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펀더멘털이 반영될 수 있도록 보다 시장 결정적인 환율제도로 이행한다(Move towards more market determined exchange rate systems that reflect underlying economic fundamentals).”
지난 10월23일 발표된 G20 경주 재무장관 중앙은행총재회의 코뮤니케(합의문)의 핵심 내용이다. 대다수 언론은 ‘시장 결정적 환율(market determined exchange rate)’이란 말에 주목했다. 문자 그대로 시장에서 결정되는 환율을 존중해주자는 취지로 이해됐다. 기존에 G20에서 써왔던 ‘시장 지향적(market oriented)’이라는 표현보다 시장의 역할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과연 그럴까. 그 뒤에 국제무대에서 벌어진 ‘환율전쟁’의 양상을 지켜보면 ‘시장에서 결정되는 환율을 존중해주자’는 해석은 미흡한 구석이 많다. 심지어 G20 국가들이 내놓은 환율 합의의 숨은 의미를 정반대로 이해해버린 측면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장(market)이라는 말보다는 그 뒤에 덧붙여진 펀더멘털에 더 큰 의미가 있다. 핵심키워드는 시장 결정적이란 말이 아니라 ‘펀더멘털’이다.
펀더멘털이란 한 나라의 경제가 얼마나 튼튼한지 나타내는 기초체력을 의미한다. 경제 성장률(GDP), 고용, 경상수지, 재정 상태, 물가 상승률 등이 펀더멘털을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경제지표들이다.
핵심키워드는 시장 결정적이 아니라 펀더멘털
지난 10월 G20 경주 재무장관회의에 참석한 각국 재무차관들.
이 ‘펀더멘털’이라는 말에 유의하면서 국제경제를 들여다보면 복잡하게 굴러가는 세계경제 현안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G20 국가들이 경주 재무장관회의에서 시장 결정적 환율 시스템에 합의한 직후부터 각국은 마치 경쟁하듯이 외환시장 개입을 시사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G20 경주 재무장관회의 코뮤니케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외환시장 개입 가능성을 강조한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재무상이 대표적이다. 그는 엔화 환율 1달러당 80엔이 붕괴 위기에 몰리자 같은 달 26일 “필요할 경우 시장에서 단호하게 행동할 준비가 돼있다”고 엄포를 놨다. 마크 카니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도 같은 날 “캐나다 경제가 환율 때문에 심각한 위험에 빠진다면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태국, 말레이시아 등 신흥국들은 잇달아 미국 등 선진국으로부터의 외화 유입 차단 조치를 시사하고 나섰다. 얼핏 보면 모두 ‘시장 결정적 환율’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움직임들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국내외 일부 언론들은 “환율전쟁을 막기 위한 G20 경주 합의에 균열이 생긴 것 아니냐”고 의문을 표시했다. 글로벌 공조의 틀이 깨지면서 환율전쟁이 재점화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급기야 11월3일(현지시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경기 부양을 위해 6000억 달러 규모의 2차 양적 완화 계획을 발표하자 전 세계는 그야말로 부글부글 끓었다. 특히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추이톈카이(崔天凱)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미국에 양적 완화 조치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 데 이어 주광야오(朱光耀) 재정부 부부장은 “미국이 취한 2차 양적 완화 정책은 주요 화폐 발행국이 짊어져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지나친 유동성이 신흥국에 가할 충격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독일과 브라질도 강력 반발했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11월8일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FRB의 추가 양적 완화가 선진-신흥국 간 불균형을 강화하고, 환율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쇼이블레 장관은 “미국의 양적 완화는 중국의 환율 조작을 비난하면서도 (양적 완화 조치를 통해) 달러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추는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행동”이라고 비꼬았다.
귀도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은 “헬리콥터에서 달러를 뿌리는 것은 아무 쓸모없는 짓”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양적 완화란 중앙은행이 정책금리를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지경에 빠졌을 때 채권을 사들여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막다른 길에 몰린 중앙은행이 돈을 뿌려 경기를 살리는 조치다.
자산 가격 측면에서 이 같은 양적 완화 조치는 한국을 비롯한 신흥국 내의 자산 가격 거품을 야기할 수 있다. 미국 경기를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풀려나간 달러화가 미국에는 머물지 않고, 상대적으로 경제 상태가 양호한 신흥국으로 몰려들기 때문이다.
특히 환율 측면에서는 달러화가 어마어마하게 풀려나감으로써 달러값이 떨어지고, 각국의 통화가치가 상대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미국 FRB는 2008년 가을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조7000억 달러 규모의 채권을 매입하는 1차 양적 완화 조치를 실행에 옮긴 바 있다. 이날 발표된 조치는 2차 양적 완화에 해당하는데, 이 또한 시장 결정적 환율 시스템이라는 관점에서는 핀트에 어긋나는 조치로 비춰질 수 있다.
