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보복소비’를 타고 급성장한 글로벌 명품업계의 위기감이 본격화되고 있다. 전 세계 거시경제 부진 우려가 기저에 깔린 가운데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들이 가장 먼저 명품업계를 외면할 것이란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컨설팅기업 베인앤드컴퍼니에 따르면 세계 고급 패션 브랜드 시장의 2023년도 매출액은 3620억유로, 한화 약 510조원 규모로 1년 전보다 3.7%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2021년과 2022년 각각 전년 대비 31.8%, 20.3% 성장하며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던 최근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문제는 2024년부터 본격적으로 저성장 분위기가 확산되는 데다 경기 둔화 가능성에 베팅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커지며 소비 시장 역시 크게 위축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사실 명품업계는 팬데믹 기간에 기대 밖 선전을 넘어 호황기를 누렸다. 많은 사람들이 집 안에만 머물며 여행을 가거나 아웃도어 활동에 제약이 생겼던 코로나 시국에 이러한 여가 비용 등이 고가의 가전·가구를 구입하거나 명품을 사는 데 쓰였기 때문이다. 2020~2022년 명품 시장은 우려와 달리 각국 중앙은행의 저금리 기조와 이로 인한 시장의 유동성 공급으로 미국, 중국 등 글로벌 경제 대국 소비자들의 한풀이식 소비로 호황을 맞았다. 특히 중국인들은 2021년 당시 전 세계 명품 시장 매출의 30%를 차지할 만큼 폭발적인 보복소비를 주도했고 이로 인해 명품업계는 역대급 실적과 더불어 주가 상승도 견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보복소비 트렌드는 엔데믹이 시작되며 급격한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큰 소비 시장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 G2 국가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 변화는 명품업계에 큰 타격을 입히고 있다.
명품업계의 큰손, 중국의 배신이 가장 결정적이다. 베인앤드컴퍼니가 최근 내놓은 명품산업 리포트에 따르면 2023년 하반기부터 이러한 명품 소비 감소 추세가 가팔라지고 있다. 글로벌 명품기업들의 아시아태평양 매출은 2023년 3분기부터 본격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루이비통 등을 보유한 세계 최대 명품그룹 LVMH의 3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1% 성장했다. 상반기 23% 성장세를 보이며 활짝 웃었던 LVMH의 성장률이 반 토막 난 것이다. 그뿐 아니라 프라다그룹과 에르메스그룹은 각각 13.5%, 10.2%의 성장률을 기록해 지난 상반기 기록한 25.3%, 27.6%보다 큰 폭으로 줄었다. 4대 명품그룹 중 가장 심각한 곳은 케링그룹이다. 구찌와 발렌시아가 등 브랜드를 보유한 케링그룹은 2023년 3분기 매출 성장률이 1%에 그치며 성장이 사실상 멈추다시피 한 상태다.
중국 시장 매출 기여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럭셔리 패션 브랜드로선 중국 시장에서의 부진은 사실상 전체 실적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전 세계 소비 시장에서 중국인들의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20% 안팎으로 분석된다. 즉 전체 매출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 시장은 명품업계로선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시장이다.
중국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시아태평양 매출 부진은 자연스레 전체 실적 악화로 충격파를 전했다. 2023년 3분기 기준 2023년도 15% 성장했던 LVMH의 글로벌 전체 매출은 9% 성장에 그쳤다. 동기간 프라다그룹은 20.5%에서 10.3%로, 에르메스그룹 역시 25.2%에서 15.6%로 성장률이 대폭 낮아졌다.
아시아태평양 매출 성장이 사실상 멈췄던 케링그룹은 3분기 글로벌 매출이 전년 대비 9% 하락하며 4대 글로벌 명품기업 중 유일하게 역성장을 기록했다. 본격적인 럭셔리 브랜드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특히 여름휴가 시기를 포함한 3분기 실적은 명품업계의 가장 큰 대목이다. 휴가를 맞아 전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관광객이 가장 많은 시기이고, 면세점과 관광지에서 이뤄지는 명품 소비가 크게 늘어나는 때이기 때문이다. 2023년도는 엔데믹이 시작된 첫해인 만큼 명품업계를 비롯한 여행 관련 산업 전반으로 성장 기대감이 한껏 높아진 해였다. 하지만 오히려 코로나19 대유행 후폭풍이 본격화되면서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와 소비 시장의 위축 등으로 명품업계를 눈물짓게 하고 있다.
