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 더위쯤이야!”라며 참을 만했던 날씨가 여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걷기만 해도 땀이 몽글몽글 뭉친다. 봄을 즐기지 못한 것 같은데 어느새 초여름, 한여름으로 바뀌고 있다. 나이도 언제 먹었는지 모르게 차곡차곡 햇수를 쌓아간다. 그런데 더위와 나이를 잊은 듯한 인물이 나타나 눈을 비비게 만든다. 누구라도 그녀를 만나면 그럴 것 같다.
배우 임수정이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동안의 여배우는 여전히 10년도 더 된 청소년드라마 <학교 4>의 모습과 별 차이 없는 모습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은근히 기억력도 좋다. “안녕하세요. 더워졌죠? 영화 <김종욱 찾기> 홍보할 때 만났던 것 같은데…. 오랜만이네요.(웃음)”
5년 전, 만났을 때와도 달라진 게 없다. 헤어스타일과 옷차림 정도만 다르다. 동안 이미지에 대해 이제는 묻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어쩔 수 없다. 자연스럽게 또다시 그 질문이다. 이제는 나이를 밝히는 걸 별로 안 좋아할 것 같고, 동안과 관련한 질문도 지겨워할 것 같은데 개의치 않는다.
“전 20대 때, 빨리 ‘30대 여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제가 특이할 수도 있지만 일종의 로망이라고 할까요? 지금의 감성이 배우로서 저한테 기회가 많이 열려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20대부터 30대까지 다양한 역할이 들어와서 좋거든요. 알아보시면 저 같이 생각하는 배우들 꽤 있을 걸요?(웃음) 전 예전부터 동안이라는 수식어를 빨리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억지로 그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한 것도 없었던 것 같아요.”
변함없는 동안 이미지, 그녀의 변신
한 가지 이미지가 오랫동안 유지된다는 건 다른 역할의 연기를 할 때, 걸림돌이 될 법한 일이다. 최근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드니로가 뉴욕예술대 졸업식에서 거절당하는 인생을 사는 게 예술가의 숙명이라는 사실에 대해 “여러분, X됐습니다”라고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로운 축사를 건넨 것처럼, 특히 이미지 캐스팅을 많이 하는 우리나라에서 임수정에게도 거절과 좌절의 경험이 꽤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임수정은 “부정적인 것보다 좋은 점, 유리한 점이 많았다”고 짚었다.
“전 어려 보이는 외모 덕분에 어리지만 성숙한 캐릭터, 복잡한 감정 상태에 있는 캐릭터, 중성적인 캐릭터도 많이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 이런 외모 때문에 저를 더 많이 알리게 된 것 같기도 하고요. 20대 중후반에 접어들었을 때인데도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서 안성기 선생님의 딸로 나와 교복을 입었어요. 그 뒤로도 교복을 몇 번 입었죠. 이미지 고착화를 걱정하진 않았어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러운 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임수정의 말마따나 최근 그가 맡은 역할들은 달라졌다. 예쁘고 섹시하지만 주변과 소통이 필요한 여자 정인을 연기해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2012년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 이후 제대로 ‘소녀티’를 벗었다. 그녀에게 “전환점이 됐다”는 작품이다. “<내 아내의 모든 것> 이후 저한테 제안 들어오는 캐릭터들이 확실히 달라졌거든요.” 최근 영화 <은밀한 유혹>도 마찬가지다. 초반에는 ‘신데렐라’를 떠올리게 하는 고전적인 여성 캐릭터지만 후반부에는 스스로 위기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강인한 모습을 보였다. 그간 임수정에게서 볼 수 없던 캐릭터다.
임수정은 “<은밀한 유혹>의 지연 역할은 솔직히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도전하고 싶다고 바랐지만 연기하기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순수함과 고뇌, 욕망 사이에 놓인 인물을 모두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 부쩍 자란다고 하잖아요. 촬영하고 나니깐 뭔가 또 많이 성숙해진 느낌인 것 같아요”라고 좋아했다. 또 <은밀한 유혹>에서 함께한 유연석이나 조만간 개봉하는 <시간이탈자>에서 호흡을 맞춘 조정석이 쉼 없이 일하는 걸 보고는 “‘그렇지, 배우 본연의 모습에 충실한 게 연기자지!’라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이 작품에 임하는 태도와 자세를 보고 자극을 받았다”며 “나도 현장에서 부지런히 찍으면서 내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드라마에도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나랑 밥 먹을래, 나랑 죽을래”라고 다그치는 무혁(소지섭)의 말에 동그랗게 눈을 뜬 은채(임수정)가 기억나는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로 신드롬을 일으킨 이후 안방극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임수정. 벌써 10년이 넘은 드라마인데 여전히 패러디되고 사랑받고 있다. 혹자는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여운이 길고 뭐를 해도 그 이상의 인기는 얻지 못할 것이라는 임수정의 판단이 작용해 드라마 출연을 안 한다고 추측한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임수정은 “좋은 작품을 만나지 못해서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못했을 뿐”이라며 “그래도 오랫동안 회자되는 드라마를 했다는 게 정말 행복하고 좋다”고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난 상대 배우 복이 많은 사람 같다”고 즐거워했다.