이쯤해서 앞서 펀더멘털 얘기로 되돌아가보자. ‘시장 결정적’이란 말 대신 ‘펀더멘털’에 주안점을 두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변동환율제를 채택한 외환시장들의 대부분은 실수요보다는 가수요, 즉 투기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서울 외환시장을 비롯해 전체 외환 거래의 90% 이상을 투기적 거래가 차지하고 있다. 위기나 충격이 가해진 시점에서는 투기자본의 영향력은 더욱 커진다. 다소 극단적이지만 G20 경주 재무장관회의 코뮤니케에서 거론한 ‘시장 결정적 환율’은 투기세력에 의해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펀더멘털이 반영된 시장 결정적인 환율’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각 나라의 경제 펀더멘털을 보여주는 경제 성장률, 고용, 경상수지, 물가 상승률 등이 시장환율에 반영된다면 과거와는 전혀 다른 환율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공통의 기준을 갖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
6000억 달러의 양적 완화 조치로 전 세계에서 욕을 얻어먹은 미국의 예를 들어보자. 2008년 9월 이후 여실히 드러난 미국 경제의 허약한 펀더멘털을 감안하면 ‘달러화 약세’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미국의 경우, 경기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으면서 심각한 고용 문제에 허덕이고 있다. 실업률은 여전히 9.6% 수준이다. 게다가 재정 상태는 무지막지한 돈 풀기(양적 완화) 정책으로 엉망이 된 상태다. 달러화가 기축통화가 아니었다면 견디기 힘든 수준에 이른 지 오래다.
일본도 저성장과 재정 적자로 펀더멘털이 엉망이긴 마찬가지다. 재정 적자의 누적으로 일본 정부 부채가 국민총생산액의 200%를 넘어선 지 오래다.
펀더멘털의 잣대를 상당수 국가들이 추진 중인 외화 유출입 규제에 들이대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일부 유럽 국가들은 사실상 은행세를 도입하는 방안을 준비 중이고, 브라질은 외국 자본의 주식·채권투자에 과세하는 시스템을 시행 중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정부는 외국인 채권투자에 대해 이자소득세 원천징수를 부활하는 방안을 포함한 외화 유출입 규제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선진국에서 풀려나온 돈의 영향을 받아 원화 강세 속도가 더 빨라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 입장에서 선진국의 양적 완화 정책 때문에 원화값이 오르는 현상은 ‘펀더멘털이 반영된 시장 결정적인 환율’이라고 볼 수 없다. 물론 상대적으로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양호하기 때문에 외국인 자본이 몰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다면 적절한 규제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펀더멘털이 반영된 시장 결정적인 환율’에 부합하는 조치로 이해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환율과 관련해 전 세계가 공통의 기준을 갖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가 간 이해관계가 맞붙는 환율전쟁은 영원히 종식될 수 없을 것이다.
11월11~12일 열린 서울 G20정상회의에서도 환율이 각국의 펀더멘털을 반영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유지됐다. 펀더멘털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변수인 경상수지를 적절히 조정하기 위해 조기경보 시스템을 두고, 그것에 대한 이행 일정표(Timeline)를 마련하는 쪽으로 논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를 환율전쟁의 종식으로 부르기에는 너무 섣부르다. 공통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잠시 ‘휴전 상태’에 접어들었을 뿐이다.
사실 자국 통화 가치를 낮추기 위한 환율전쟁은 경제위기 때마다 되풀이됐다. 수출 가격 경쟁력을 인위적으로 높여줌으로써 경기 회복의 발판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환율전쟁에서 밀려나 자국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입 물가는 올라가고 수출 경쟁력은 뚝 떨어진다.
환율전쟁 기원은 1930년대 대공황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금본위제를 포기한 영국과 미국 통화는 프랑스와 같이 금본위제를 따르는 국가들에 비해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결국 1936년 미국, 영국, 프랑스는 통화 안정을 위한 ‘3자간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 합의체가 오늘날 국제통화기금(IMF)의 시초가 됐다.
1985년에는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5개국 중앙은행 총재가 만나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 절상을 유도하는 플라자합의를 이끌어냈다. 무역수지 적자를 줄이기 위한 미국의 압력이 힘을 발휘한 결과였다. 플라자합의에 따른 엔화 가치 급등은 거품 붕괴로 이어져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겪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95년에는 G7 회의에서 거꾸로 엔저 유도에 합의함으로써 플라자합의와 반대되는 ‘역플라자합의‘를 발표하기도 했다.
환율전쟁을 뿌리 뽑는 게 꼭 필요하다면 세계가 일제히 변동환율제를 버리고 고정환율제를 채택하는 수밖에 없다. 변동환율제에 익숙한 사람들은 고정환율제로의 전환이 황당무계한 SF소설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정환율제의 이상은 유로(Euro)화 통용으로 현실화한 지 오래다. 유로화는 현재 16개국에서 단일통화로 사용되고 있다. 당연히 단일통화를 쓰는 유로존에서는 환율변동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로버트 먼델 교수는 "과도한 환율 변동이 허용되는 한 자유무역은 의미가 없으며 자유무역협정은 파기될 뿐"이라고 일갈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유로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먼델(Robert Mundell)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과도한 환율 변동이 허용되는 한 자유무역은 의미가 없으며 자유무역협정은 파기될 뿐”이라고 일갈한다.
먼델 교수는 세계 외환 거래량이 4조 달러을 넘어선 것은 국제 통화 질서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라며 세계 각국의 통화가 금본위의 브레턴우즈체제처럼 고정될 필요가 있다고 충고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급격한 경기 변동에 따른 경제위기의 씨앗을 품고 있는 한, 그리고 세계 각국이 변동환율제를 유지하는 한, 환율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승자와 패자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