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원 두산중공업 기술상무 | “最初, 最多, 最高 중 두 가지만 이루면 성공할 수 있다”
입력 : 2014.08.05 08:58:04
“후배들에게 생산직도 임원이 될 수 있다는 꿈을 안겨줬다는 게 영광스러웠습니다. 롤모델이 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고, 이제 한 달쯤 됐는데 눈코 뜰 새가 없네요. 아주 바빠요.(웃음)”
지난 6월 19일 기술상무로 승진한 이상원 두산중공업 터빈2공장장은 생전 처음 회사에 방이 생겼다며 멋쩍어했다. 들어선 사무실은 한눈에도 널찍한 게 임원실다웠다. 이 상무의 승진은 생산직에서 곧바로 임원으로 승진한 두산중공업의 첫 사례다.
1979년 입사해 발전플랜트 터빈 부품생산 분야에서만 35년간 근무한 이 상무는 증기터빈 블레이드 33종과 가스터빈 블레이드 17종을 국산화하며 약 2700억원에 이르는 수입 대체효과를 이끌었다.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싶네요. 같이 일하는 직원이 128명인데, 방에 들어올 때 절대 노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문을 아예 열어 놨어요. 방에 창이 없었는데, 사무실 쪽으로 통창도 냈습니다. 소통하려면 벽이 없어야 하고 그러려면 자주 봐야죠. 임원이 됐다고 해서 변한 건 없습니다.”
그의 말처럼 방이 생기고 업무와 모임, 지원이 늘었을 뿐 변한 건 없었다. 공장장 시절부터 지켜 오던 새벽 4시 45분 기상 시각도 그대로고, 1시간 운동 후 6시 50분에 도착해 직원들과 함께하는 아침식사도 변함없었다. 보고를 받는 입장이 됐지만 앉아서 기다리지 않았다. 먼저 담당자에게 다가가 대화를 이끌었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그러더군요. 대부분의 현장 관리자들이 앉아서 보고 받기를 좋아하는데 그러지 말고 직접 찾아가 대화하라고. 지난해 공장장 발령을 받은 뒤부터 실천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일도 서로 어려움 없이 얘기하게 되더군요.”
전교 꼴찌가 대기업 임원이 되기까지
울릉도가 고향인 이 상무는 오징어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던 넉넉지 않은 가정의 5남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지금이야 섬 곳곳에 도로가 뚫렸다지만 당시 그가 살던 곳은 면 소재지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오지 중 오지였다. 날씨가 좋지 않아 바다가 요동치면 길이 파도에 휩쓸려 등교를 포기하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때 수학여행을 가려고 대구에 나오면서 처음 버스를 탔어요. 서울까지 이동했는데, 대구에선 괜찮더니 어찌나 멀미가 나던지.(웃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을 보려고 대구에 나왔을 때 두 번째 버스를 탔습니다. 그렇게 버스 두 번 타고 취직해서 지금까지 왔네요.”
고등학교 졸업 후 선택한 공무원의 길은 들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대구에 살던 작은아버지의 권유로 취직은 했지만, 별달리 내세울 게 없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변변한 학벌은커녕 고등학교 성적도 뒤에서 두 번째였다. 닥치는 대로 뛰고 구르며 부딪히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 다니며 시험을 제대로 치지 못했어요. ‘설마 그 정도까지 될라고…’ 했는데 성적증명서를 떼어 보니 전교 꼴찌에서 두 번째더군요.(웃음) 꾸준히 노력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게 가장 큰 인센티브라고 생각하고 일했어요.”
성실함은 새로운 기회를 만들었다. 회사의 지원으로 미국, 독일, 체코, 스위스 등 세계 유수 기업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익힐 수 있었고 후배들에게 기술을 전수했다. 사내 생산직 사원 중 그가 하면 늘 최초이자 최고, 최다가 됐다. 이 상무는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동탑산업훈장과 대통령상을 3번이나 수상했다.
“성의껏 일하다보니 기회가 생기더군요. 후배들이 물으면 최초가 되든지 최다가 되든지 그것도 아니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라고 하는데, 제 생각엔 그중 두 가지만 이루면 성공할 수 있겠더군요. 많이 배우고 좋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갖고 있는 작은 능력으로 조직에 공헌하고 지속적으로 자기계발에 나서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을 것이다
출근 후 빼놓지 않는 일이 공정 확인이라며 안전모를 쓰고 공장에 들어선 이 상무는 “현장에 나서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다”며 로터조립라인을 확인했다. 사실 두산중공업은 20여 년 전 이 상무가 부장이던 시절에 관리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현장 기술직이 천직이라며 현장에 남았다. 회사에선 당시 기술직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그의 사례를 교육 프로그램화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회사가 뭘 안 해준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회사는 뭘 해주는 곳이 아니잖아요. 단지 사람이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하는 곳이지 나머지는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합니다. 회사가 해줘야 하는데 안 해준다고 투덜대는 건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죠. 간혹 이 지역 대학이나 고등학교에서 강의를 부탁하면 늘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걸을 것이다’라고 제목을 붙입니다. 기술로 승부하는 젊은 엔지니어 후배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죠.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겠죠.”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그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휴일도 없이 너무 바쁘게 살았다고 덧붙였다.
“딸아이가 미술을 전공하는데 서울로 대학 입시를 보러 갈 때 단 한 번도 뒷바라지를 못했습니다. 실기까지 3차례나 치렀는데 눈길에 그 무거운 도구를 들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왜 연차 한 번 내지 못했나 싶더군요. 아내에게도 미안한 게 있어요. 회사에서 35년 근속자에게 부부동반 해외여행을 보내주거든요. 그런데 아내가 여직 비행기 한 번을 타 보지 못했더라고요. 앞으로는 살아가는 방식을 조금씩 바꿔 갈 생각입니다. 미안했던 일들에 대해 노력해야죠. 아, 내년엔 대학에도 도전할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니 더 바빠지겠네요.(웃음)”
이상원 상무의 직장생활 성공 비결
첫째,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