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윳돈이 있는 직장인 과·차장들의 관심은 온통 주식에 쏠려 있다. 제로금리 시대로 정기예금으로는 원금의 1% 이자도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고수익·고위험 상품으로 이들의 돈이 흘러가고 있는 셈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각국 정부가 경기를 살리겠다면서 대규모로 통화 정책을 펴면서 현금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원금 손실의 위험 속에서도 “위기가 기회”라는 심리가 발동하고 있다. 이처럼 통장에서 잠자고 있던 막대한 현금들이 코로나19라는 대규모 위기 속에서 깨어나 물밀듯이 주식 시장과 부동산 시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의 머니무브는 주식 시장에서도 가장 비싼 주식으로 통하는 ‘황제주’나 부동산 시장에서 ‘넘사벽’으로 일컫는 강남 아파트로 이동 중이다. 위기 상황 속에서 재테크 시장에서도 ‘플렉스(일시불로 많은 돈을 쓰며 자랑)’ 바람이 불고 있다. 더 비싼 자산이 더 희소해지면서 더 오를 것이란 심리도 작용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황제주에 3조 올인한 동학개미
시중은행에 근무하는 김 모 부장(42)은 그동안 모아놨던 목돈 2500만원을 고민 끝에 카카오 주식에 올인했다. 입사 이후 15년간 김 부장의 돈은 월급 통장에서 1~3년짜리 정기예금이나 적금으로 왔다갔다를 반복했지만 올해 5월부터는 고수익을 쫓아 은행을 등지고 주식 시장에 도달했다. 김 부장은 “통장에 있는 돈은 1년 유지해봤자 1년 후 이자가 원금의 1%도 안 나온다”며 “비싸고 유명한 주식을 사서 ‘플렉스’하려는 마음도 있지만 남들이 주식으로 돈 벌 때 소외되기 싫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김 부장이 매수한 카카오 주가는 지난 5일 25만1000원이지만 당시 실제 주가(환산주가)는 251만원짜리다. 환산주가는 상장 주식의 액면가를 5000원으로 동일하게 맞춰 계산한 실제 1주의 가격이다. 카카오는 액면가가 500원에 불과해 주가에 10배를 곱해야 환산주가가 나온다. 증권가에선 환산주가가 100만원을 넘으면 ‘황제주’ ‘명품주’라고 부른다. 7월 16일 기준으로는 카카오의 환산주가가 322만원에 달한다. 이처럼 김 부장과 같은 ‘개미(개인투자자)’들은 최근 명품 주식 쇼핑에 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7월 16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5월 1일 이후 이달 16일까지 네이버 카카오 SK 아모레퍼시픽 등 5개 종목 ‘황제주’ 순매수 규모는 2조9920억원이다. 이 중 환산주가가 1365만원에 달해 국내 최고가 주식인 네이버에 개인 순매수가 1조1950억원이 몰려 국내에서 개인들이 가장 많이 사고 있는 주식이다. 같은 기간 개인의 유가증권 시장 총 순매수 규모는 9조6076억원이다. 개인 순매수의 31%가 황제주 4곳에 집중됐다는 뜻이다.
개인 매수세가 몰리면서 비싼 주식이 더 비싸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현금가치 하락으로 인한 고수익 추구 ▲고PER주나 강남 아파트 등 희소성 있는 자산에 대한 기대감 ▲플렉스형 과시 욕구 등이 작용하고 있다고 봤다. 플렉스(Flex)는 근육을 구부리는 식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는 신세대 용어로, 금융업계에선 일시불로 많은 돈을 쓰며 주변에 과시하는 현상을 뜻한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개인들이 성장성이 높은 자산에 쏠리면서 이미 주가수익비율(PER)이 높은 비싼 주식에 투자하고 강남 아파트 매수가 줄지 않는 것”이라며 “자산 간 빈익빈 부익부는 더 심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은행 정기예금 해지하고 주식으로 머니무브
머니무브는 은행에서 주식 및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직도 막대한 부동자금이 은행 요구불예금(수시입출금식)에 쌓여 있는 만큼 코스피지수 상승세가 이어질수록 더 많은 돈이 고수익을 쫓아 주식 시장으로 흘러갈 것이란 전망이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에 따르면 이들 시중 4대 은행의 정기 예·적금(저축성 예금)은 지난 2월 말 총 545조6000억원이었다. 이후 한 달 만인 3월 말 6조원이 늘어난 551조6000억원, 4월 말에는 3000억원 더 늘어난 551조9000억원까지 증가했다.
