 14일물 3조원 어치 매각에 3조4000억원, 7일물 12조5000억원 매각에 12조8600억원이 들어왔다. 그 돈으로 기업에 대출을 하면 훨씬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준금리 정도만 주는 한은에 돈을 맡기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다른 시중은행 자금부 부부장은 “지준마감 때마다 일시적으로 자금잉여가 생겨 콜금리가 급격히 내려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은이 RP를 매각하는 게 은행 입장에선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지금 은행으로선 단기 유동성을 굴리는 게 과제다”고 설명했다. 투자를 하지 않고 자금을 쌓아두기는 주요 대기업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 기업보유 현금(M2)은 508조1672억원으로 연간 기준 처음으로 500조원대를 넘어섰다. 특히 전년 동기와 비교할 때 기업보유 현금의 증가율은 8% 전후로 나타나 4% 이하에서 움직인 가계 등 다른 부문의 증가율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국내 자금이 대기업에 쌓이고 있다는 얘기다.
양극화 심각한 수준
이처럼 자금이 편중되면서 심각한 양극화를 부르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의 한 관계자는 “최근 들어 회사채 시장의 양극화가 크게 나타나고 있다”면서 “AA(등급) 이상은 수급이 좋아 (국고채와의) 스프레드가 줄었지만 대조적으로 A 이하는 신용 리스크가 반영돼 스프레드가 크게 늘었다. 수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증시 관계자들은 정부의 공기업 부채관리정책 때문에 공사채가 나오지 않으면서 최근 AA등급 이상의 우량 회사채로 수요가 몰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곧바로 금리로 직접 연결된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1월 중 국채 대비 스프레드(다른 채권과 국채금리와의 차이)는 AAA 특수채가 0.06%, AAA 회사채는 0.09%포인트 줄었다. 또 지난 2월 14일 기준 민평금리(민간채권평가회사 3곳의 금리를 평균한 수치)는 3년 무보증채권 기준으로 AA- 등급이 3.257%, AAA 등급은 3.133% 선에서 형성된 반면에 BBB- 등급은 9.069%까지 치솟아 신용도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BBB- 등급 민평금리가 이 정도라면 신용도가 낮은 회사는 사실상 채권발행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차환발행도 쉽지 않다. 취약업종인 건설이나 조선, 해운 회사들이 이런 식으로 묶여 있어 금리상승을 이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사정은 CD나 CP가 거래되는 단기금융시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시중은행이 발행하는 CD금리는 풍부한 은행의 유동성 상황을 반영해 변함없이 2.65%수준을 장기간 유지하고 있다. 또 A1 등급 CP금리는 91일물 기준 2.75% 수준에서 형성됐다.
반면 같은 91일물에 A2 등급 CP는 3.06%에, A3 등급 CP는 4.99% 수준에서 형성돼 단기상품인데도 금리 차이가 컸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A3 이하는 소화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한 마디로 신용도 높은 곳에만 자금이 몰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최근 채권시장에선 거래 물량이 쑥 줄었다. 한 증권사 채권 담당자는 “지금은 채권시장 뿐 아니라 금융시장 전체의 거래가 안되는 상황이다”고 지적했다. 금융기관에 돈은 많지만 제대로 돌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정부 불신해서 돈 안돌려
자금시장 전문가들은 돈이 돌지 않는 것은 한 마디로 정부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한 증권사 전문가는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 크다. 시장 참여자들이 정부의 색깔을 모르겠다고 한다. 출범 후 처음 6개월은 정부가 어느 곳으로 움직일지 모르니 일단 현금을 쌓아놓고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는데 1년이 지난 지금도 그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동준 하나대투증권 이사는 “지난해 하반기에 불거진 과세 이슈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지금 부자들은 이자 받는 것보다 세금부터 피하자는 주의다. 저축성 상품이나 예금에서 돈 빼내 요구불예금 등 수시입출이 가능한 금융상품에 넣어두거나 아예 현금으로 보관하는 것 같다.
