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고 있다. 그 옆에선 여자가 사이클을 타며 운동하고 있다. 전형적인 헬스클럽의 모습인 것 같지만 그곳은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2012’에 마련된 모토로라의 전시장이다.
구글이 모토로라를 인수한 후 혁신적인 스마트 기기를 내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관람객들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모토로라는 새 기기를 내놓지 않았고 전시장의 대부분을 스마트 기기를 통해 활용할 수 있는 서비스와 솔루션으로 채웠다.
지난 2월27일부터 나흘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모바일 전시회 MWC 2012는 모바일 시장의 패러다임 변화를 확실하게 보여줬다.
모바일 패러다임이 바뀌다
스마트폰이 진화가 거듭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 행사에서는 감성, 솔루션, 패블릿(phablet), 쿼드코어가 새 키워드로 떠올랐다.
먼저 스마트폰에 감성과 특화 기능을 담는 것이 중요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기술 경쟁에 열광하지 않는다.
어떤 스마트폰이 더 빠른지, 어떤 화면이 더 밝은지 따지기보다는 ‘내가 기기를 어디에 활용할 수 있느냐’가 관심사가 됐다.
이런 추세를 반영한 감성을 담은 스마트폰은 지난해 10월 출시된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가 대표적. 출시 5개월 만에 글로벌 200만대 판매를 돌파한 갤럭시노트의 인기는 필기할 수 있는 특화 기능과 스마트폰 중에 가장 큰 5.3인치 화면 덕분이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제품에 소비자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번 행사에서 갤럭시노트의 두 번째 버전인 10.1인치 제품도 선보였다.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은 “스마트 기기 분야에서 아날로그 감성이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며 “S펜(갤럭시노트 전용 펜)을 이용해 화면에 직접 ‘쓰는’ 동작을 통해 감성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갤럭시 노트 시리즈가 차세대 주력 제품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전자는 벽이나 천장에 50인치 화면을 만들 수 있는 프로젝터폰 ‘갤럭시빔’도 내놨다. 혼자서 쓰는 기기라는 스마트폰의 개념을 가족, 친구와 함께 즐기는 것으로 확장시킨 제품이다.
LG전자 역시 손필기 기능을 갖춘 옵티머스뷰를 처음으로 소개했다. 특화 기능으로는 카메라에 방점이 찍혔다. HTC는 카메라 기능에 초점을 맞춘 스마트폰 ‘원’ 시리즈를 소개했고 노키아는 ‘카메라에 휴대폰을 달았다’고 평가 받는 4100만 화소 스마트폰을 내놓기도 했다.
결제, 헬스케어, 에듀테인먼트, M2M(Machine to Machine) 등 ‘솔루션’이 전시장을 채운 행사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던 모토로라 부스가 이런 트렌드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모토로라 부스는 단말 제조사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 즉 소프트웨어 중심의 길을 보여줬다고 평가받았다.
솔루션에 무게를 두는 모습은 단말 제조사, 통신사, 인터넷기업을 구분하지 않은 빅 트렌드였다. 일본 통신사 NTT도코모는 한국과 일본에서 하나의 스마트폰으로 모바일 결제를 할 수 있는 ‘NFC(근거리무선통신) 결제 로밍’서비스를 시연했고 스마트폰에 부착된 센서로 날씨, 환경 정보 등을 파악해 보여주는 M2M 서비스로 시선을 모았다. 삼성전자의 디지털교과서 플랫폼 ‘러닝 허브’와 노키아의 전자책서비스 ‘리딩’도 처음 공개됐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패블릿(Smartphone+Tablet)이라는 새로운 제품 카테고리가 부각됐다.
패블릿은 스마트폰의 화면이 5인치 이상으로 커져 스마트폰의 커뮤니케이션 기능과 함께 태블릿PC의 엔터테인먼트, 에듀케이션 기능 등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제품 콘셉트이다.
대표 제품으로 5.3인치 갤럭시노트와 5인치 옵티머스뷰가 있고 삼성전자가 발표한 갤럭시노트10.1은 스마트폰에서 태블릿으로 진화한 대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과거 팬택이 내놨던 베가넘버파이브와 델의 델 스트릭 등도 패블릿으로 분류된다.
MWC 2012에서 스마트폰의 머리는 4개로 진화했다. 쿼드코어 스마트폰이 등장한 것. 코어는 스마트폰의 머리에 해당되는 것으로, 쿼드코어는 머리가 4개라는 의미다.
그동안에는 머리가 2개인 듀얼코어가 시장의 대세였는데 2배로 늘어났다. 머리 4개가 일을 나눠 한다는 개념으로 멀티태스킹 상황에서 속도가 빨라진다. LG전자, 화웨이, HTC 등 삼성전자와 노키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제조사가 쿼드코어 스마트폰과 태블릿PC를 내놨다.
박종석 LG전자 부사장은 “듀얼코어가 나왔을 때 싱글코어는 시장에서 급격히 사라졌다”며 “쿼드코어도 곧 대세로 자리 잡을 것”이라며 시장 변화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지난 2011년 듀얼코어가 등장한 후 1년 만에 쿼드코어가 나온 만큼 머리 6개의 ‘헥사코어’, 8개인 ‘옥토코어’로의 진화도 머지않은 것으로 보인다.
모바일 산업 트렌드 3C
MWC2012에서는 커넥티드(Connected), 컴바인(Combine), 차이나(China) 등 모바일 산업의 트렌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1월 ‘소비자가전쇼(CES) 2012’에서도 화두로 등장했던 커넥티드(연결)가 다시 한 번 강조됐다. 커넥티드는 모든 서비스와 기기, 산업이 인터넷으로 연결된다는 의미다.
