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보루’ 퇴직연금, 어떻게 굴려야 하나... 원금보장형 비중 높은 퇴직연금 수익률 저조, 은퇴시점 맞춰 ‘스스로 자산배분’ TDF가 대안
홍혜진 기자
입력 : 2019.04.02 15:00:17
수정 : 2019.04.03 11:26:43
“100세 시대라는데 노후 대비를 안 할 순 없죠. 예·적금 외에 재테크를 통해 미리미리 자산을 불려 놔야한다는 생각은 태산같지만 어떻게 첫 삽을 뜰지가 문제입니다.”
저금리 시대 노후 대비를 위한 자산증식 방법을 놓고 이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고공 행진하는 물가에 빠르게 당겨지는 퇴직 시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벌이가 있는 당장은 먹고 사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해도 근로소득이 끊기는 노후를 대비할 필요성이 커졌다.
건강관리에 돌입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필수 영양소가 고루 갖춰진 식사를 잘 챙기는 것부터 시작하듯, 노후 대비에 있어서도 가장 먼저 챙겨야 할 출발선이 있다. 퇴직연금이다.
퇴직연금에 가입한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라면 매년 일정 금액이 퇴직연금으로 꼬박꼬박 적립되고 있지만, 여러 이유로 인해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확정급여(DB·Defined Benefit)형으로 연금제도를 운용하는지, 확정기여(DC·Defined Contribution)형으로 운용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안 그래도 빠듯한 수입에서 노후 대비를 위한 투자금을 따로 마련하는 것보다 ‘잊고 있던 자식’인 퇴직연금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지적이다.
퇴직연금은 기업이 근로자 몫의 퇴직금을 미리 떼서 사외 금융기관에 적립하고 이 금액을 회사(DB)나 개인(DC·IRP)이 운용한 뒤 퇴직 후 일정분을 매달 연금 형태로 지급하는 제도로 지난 2005년 도입됐다.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 거액의 퇴직금을 목돈으로 지급하는 퇴직금제도에서는 기업이 부도가 나면 되면 퇴직금도 같이 없어지거나, 근로자가 일찌감치 퇴직금을 소진해 정작 노후에 쓸 자금이 남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퇴직연금제도다. 과거에는 퇴직금을 밑천으로 노후를 설계했다면, 이제는 연금으로 노후 자산을 관리하는 시대로 변해가는 셈이다. 퇴직연금제도 도입 이후 금융사에 맡겨진 퇴직연금은 2017년 기준 167조원까지 늘어났지만 평균 수익률은 1.88%에 그쳤다. 2017년 물가상승률이 1.94%였던 것을 감안하면 실질 수익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적극적인 운용으로 퇴직연금 수익률 높일 때
퇴직연금 수익률이 낮은 상태에 머무는 것은 퇴직연금을 맡긴 회사나 퇴직할 때 이를 받는 근로자 모두 퇴직연금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퇴직연금에 가입한 사업장 가운데 절반이 훌쩍 넘는 66%가 DB형으로 퇴직연금을 운용하는데, 이는 회사 측이 운용 성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구조다. 근로자에게 일정 금액을 퇴직연금으로 지급하겠다고 미리 약속해 놓고, 운용 성과와 상관없이 약정된 금약을 지급한다. 회사가 알아서 자금을 굴리다가 손실이 나면 손실분을 사측 부담으로 메우고, 반대로 운용 과정에서 기대 이상의 수익이 난다고 해서 근로자에게 퇴직연금을 더 주지도 않는다. 구체적으로는 근로자가 퇴직할 때 근속 연수와 퇴직 직전 3개월 평균 급여를 곱한 만큼을 운용 결과와 상관없이 퇴직연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운용 성과와 관계없이 정해진 금액이 퇴직연금으로 주어지니 근로자들로서는 회사가 자신의 퇴직연금을 어떻게 굴리는지 궁금해 할 이유가 없다. 회사 측도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를 했다가 손실이 나면 재정에 무리가 생기니 극도로 보수적인 운용으로 기울게 된다. 결국 DB형 연금자산 90%가량이 예금, 금리확정형 보험, ELB 등 원금보장형에 몰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근로자가 직접 운용하는 DC, IRP형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해 4월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DC형 퇴직연금의 78.6%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들어있고, 펀드 등의 실적배당형 상품에는 약 17% 정도가 투자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들이 가입하는 IRP의 경우는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66.3%, 실적배당형에 22% 정도 들어있다. 먹고살기 바쁜 와중에 개인연금 운용까지 일일이 신경 쓰기 어려워 맘 편하게 적립금 상당분을 원금보장형 상품에 넣어둔 것이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는 “저금리 시대에 이러한 보수적인 운용행태로 인해 퇴직연금 수익률이 하향평준화됐다”고 지적했다.
사측과 개인의 무관심이 맞물려 퇴직연금 운용성과가 저조해진 만큼, 개인이 직접 운용하는 DC형과 IRP 가입자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퇴직연금을 관리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원금보장형 일변도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운용법으로 눈길을 돌려볼 만하다는 지적이다.
