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14일. 싱가포르 중앙은행인 싱가포르통화청(MAS)이 깜짝 발표를 했다. MAS는 이날 반기 정책보고서를 통해 경기과열과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 싱가포르 달러의 환율 변동폭을 확대하고 점진적 통화절상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MAS의 발표는 전 세계적인 달러 가치 급락으로 이어졌다. 이날 달러는 9개월 만에 최저치를 찍었다.
MAS의 발표가 전 세계 외환시장을 뒤흔든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아직 글로벌 금융위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싱가포르 등 아시아 신흥국은 경기과열을 걱정할 정도로 고성장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차이를 메우는 방법이 달러화의 추가적인 약세라는 논리가 시장에 먹혀든 것이다.
싱가포르 제2의 위안화 거래 허브 포부
지난 4월 싱가포르는 다시 한 번 세계 금융시장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4월24일 중국의 <신화통신>은 고촉통(吳作棟) 싱가포르 통화감독청 의장의 말을 인용해 중국 인민은행이 중국 본토의 싱가포르 지점에 위안화 무역결제 업무를 허용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전 싱가포르 총리이기도 한 고 의장은 “싱가포르도 이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싱가포르에서 역외거래 업무가 가능해진다. 싱가포르에 위치한 금융기관들이 중국이나 홍콩을 거치지 않고 직접 무역대금 등을 위안화로 거래하고 위안화 표시 예금이나 주식·채권 등을 취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싱가포르가 홍콩에 이어 제2의 위안화 거래 허브가 되겠다는 포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사실 싱가포르는 국제 외환시장에서 민첩한 행동으로 유명한 나라다. 지난 1971년 미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했을 때 싱가포르는 역내에서 달러를 환전할 수 있도록 외환거래 시스템을 한발 앞서 개편했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지난 1997년에도 마찬가지였다. 홍콩을 떠나는 자본을 대거 유치해 아시아 자산운용시장을 주도하는 국가로 거듭났다.
능수능란한 환율정책만큼 싱가포르의 환율시스템도 유연하고 실리(實利) 중심이다. 싱가포르는 관리변동환율제의 일환인 BBC(Basket, Band and Crawl)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지난 1970년대만 하더라도 달러페그제를 채택했다. 하지만 소규모 개방경제인 싱가포르가 미국 경제 변화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현상이 반복되자 1980년대 달러페그제를 포기했다. 그리고 주요 교역국 통화바스켓에 연동되는 BCC제도를 도입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싱가포르에서만 운용 중이다.
BBC의 핵심 개념은 자국과 거래가 많은 여러 나라의 통화를 ‘바스켓(Basket)’으로 구성해 자국 통화의 환율을 정하되 환율 변동의 ‘범위(Band)’를 정해 관리해 나간다는 것이다. 당연히 미국 달러화도 바스켓에 포함된다. 여기에 유연성을 강화하기 위해 바스켓 통화 국가의 경제 펀더멘털의 변화에 맞게 자국 통화의 환율을 점진적으로 ‘조정(Crawl)’하는 기능이 추가된다.
바스켓 제도의 장점은 환율의 유연성을 보장해 세계적인 추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단기적인 환율 급변동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환율 결정의 주도권을 해당국 정부가 거머쥘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싱가포르는 교역 패턴의 변화와 미국 등 주요 교역국의 통화가치 변화 등을 고려해 주기적으로 환율변동폭을 수정하고 있다. 이론상 실효환율(NEER)에 맞춰가는 모양새지만 시장 참여자로서는 당연히 환율변동의 범위와 방향을 제시하는 싱가포르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국제 금융시장의 여우, 싱가포르
이런 싱가포르가 이번에 중국 위안화의 거래 허브를 자처하고 나섰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미국 달러화에 깊숙이 한 발을 담그고 있던 상황에서 또 다른 한 발을 떠오르는 신흥스타인 중국 위안화에도 담근 셈이 됐기 때문이다. 국제 금융시장의 ‘여우’라고 불릴 정도로 영리한 행보였다.
실제로 중국 위안화의 위세는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지난 1분기 국제 무역결제에서 위안화 결제 규모는 2603억 위안으로 전체의 7%를 차지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184억 위안에서 20배 증가한 수치다.
중국 위안화의 거침없는 부상은 달러화의 추락과 겹쳐 보이는 현상이다. 움직임과 방향이 워낙 꾸준하다보니 사람들이 흔히 잊고 사는 오버랩이기도 하다. 하지만 달러 약세는 세계경제를 그 뿌리부터 변화시키고 있다.
세계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의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는 최근 73포인트대로 추락해 2년8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기축통화로서 달러화의 위기는 확고한 추세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른바 양적 완화 정책을 통해 미국 경제는 차츰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달러화의 위상은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다. 미국 정부가 국채를 찍어 달러화를 대규모로 방출시킴으로써 달러 약세 구조를 고착화시킨 탓이다. 결국 주범은 미국의 재정 악화와 무리한 경기부양대책(저금리와 달러의 대규모 방출)이다.