작년부터 초저금리 시대에 돌입했지만 고수익을 보장하는 곳이 없어 막대한 자금이 그대로 은행에 머무른 것이다.
그러나 5월부터 연 1% 이자도 주기 힘든 제로금리 시대가 본격화되자 돈은 저축성 예금에서 빠르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5월에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인 5%까지 낮췄기 때문이다. 실제 시중 4대 은행 저축성 예금 잔액은 5월 한 달 동안 7조5000억원이나 급감했다. 예금의 수익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동안 주식 시장이 급반등하면서 은행에서 주식 시장으로 ‘머니무브’가 이뤄졌다는 분석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글로벌 경기 위축 우려에 코스피는 지난 3월 19일 1457.64까지 떨어졌다가 4월 말 1947.56까지 한 달여 만에 33.6% 상승했다. 이 같은 수익률에 놀란 개인투자자들이 지난달부터 주식 시장 진입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식의 경우 주가 상승 차익에 배당이라는 ‘보너스’가 있는 것도 장점이다. 코스피 배당수익률(주당 배당금을 주가로 나눈 비율)은 올해 2.51%로, 은행 이자보다 2배 이상 높다.
이효석 SK증권 자산전략팀장은 “폭발적인 유동성 증가 때문에 투자자들은 이제 현금을 버리고 무엇이라도 사려는 ‘숏캐시(short cash)’ 단계에 왔다고 할 수 있다”며 “주식 매도가 ‘숏 주식, 롱 현금’ 전략이지만 지금은 현금 가치 하락을 대비하기 위해 주식을 적극적으로 매수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5월 한 달 동안 고객 예탁금은 1조1000억원이 늘어 43조8000억원까지 증가했다. 작년 말(27조3000억원)과 비교하면 60.4%나 늘었다.
주식 거래대금 역시 5월 평균 20조원에 달한다. 작년 12월 일평균 거래대금이 10조원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2배 급증했다. 개인들은 네이버 카카오 등 비싼 주식에 올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들 주식의 주가수익비율(PER)이 모두 60배가 넘는 고평가된 주식이라는 것이다. 코스피 평균 PER가 12배인 점을 감안해도 마찬가지다. PER는 주가를 1주당 순이익으로 나눈 값이다. 오현석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저금리와 저성장 상황에서는 성장에 대한 기대가 있는 곳에 돈이 집중되기 마련”이라며 “성장이 기대되는 이유로 훌쩍 오른 주도주들에게 관심이 몰리면서 개인들의 이들 주식 매수세는 더 강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고가를 기록한 종목 따라잡기도 성행하고 있다. 코스피 시가총액 상위 종목 중에서 지난 5월에 52주 신고가를 기록한 주식은 네이버 삼성SDI 카카오 LG생활건강 엔씨소프트 오리온 CJ제일제당 유한양행 GS리테일 SKC 등 10개 종목이다. 개인은 이들 10개 종목이 각각 최고가를 찍은 날로부터 6월 5일까지 1조3600억원어치를 순매수하는 과감함을 보였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현금 가치가 하락하면서 주식 시장 상승기에 동참하려는 욕구가 강해지고 있는 가운데 성장주(고PER주)에 대한 충동적 기대감이 가세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창업자 레이 달리오는 최근 “현금은 쓰레기(Cash is trash)”라면서 “현금보다는 다른 위험자산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부 개인투자자의 조급증은 단기 급상승한 주식을 일단 매수하고 보는 투자 패턴으로 나타나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상승장에서 본인만 소외될까봐 위험을 감수하고 고평가된 주식을 사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라며 “미국의 공포와 탐욕지수(Fear and Greed Index)가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강남 아파트로 머니무브
‘플렉스 바람’은 강남 부동산 시장에서도 목격된다. 서울 대치동 래미안대치팰리스 91㎡는 지난 5월에 30억원에 팔리며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이처럼 서울 지역 15억원 이상 아파트 거래는 지난달 349건에 달했다. 직전 달(4월)에 244건보다 100건 이상 늘어났고 서울 전체 거래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월 8.1%에서 5월 10.7%로 높아졌다. 지난해 12·16 대책으로 15억원 초과 아파트에 대한 대출이 전면 금지된 것을 감안하면 현금 위주로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돈이 고가주택으로만 쏠리면서 상대적으로 비싼 집과 저렴한 집의 가격 격차가 10여 년 만에 최대로 벌어지고 있다.