이 외에도 저축성예금이나 금융상품에서 뺀 돈 가운데 상당액을 5만원권으로 찾아 현금으로 쌓아두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골드바를 비롯한 금 쪽으로도 상당한 자금이 빠져나갔다. 한 마디로 화폐퇴장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부자들이 절세나 비과세 등 세제형 상품에 넣어두기도 하지만 대기업 오너들은 아예 세금을 피하려고 배당도 하지 않고 회사에 쌓아두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사내유보가 500조원이 넘은 게 이를 단적으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은행이나 거액자산가와 대기업들이 이처럼 돈을 재워놓고 있다보니 돈의 유통속도가 뚝 떨어졌다. 게다가 정부의 통화공급에도 불구하고 화폐퇴장 현상까지 나타날 정도여서 바닥권의 자금사정은 갈수록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신동준 하나대투증권 이사는 “감독당국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최근 개인 대출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데 대부분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의 생계형 대출이다. 대출받아 생활비로 쓰거나 공장 돌리고 있다는 얘기다”고 설명했다.
3월 말 이후 대출 축소 가능성
진짜 문제는 정부와 금융권이 지금 상황을 계속 방치할 경우 경기 위축 기간이 길어져 정상적인 기업들까지 부실기업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금융기관들은 최근 들어 중견이하 기업에 대해선 대출은 물론이고 회사채 인수도 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 한 시중은행의 대출 책임자는 “벤더 중에도 삼성전자나 현대차 협력업체처럼 업황이 좋은 업체는 좋고 나머지 중견이하 기업을 거래하는 업체들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업황이 나쁜 업체 중에는 매출이 감소하는 곳도 적지 않다. 3월 말 결산이 끝나면 매출이 줄어드는 곳이 나올 것이다. 은행은 이를 기준으로 대출을 계속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기업이 성장해야 은행도 여신할 게 늘어나는데 기업이 위축되는 상황이니 은행의 여신도 줄어든다. 이것이 은행의 실적에 반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은행의 자금 담당자는 “계절적으로 연초에는 자금 잉여가 많고 3월 이후에 대출이 늘어난다. 3월까지는 신용조사를 하는 게 일반적이기에 그 이후에나 늘어날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번 결산에서 매출이 줄어들거나 수익성이 악화된 기업들은 더욱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5만원권 화폐퇴장의 주범?
시중 자금이 어디로 흘러가느냐에 대한 추측은 많지만 이를 정확히 추적하기는 쉽지 않다. 일부에서는 5만원권 수요가 급증한 것을 토대로 시중 자금이 지하경제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실제 지난 2011년 4월 110억원 상당의 거액을 5만원권 다발로 마늘밭에 숨겼던 사건이 드러나 전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5만원권 환수율은 발행 첫해인 2009년 7.3%를 기록한 후 2010년 41.4%, 2011년 59.7%, 2012년 61.7%으로 꾸준히 상승했다. 그런데 2013년에는 48.6%로 처음으로 환수율이 하락했다. 한은이 찍어낸 5만원권이 과거보다 훨씬 적은 규모가 회수되었다는 것이다.
2013년에는 5만원권 화폐발행 잔액과 1만원권 화폐발행 잔액이 각각 7조9147억원과 9121억원씩 늘어났다. 5만원권의 경우 2011년이나 2012년도보다 1조원가량 더 발행됐고 1만원권은 5만원권 발행 이후 처음으로 순증했다. 이 같은 통계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시중에서 현찰을 보유하고자 하는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한 한국은행 관계자는 “5만원권 환수율이 하락한 것은 지하경제로 자금이 흘러 들어갔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지만 시장에서 현금수요가 크게 높아진 것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일상생활에서 카드 사용이 늘어나면서 현금으로 결제하는 경우가 줄어드는데 반해 국내 현금수요가 높아진 것은 지하경제로 자금이 흘러가는 반증이라고 제기하고 있다. 현찰 사용액에 대해서는 자금추적이 어렵기 때문이다.
시중자금에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특징은 단기부동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3년 말 기준 예금은행들의 정기예금 잔액은 558조8983억원으로 2012년보다 16조8084억원이 줄어들었다. 이는 2005년 이후 8년 만에 처음이다. 반면 요구불예금과 저축예금은 각각 10조4734억원, 18조849억원이 늘어났다.
전문가들은 자금이 1년 이상 묶이는 정기예금보다 언제든 입출금이 가능한 요구불예금이 크게 늘어난 것은 저금리 효과와 세금기피 현상으로 보고 있다.
낮은 금리로 유동성이 묶이는 것보다 약간의 금리 손해를 감수하고 요구불예금으로 돈을 이동하거나 금융소득종합과세에 해당돼 자칫 높은 세금을 추징당하느니 아예 당분간 쉬자는 것이다. - 이덕주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