지난 5월9일(현지시간) 영국계 대형 은행인 HSBC는 보고서를 통해 시장에서 대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미국 재정에 대한 우려와 초저금리 예상이 바뀌지 않은 한 달러 약세가 지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간간히 일시적인 회복은 가능하겠지만 지속적인 가치 회복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미국 통화당국이 상황 변화의 열쇠를 갖고 있는 셈이지만 쉽사리 그 열쇠를 사용할 것 같지는 않다. 미국 입장에서 달러가치 약세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달러를 마구 찍어내면 미국 내 경기 하락을 막을 수 있을 뿐더러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글로벌 임밸런스(불균형)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풍부한 달러가 달러가치를 떨어뜨리고, 이것이 미국 제품의 수출 가격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달러가치 하락은 중국, 인도, 한국 등 주요 신흥국가의 외환보유가 가치를 하락시켜 글로벌 임밸런스를 완화시키는 또 다른 카드가 될 수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가치 있는 선택인 셈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백척간두에 서 있는 미국이 위기 후 더욱 나가고 있는 신흥국들의 사정을 앞장서 봐줄 처지도 아니다.
결국 한국을 비롯한 신흥국으로서는 싫든 좋든 ‘달러화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할 시점이 됐다. 가만히 있다가는 앉아서 당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달러가치가 떨어지고 위안화 가치가 올라가면서 2003년 이후 중국이 외환보유고에서 발생한 환차손은 무려 2711억 달러에 달한다.
한국 돈으로 치면 300조원 가까운 돈이다. 외환보유고의 보험기능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3조 달러로 세계 1위 규모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의 외환보유고가 사실은 국부를 까먹는 애물단지였던 셈이다. 위안화 역외거래의 허브를 자처하고 나선 싱가포르의 발 빠른 움직임도 이런 고민의 산물이다.
한국도 달러 스탠더드 변화에 대비해야
국내 한 은행의 외환딜링룸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싱가포르의 스마트(smart)한 환율정책은 금융개방도와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에는 훌륭한 모델케이스가 될 수 있다. 정덕구 니어(NEAR)재단 이사장은 “중국 정부가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업그레이드시키기를 희망하고 있지만 단기간에 이뤄내겠다는 의도는 없다”며 “중장기적인 정책목표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아시아에서 통용됐던 ‘달러 스탠더드(Dollar standard)’에 변화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며 “한국도 다른 신흥국들과 함께 이에 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다수 신흥국들의 외환보유고는 그 60~70%가 달러화 자산으로 채워져 있다. 달러 약세에 대한 대응책 마련은 이들 신흥국들에는 막대한 국익이 달린 당면과제다.
한국은 지난 4월 말로 3072억 달러를 기록, 외환보유고 3000억 달러 시대를 열었다. 이 또한 달러 약세가 큰 역할을 했다. 달러가치가 떨어지면서 유로화, 파운드화 등 비달러화 자산의 가치가 한 달 새 4%나 뛰어올라 달러로 환산한 외환보유액이 크게 늘어났다.
참고로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세계 7위 수준이다. 2위인 일본(1조1160달러)을 제외하면 중국(3조447억 달러)을 비롯한 러시아(5025억 달러), 대만(3926억 달러), 브라질(3171억 달러), 인도(3035억 달러) 등이 상위 1~7위를 휩쓸고 있다.
외환보유액이 넘쳐나는 신흥국의 선택은 대개 두 가지다. 우선 첫째로 달러화 가치가 떨어지는 추세라면 비중을 줄이는 것이다. 최근 들어 급부상하고 있는 대안은 역시 중국 위안화다. 한국은행과 한국의 국부펀드인 한국투자공사(KIC)도 최근 중국의 주식·채권에 직접 투자할 수 있는 중국 내 적격 외국인투자 자격(QFII)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 주식·채권에 대한 본격적인 투자를 준비 중이라는 방증이다.
외환보유고의 안정성을 높이는 또 다른 방법은 국부펀드 등을 활용해 투자대상을 넓히는 것이다. 그러나 1997년에 이어 2008년에도 외환부문에서 위기를 겪었던 한국인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정부 측의 설명이다.
최종구 기획재정부 대외차관보는 “외환보유액 유지를 위한 운용경비는 국방비와 같다”면서도 “외환보유액이 현재 적정한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 차관보는 그러나 “국부펀드에 투입을 더 할지 여부를 검토할 시기가 온 것은 맞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최 차관보는 특히 국부펀드 운영과 관련해 “싱가포르투자청(GIC)이나 중국투자공사(CIC)처럼 자원개발 비중을 높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해외자원 개발을 확대하면 외환보유액 유지비를 줄이면서 수익을 높일 수 있으며, 개발도상국과의 교류 확대라는 ‘덤’까지 기대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제까지 한국 또는 한국 경제를 놓고 달러 약세의 대응책을 얘기해왔다. 하지만 개인 차원에서도 달러 약세는 엄청난 변화를 예고한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고 먹어왔던 공기나 물이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건국 이후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달러화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화폐로서 존재해 왔다. 이런 달러화가 약세를 지속한다면 재테크 환경도 통째로 뒤바뀔 수밖에 없다.
재테크 차원에서 달러 약세의 영향은 처한 입장에 따라 각양각색일 것이다. 섣불리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예컨대 미국으로의 수출 증대가 재테크에 도움이 되는 주식투자자라면 달러 약세는 어두운 소식이다. 하지만 중국 등 신흥국으로의 수출 증대가 도움이 되는 경우라면 달러 약세가 희소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신흥국 화폐의 구매력이 높아져 내수시장이 탄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 미국보다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신흥국 경제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다. 미국 달러화가 약세를 보일 때 국내 주가가 올랐다는 통계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달러 약세는 한국 주가뿐 아니라 미국 주가 상승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달러 약세가 미국의 수출을 늘려 경상수지 적자를 줄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경제현상은 결국 ‘균형(equilibrium)’으로 향하는 여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