원금보장형과 실적배당형 간 선택은 투자자의 몫이다. 물론 DB형 퇴직연금 가입자들의 자금은 이 같은 선택에서 벗어나 있다. DB형 퇴직연금 수익률은 퇴직연금 금액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 회사만 우직하게 다니는 사람들이 드문 시대다. 이직을 하면서 이전 회사에서 퇴직급여를 받으면 그 돈은 본인이 직접 운용해야 하는 IRP로 넘어가게 된다.
결국 DB형, DC형, IRP 가입자를 막론하고 근로자 스스로가 퇴직연금에 대해 명확한 주인의식을 갖고 최적의 운용방안을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투자지식이 충분한 개인이라면 직접 자산배분을 하는 편이 비용 절감 면에서 나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운용을 잘 할 수는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퇴직연금 사업자인 금융기관에서는 자동적으로 자산배분 등을 해주는 금융상품들을 제공하고 있다. 요즘 뜨고 있는 타깃데이트펀드(TDF)같은 상품들이 대표적이다.
TDF는 특정한 목표 시점을 잡아놓고 그에 맞춰 주식과 채권 등 다양한 자산의 비중을 조절해 가며 투자하는 펀드를 말한다. 통상 자산을 한창 늘려야 하는 젊을 때 공격적으로 투자하다가 은퇴가 가까워지면 안정형으로 선회해 자산을 지키는 것이 생애주기에 따른 ‘정석 투자법’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일반 투자자들이 시장 상황이나 은퇴 시점에 알맞게 정기적으로 펀드 변경 등 리밸런싱을 효율적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데서 착안한 상품이 TDF다.
생애주기에 맞춰 투자자가 젊을 때는 주식을 높은 비중으로 실어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은퇴 시점이 다가올수록 주식 비중을 줄이고 채권 비중을 높여 방어적인 투자전략을 알아서 구사해 주는 것이다.
▶해외 운용사 노하우 끼고 판 키우는 TDF 시장
TDF의 이름 뒤에 붙어있는 숫자는 퇴직 시기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TDF 이름 뒤에 2040이라고 적혀 있으면 이때를 은퇴 시점, 즉 목표 시점(타깃 데이트)으로 가정하고 2040년이 가까워질수록 안전자산(채권) 비중을 높이는 식으로 운용된다. 자신의 출생년도에 은퇴 예상 나이를 더하면 적합한 상품을 고를 수 있다는 조언이다. 예를 들어 1980년생의 경우 60(은퇴 예상 나이)을 더한 2040상품이 적합하다.
TDF는 통상 가입시점부터 주식 비중을 80~90% 수준에서 점점 낮추고 반대로 채권 비중을 10~20% 수준에서 시작해 높여간다. 은퇴 시점이 지나면 안정적인 수익을 위해 주식비중을 20~50%로 낮추는 대신 채권 비중을 50~80%까지 높인다. 이와 별도로 예상치 못한 자산가격 급락 시에도 수시로 리밸런싱을 실시한다.
TDF가 수익을 내는 방식은 일반 펀드와 동일하다.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아 주식, 채권, 리츠 등 자산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과정에서 수익을 내는 것이다. 매매차익에 더해 배당이나 이자소득도 주요 수입원이다.
주의할 점도 있다. 적금, 예금이 아닌 실적배당형 상품이기 때문에 원금손실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 지난해 하락장에서 대부분 TDF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다만 TDF는 장기 투자 상품인 만큼 시장이 조정 받는 시기에도 꾸준히 적립식으로 투자하면 평균 매수단가가 낮아지는 코스트 애버리징 효과를 누릴 수 있다.
TDF라는 개념은 투자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길고 은퇴자산 관련 금융상품이 다양한 미국에서 1993년 처음 만들어졌다. 자산 리밸런싱에 어려움을 겪는 투자자들을 겨냥해 출시된 TDF는 미국 시장에서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성장해 2017년 말 1조원 규모를 넘어섰고, 우리나라의 DC형 연금제도에 해당하는 401K의 65%가 TDF를 포함할 정도로 저변이 넓어졌다.
미국 TDF시장은 뱅가드, 피델리티, 티로프라이스 3개사가 전체 시장의 70%를 차지하는 과점 형태다. 30년 이상 운용을 목표로 하는 TDF의 특성상 투자자들이 검증된 안정성과 운용능력을 중시하기 때문에 시장 상위 참가자들에게 자금이 몰린 것으로 분석된다.
우리나라에서는 8개 운용사가 TDF시장에 진출한 상태다. 미래에셋자산운용, 하나UBS자산운용, 삼성자산운용, 한국투자신탁운용, KB자산운용, 한화자산운용,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키움투자자산운용이 TDF 상품을 출시했다.
TDF가 국내 처음 출시된 것은 2011년이다. 2011년 6월 미래에셋자산운용이 '미래에셋평생연금만들기'펀드를 내놓았고, 2014년에도 하나UBS자산운용이 관련 상품을 출시했지만 국내 TDF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한 것은 최근 3년 사이다.