행사 주최 측인 GSMA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커넥티드 이코노미의 부가가치는 지난해 1조5000억 달러(약 1676조원)에서 4년 후인 2015년에는 1조90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개발도상국의 경우 국민의 10%가 이동통신을 통해 연결되면, 그것을 통해 생겨나는 서비스, 산업, 소비 패턴 변화 등의 힘을 얻어 GDP가 0.81%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조연설에 나선 윌리엄 클레이 포드 주니어 포드 CEO는 “커넥티드가 성장 정체에 직면한 자동차업계에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커넥티드 트렌드는 글로벌 기업의 거의 모든 부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포드와 함께 금융 분야에서는 시티그룹과 비자카드, 전자상거래 기업 이베이, 유통기업 베스트바이 등 비모바일 분야 CEO가 대거 기조연설에 나선 것도 커넥티드의 확산을 보여줬다.
두 번째 트렌드는 컴바인으로 평소 경쟁 관계에 있던 기업들이 같은 목표 아래 모여 손을 잡은 사례가 많았다. 그만큼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MWC에서 드러난 가장 주목되는 사례는 AT&T, 버라이즌, 보다폰과 KT, LG유플러스 등 전 세계 18개 통신사들이 모여 만든 RCS(Rich Communication Service) 연합이다.
RCS는 음성통화를 하면서 동시에 영상, 파일 등을 주고받고 실시간으로 상대방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등 풍부한 사용자 경험을 하게 해주는 서비스다.
전 세계 주요 통신사들이 모인 이유는 스카이프, 바이브, 카카오톡 등 OTT(Over The Top)들의 성장세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OTT들은 통신사의 네트워크를 공짜로 쓰면서 통신사들의 이익을 잠식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한 강력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통신사들이 뭉친 것이다.
이번 MWC2012에서 통신사들은 조인(joyn)이라는 RCS 브랜드를 론칭했고 스페인에서 가장 먼저 상용화될 예정이다. 국내에서는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통신3사가 손잡고 오는 7월 서비스를 시작한다.
MWC에서 눈에 띈 또 다른 협력의 사례로는 페이스북과 통신사, 제조사가 모바일 브라우저 표준화에 나선 것. 이들은 모바일 서비스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모바일 브라우저가 호환돼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반면 ‘동지’를 모으는 데 실패한 기업들도 나타났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iOS(애플)와 안드로이드(구글)로 굳혀진 모바일 운영체제(OS) 시장 구도를 깨겠다며 윈도8로 모바일 시장에 도전했지만 MWC 행사장에서 MS의 존재감은 찾을 수 없었다.
이미 제조사와 OS의 콤비가 고착화되면서 MS가 끼어들 틈이 없어진 것이다.
인텔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모바일 시장에서 칩 제조사로 영역을 넓히고 싶지만 삼성전자, LG전자 등은 인텔칩을 채택하지 않았다. MWC2012에서는 몇 년 전부터 전 세계 IT산업의 화두였던 클라우드(cloud)가 다시 한 번 강조됐다. 콘텐츠를 인터넷상에 올려놓고 PC나 스마트폰, 태블릿PC, TV에서까지 이어서 이용할 수 있는 클라우드는 거의 모든 사업자들이 내놨거나 구상하고 있다.
구글은 PC에서 검색하다가 휴대폰으로 옮겨와서도 PC에서 검색한 페이지를 볼 수 있고 모바일에서 백(back) 버튼을 누르면 PC에서 봤던 앞 페이지가 나오는 등 완벽하게 클라우드 서비스를 구현한 크롬 모바일 브라우저를 시연했다.
4C 중 마지막은 차이나(China)다. MWC에서 중국은 확실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중국 통신장비 및 휴대폰 제조상인 ZTE와 화웨이가 LG전자와 나란히 세계 최초로 쿼드코어 스마트폰을 출품했다. 특히 화웨이는 엔비디아의 쿼드코어 칩(AP) 대신 자체 개발한 칩을 탑재해 주목 받았다. 화웨이가 쿼드코어 칩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경쟁사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은 “중국 기업들은 우리의 10년 전과 같은 수준이고 금방 기술 격차를 극복할 것”라며 “경쟁사가 베낄까봐 차세대 플래그십 제품인 갤럭시S3를 전시하지 않았다”고 발언했다.
실제 ZTE는 전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분기 기준으로 LG전자를 60만대 차이로 바짝 추격하며 5위를 유지하고 있다.
MWC2012는 모바일과 IT산업의 트렌드를 반영하며 관련 업계 종사자와 소비자들에게 많은 정보를 줬지만 올해도 한계는 여전했다. 구글과 함께 스마트폰 OS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모바일 시장의 ‘거인’ 애플이 참여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시장의 반쪽만 보여준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한 전문가는 “애플은 MWC에서 ‘방안의 코끼리’라고 불린다”며 “방안에 코끼리가 있으면 다루기 어렵기 때문에 알면서도 무시하거나 그냥 넘어간다는 뜻으로 애플을 의식적으로 배제한 채로 모바일 시장에 대한 논의를 하는 MWC를 비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MWC는 26회째로 세계 220여개국에서 총 1400여개 기업이 참여했고 총 7만명이 관람했다. 지난해 MWC 2011에 비해 관람객이 5000명가량 늘어나 모바일 산업에 대한 관심을 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