문제는 중국의 소비 시장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폭발적인 고성장 시기를 지나 장기 저성장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비구이위안과 헝다 등 중국을 대표하는 부동산 개발업체가 방만하게 경영해오며 내 돈 쓰듯 끌어온 부채를 갚지 못하는 디폴트에 빠지면서 중국 경제 전반으로 기업의 연쇄도산 후폭풍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하는 부동산 시장이 무너질 경우 도미노처럼 중국 경제가 무너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중국 국가통계국의 2023년 10월 통계에 따르면 중국 내 70개 주요 도시의 주택가격은 전월 대비 신축은 0.4%, 기존 주택은 0.6% 하락했다. 이는 2014년 9월 이후 10년 만의 최대 낙폭으로 중국의 부동산 버블이 본격적으로 걷힐 것이란 전망에 힘을 실어주는 데이터다. 특히 대출 비율이 높았던 대형 개발사들이 중국 정부의 대출 규제 강화로 인한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문제가 본격화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의 부진이 이어지면서 취업의 문이 좁아지고 실업률이 급증하는 부작용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청년실업률은 2023년 6월 20.8%를 기록하며 조사 이래 처음으로 20%를 넘어섰다. 역대 최악의 위기란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실업률 상승은 자연스레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로 이어지면서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는 사람들의 증가로 이어진다. 특히 명품업계에서 큰손으로 떠오른 2030 MZ세대들의 소비력 감소는 명품업계에 큰 타격으로 평가받고 있다. 쇼핑몰과 백화점을 찾는 중국 젊은이들은 명품 매장이 있는 1층을 지나치고 저렴한 매장이 자리잡은 지하층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이를 이른바 ‘B1B2 경제’라고 부르며 하나의 소비 현상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엔데믹 이후 경기 회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국 경제 부진의 나비효과가 결국 명품업계의 불안감을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맥킨지 등 여러 기관에선 중국의 소비자 지출 증가율이 더욱 둔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알리바바와 징둥닷컴 등 중국 최대 유통업체들은 연례 쇼핑 행사인 광군제 매출 수치를 2년 연속 공개하지 않으며 사실상 소비 감축을 시인하고 있다. 즉 중국을 중심으로 한 명품업계의 전화위복은 난망한 상황이란 뜻이다. 또한 유커 등 중국 관광객들의 증가로 기대감이 높아졌던 한국과 일본 등 관광 업계와 명품업계 역시 해외 소비는커녕 해외 여행 자체가 줄어든 중국의 사정 탓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여행업계 관계자는 “중국 관광객들도 명품을 사거나 값비싼 선물을 사는 대신 가성비가 좋은 물건이나 기념품을 사는 것이 대세가 됐다”며 “중국의 경제 상황 악화가 관광객들의 소비 패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밝혔다.
최악의 상황을 예상치 못한 명품업계의 재고 문제도 본격적으로 부각되는 분위기다. 코로나19 대유행 당시 증가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생산량을 늘렸지만 경제 하락 사이클이 두드러지면서 오히려 과공급으로 인한 문제가 커지고 있는 셈이다.
유럽 온라인 명품 쇼핑몰 ‘마이테레사’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시장 상황을 겪고 있다”며 “2023년 3분기 말 기준 재고가 1년 전보다 44% 급증했다”고 밝혔다. 그뿐 아니라 백화점에서 팔리지 않는 명품 재고 처리 문제를 놓고 명품업계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일반 브랜드의 경우 시즌 세일 행사 등을 통해 할인된 가격으로 재고를 처리하거나 소화하지만 럭셔리 브랜드의 경우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할인 자체를 꺼리는 경향성이 있다. 그렇다 보니 현재 잔뜩 쌓여 있는 재고에도 불구하고 이를 불태우거나 폐기 처분하는 것이 명품업계의 암묵적 관행이었다. 하지만 2023년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패션 제품 소각을 법으로 금지함에 따라 이런 방식 또한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실제 항간에는 버버리가 백화점에서 안 팔린 재고를 도로 사들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업계 분위기는 가라앉고 있다.
특히 할인이 필요 없던 호황기 시절과 달리 현재 분위기는 어떻게든 재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명품 업계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수년간 할인 판매를 막기 위해 애써온 명품업체들은 이제와서 또다시 할인 정책을 펼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실제 프라다는 도매상 의존도를 2018년의 절반 수준까지 낮췄다. 즉 본사가 직접 가격을 결정하고 재고를 관리해 무분별한 할인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매출에 큰 타격이 발생할 정도로 현재 시장이 좋지 않자 업계에선 재고 판매를 위한 전략 수립에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국내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23년도 백화점업계의 명품 매출은 모두 전년 동기 대비 한 자릿수 성장에 그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의 명품 매출은 1~11월 기준 전년 동기 대비 0.3% 성장에 그쳤다. 롯데와 현대백화점 역시 5~6% 성장에 그쳤다. 올해 물가 상승률과 판매관리비 등을 감안하면 사실상 역성장했단 분석도 나온다. 이에 업계에서는 수요가 줄어든 명품 대신 식품관이나 K-패션 브랜드를 강화하는 등 고객 유치 전략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경기가 침체되면서 연초까지도 성행하던 명품관 오픈런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매년 서너 차례 가격을 올리며 거침없던 명품 브랜드들의 가격 인상도 주춤해지고 있다. 2021~2022년 연간 서너차례 가격을 인상해온 샤넬은 올해는 2월과 5월 가격 인상 이후로 추가 인상을 하지 않고 있다. 루이비통은 2021년 다섯 차례, 2022년 두 차례 가격을 올렸지만 2023년은 6월 한 차례만 올렸다. 디올도 2023년 한 차례 가격을 인상하는 데 그쳤다. 다만 일부 브랜드에선 줄어든 판매량을 보완하기 위해 가격 인상을 단행하거나 준비하고 있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구찌는 12월 9일부터 일부 제품 가격을 최대 10%가량 인상했다. 프랑스 브랜드 델보 역시 2024년 1월부터 가격을 인상키로 했다.
명품 브랜드들은 원자재 가격 인상 등을 이유로 불가피한 가격 인상을 단행한다고 이유를 밝혔지만 업계에서는 매출 감소에 의한 타격을 줄이기 위한 궁여지책이란 평가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명품 브랜드들의 가격 인상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된다. 제품 가격이 계속 오르면 가뜩이나 구매력이 떨어진 소비자들이 아예 외면할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한 명품업계 관계자는 “현재는 물론 미래 매출 부진이 예상돼 가격을 미리 올려놓는 측면도 있다”며 “마냥 가격을 올릴 수도 없는 만큼 적절한 가격 인상의 범위를 놓고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추동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