삼성자산운용이 2016년 4월 삼성한국형 TDF를 내놓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며 본격적으로 판을 키우자 관련 상품 출시가 잇따랐다. 2017년 2월에는 한국투자신탁운용이 TDF 시장에 뛰어들었고, 3월에는 미래에셋자산운용이 기존 상품명을 변경하고 라인업을 추가하는 등 재정비에 나섰다.
6월에는 신한BNPP자산운용이, 7월에는 KB자산운용이 TDF상품을 출시했다. 하나UBS자산운용도 기존 상품을 10월 리뉴얼했다. 지난해에는 한화자산운용(4월)과 키움자산운용(6월)이 TDF상품을 내놨다. 이 외에도 몇몇 운용사들이 연내 TDF시장에 출사표를 내기 위해 막바지 준비에 한창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징적인 것은 미래에셋운용과 하나UBS운용을 제외한 6개 운용사가 미국이나 유럽 등 해외 운용사와 손잡고 TDF를 출시했다는 점이다. 특히 뱅가드, 캐피탈그룹, 티로프라이스, JP모간 등 미국 상위사업자들과의 협력이 두드러졌다. TDF가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알려진 지 3년이 채 안 된 상품인 만큼 TDF의 발원지인 미국 운용사의 노하우를 차용하겠다는 포석이다.
결국 미국 내 상위 사업자 중 피델리티를 제외하고 대부분 합작 형태로 국내 시장에 진출한 셈이다. 피델리티자산운용은 당분간 한국시장에 TDF를 출시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각 운용사별 전략도 차이가 있다. 삼성자산운용과 한국투자신탁운용, 미래에셋자산운용 등은 액티브펀드 위주로 TDF 포트폴리오를 짠다. 운용비용이 들더라도 적극적으로 편입자산을 조정해 수익률을 제고하겠다는 전략이다. 삼성자산운용과 한국투자신탁운용이 각각 제휴한 캐피탈그룹과 티로프라이스는 전통적인 액티브 운용의 강자다. 세부 운용 전략에서는 양사 간 차이가 있다. 삼성자산운용은 펀드 투자자산 대부분을 캐피탈그룹이 운용하는 펀드에 재간접 형태로 투자하는 반면, 한국투자신탁운용은 해외 투자에 관해서만 티로프라이스 펀드를 담고, 국내 투자분에 대해서는 자사 펀드를 활용한다.
▶삼성·한투·미래는 액티브, KB 키움은 패시브
KB자산운용과 키움투자자산운용은 운용보수에서 차별성을 꾀했다. KB운용은 세계 최대 상장지수펀드(ETF) 사업자인 뱅가드와 손잡고 펀드 자산 상당분을 ETF 등 패시브펀드에 투자해 비용을 낮췄다. KB자산운용 관계자는 “수십 년 장기투자 해야 하는 연금펀드의 특성을 고려해 보수를 내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강조했다. KB자산운용의 KB온국민TDF2035의 총보수는 1.035%로 외국계 운용사와 합작한 타 운용사 상품보다 저렴하다. 키움투자자산운용도 업계 최저 수준의 수수료를 강점으로 내세운다. 키움투자자산운용과 합작한 SSGA는 1993년 최초의 미국 상장 ETF를 설립한 운용사로 20년 이상 TDF를 운용해 왔다.
한화자산운용은 패시브와 액티브 전략을 절반씩 쓴다는 전략이다. 최준수 한화자산운용 연금컨설팅팀장은 자사 상품의 특징으로 액티브펀드와 패시브펀드의 결합을 꼽았다. 최 팀장은 “단순 혼합이 아니라 조화가 핵심”이라며 “미국 중소형주, 신흥국 채권, 리츠, 하이일드 등 자산군은 지수복제가 쉽지 않아 액티브 전략을 사용하고, 미국 대형주나 미국 물가채처럼 지수 복제가 용이한 자산은 패시브 형태로 담는다”고 말했다.
TDF를 가입할 때는 이 같은 운용사별 전략 차이를 중점적으로 살펴야 한다. 더불어 매년 들어가는 보수의 차이는 투자기간이 길어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때문에 오프라인 창구보다 보수가 낮은 온라인 창구를 통해 가입하는 것이 좋다. 또한 같은 TDF에 투자한다고 하더라도 일정시점이 지나면 합성총보수가 내려가므로 하나의 TDF를 정하고 꾸준하게 장기간 적립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조언이다.
국내 TDF 시장은 쾌속 성장중이다. 2016년 말 704억원이었던 TDF 운용규모는 2017년 말 7500억원, 2018년 말 1조4000억원으로 빠르게 몸집을 불리고 있다. 김후정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은퇴주기에 따른 자산을 조절해주는 금융상품에 대한 투자자들의 내재된 수요가 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TDF에 대한 이른바 70%룰이 해제된 것도 시장 확대에 큰 몫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8월 퇴직연금감독규정 개정안을 통해 TDF에 대해 퇴직연금(DC, IRP)의 투자 한도를 종전 70%에서 최대 100%로 확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