5월 국민은행 월간주택가격동향에 따르면 전국 가격 상위 아파트 20%의 평균 가격(8억원)을 하위 20%(1억1000만원)로 나눈 값은 7.3배다. 2010년 8월 이후 가장 높았다. 올 들어 15억원 이상 초고가 주택에 대한 대출이 전면 금지됐지만 강남을 중심으로 일부 고가 아파트가 여전히 실거래되면서 비싼 집값이 더 오르고 있다.
지난 5월 서울의 아파트 평균 매매값은 9억1530만원으로 작년 5월(8억1139만원)보다 1억391만원(12.8%) 상승했다.
1년 새 강남구 매매값은 전용 84㎡ 아파트를 기준으로 14억7689만원에서 16억7572만원으로 1억9883만원(13.5%)이 뛰었다. 한 중개업소 관계자는 “수십억원의 현금으로 강남 아파트를 사는 것은 여전히 집값이 더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지난 4월까지만 해도 올해 부동산 시장은 코로나19와 강력한 부동산 대책으로 움츠러들 것이란 전망이 대세였다. 그러나 은행 이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막대한 자금이 지난 5월부터 서울 강남권 주택 시장을 깨우면서 부동산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6월 5일 기준 서울 아파트의 5월 거래량(3259건)이 이미 4월 거래량(3019건)을 초과했다. 이 같은 아파트 거래는 계약 후 30일 내 등록하도록 돼 있어 5월 거래라 하더라도 이달 까지 한동안 집계를 하게 돼 있다. 이에 따라 5월 거래량은 4월 거래량을 크게 뛰어넘은 것이다.
서울 강남3구(강남·서초·송파) 거래량은 더 가파르게 증가했다. 5월 강남3구의 아파트 거래량은 464건으로, 이미 4월 거래량(370건)의 1.3배에 달한다.
▶머니무브는 금(金)으로
재테크 시장에선 리스크 관리를 위해서 일정량의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 투자의 기본 철칙 중 하나였지만 이것도 옛말이 됐다. 펀드나 증권사 랩을 운용할 때도 환매요구나 추가 투자 기회에 대응하기 위해서 일정량의 현금을 보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넘치는 유동성으로 현금 보유의 기회비용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올 들어 투자 업계에선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버크셔헤서웨이 회장의 현금 보유 전략은 단기적으로 큰 손해로 이어졌다며 말이 많다. 워런 버핏은 큰 위기를 예상해 코로나19 이전부터 1280억달러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추가 현금 확보에 나섰다. 바로 항공주를 손절매하는 등 주식을 대거 내다판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 증시가 ‘V자’형으로 반등하면서 결과적으로 막대한 수익을 포기한 셈이 됐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엄청난 유동성 공급으로 현금 가치가 크게 떨어지면서 주식 등 위험자산의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 오래전부터 인플레이션 대비 수단으로 각광받아온 금값은 최근 1년간 가격이 29% 올랐다. KRX금시장에서 거래된 금도 지난해 일평균 거래량이 43.5㎏이었는데 최근엔 88.5㎏(6월 기준)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유동원 유안타증권 글로벌인베스트먼트본부장은 “운용하고 있는 랩에 일정 비율의 유동성을 가지고 있지만 현금보다는 금으로 가져가려고 한다”며 “유동성 증가로 가치가 떨어지는 현금보다는 금이 장기적으로는 훨씬 유망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비트코인 역시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 부각되고 있다. 대규모 위기 때 막대한 현금이 공급되는 것과 달리 비트코인은 발행총량이 제한돼 희소가치가 높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화폐가치가 불안한 중남미 등 국가에서 법정화폐를 대체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어 환율이나 발권규모에 영향 받지 않는 가치저장 수단이란 평가다.
비트코인 가격은 3월 9일 5392달러로 연저점을 찍은 후 6월 4일 9786달러까지 올라왔다. 석 달 새 81%가 오른 것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거대 헤지펀드인 튜더인베스트먼트의 창립자 폴 튜더 존스는 최근 통화당국의 양적완화에 대한 위험회피 자산으로서 암호화폐에 주목하면서 비트코인을 사들인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