“‘현장이 제일 좋아’ 이젠 이해할 수 있어요”
“사실 내 20대 때, 배우라는 직업은 항상 경쟁에 놓여 있었고 치열했어요. 좋은 필모그래피를 쌓고 좋은 배우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목표가 뚜렷해서 연기하는 자체의 즐거움을 많이 놓쳤던 것 같아요. 작년에 두 작품을 연달아 참여하면서 현장 에너지를 받았는데 기분이 좋더라고요. 예전보다 자유로워지고 뭔가에 벗어난 것 같다는 느낌이에요. 어렸을 때 선배들이 ‘현장이 제일 좋아!’라고 했는데 그 말을 100% 이해는 못 했죠. 너무너무 힘들었던 과거거든요. 물론 연기는 여전히 어렵고 힘들어요. 치열해야 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제는 진심으로 그 상황을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배우라는 것이 좋고, 많이 연기하고 많이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죠.(웃음)”
나이가 들면 생각이 달라지는 것처럼, 관심사도 약간은 바뀌는 법이다. 하지만 임수정은 “지금은 작품 활동에 대한 관심이 가장 높다”고 했다. 물론 기타 연주와 꽃꽂이, 책과 영화·미국 드라마 보기, 공연 전시회 다니기 같은 일상의 취미를 즐기기도 한다. 4년 정도 연습한 기타 실력은 꽤 수준급. “기타를 치며 노래할 수 있는 팬미팅이나 영화 홍보 자리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또 뒤늦게 몰입하게 된 미국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 1을 최근 끝냈단다. 밤새우면서 집중했다.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하고 또 다른 작품을 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다.
잠을 못 자고 화면에 집중하면 피부가 푸석해지기 마련인데 어떻게 뽀얗고 부드러운 피부를 유지할 수 있을까? “스케줄 없어서 낮에 실컷 잘 수 있는 전날 밤을 이용한다”는 게 비법이다. 또 “튀긴 음식이나 인스턴트, 밀가루 대신 피부에 좋은 음식을 챙겨 먹고, 매일 2리터 이상의 물을 마시는 등의 노력”이 동안의 비결이다. 역시 노력과 관리를 하지 않고 얻어지는 건 많지 않은 듯하다.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로 다가오면 OK
이것저것 재미있고 좋아하는 걸 밝혔지만, 이성에 대한 관심만 빠졌다. 임수정은 “항상 연애할 마음은 되어 있다”고 자신감 있게 말하는 듯하다가 “이렇게 얘기하니깐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고 했다. ‘웃프다’고 해야 할까. 그는 이성 친구를 사귀고 결혼까지 골인하게 되려면 “상대와 내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각자의 삶을 즐기다가, 또 언제 떨어져 있었느냐는 듯 좋아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나이 차는 생각하지 않아요. 나이가 많든 적든 내게 남자로 다가오면 좋겠는데 그런 사람이 있겠죠? 아마 있을 거예요. 없으면 안 되는데….(웃음)”
본인의 취미인 기타 연주를 합주 형태로 발전시켜 사람들을 만나라고 조언하자 생각에 빠진다. “개인적 성향이 작품 활동할 때 이외에는 혼자 집에서 콕 박혀서 조용히 있을 걸 좋아하는데….” 이제 ‘신비주의’도 벗어던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하자, 임수정은 눈을 반짝인다. 새로운 작품을 개봉할 즈음에는 홍보용 예능 섭외가 들어오지만 정중히 거절을 택했던 그녀는 조금씩 바뀔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또 “팬들과 SNS 소통도 어색하고 경험이 없어서 약간 두렵다”는 그녀에게 꽃꽂이가 취미니 꽃 사진만 올려도 관심을 받을 것 같다고 하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렇게 하면 또 혹시나 좋은 인연을 만날 수도 있지는 않을까. 임수정은 “자주자주 내 모습을 보이고 싶다. 방법은 고민하는 부분”이라고 환하게 웃었다.
물론 쉽게, 자주 접하게 되면 임수정을 향한 환상이 깨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팬들은 새로운 모습을 보는 게 더 행복할 수 있다. 요즘 인기인 KBS 2TV 드라마<프로듀사>에서 백승찬(김수현)이 “스타들이 어느 날 예능프로그램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오히려 더 많은 팬을 확보하면서 승승장구했던 많은 예가 있다”며 배우 전도연과 가수 이효리가 친근한 이미지를 갖게 된 예를 언급한 게 떠오른다. 여전히 여러 배우들이 예능에 얼굴을 비치는 걸 겁내거나 좋아하진 않지만 의외의 모습으로 사랑받는 경우는 정말 많다. 라디오를 제외하곤 버라이어티나 쇼·오락프로그램에는 잘 출연하지 않았던 임수정을 솔깃하게 하는 러브콜이 들어와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걸 이제는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임수정의 두 눈을 쳐다보며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다시 얼굴 전체로 시선이 옮아가며 ‘30대 중반이 진짜 어떻게 이런 외모지?’라는 생각에 감탄이 다시 한 번 스쳐 지나간다. 이 질문을 다시 또 내뱉었다. 인터넷 댓글에 달렸던 어떤 이의 질문이다. “그런데 진짜 방부제 먹는 것 아닌가요?” 임수정은 까르르 뒤로 넘어갔다. 이제는 소녀의 얼굴과 여인의 눈빛이 동시에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