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조5500억원’ 지난 9월 18일 국내 부동산거래 사상 최고가격이 등장했다. 지방 이전을 앞둔 한국전력의 강남구 삼성동 부지 입찰에 참여한 현대자동차그룹이 10조5500억원을 적어냈다. 이에 따라 삼성동 한전 부지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현대차그룹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이하게 됐다. 삼성동 한전 부지가 엄청난 가격으로 낙찰되면서 지방 이전을 앞둔 공기업들의 수도권 내 부동산들이 주목받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현재 이미 매물로 나온 지방 이전 공기업 소유 부동산은 사옥으로 사용하는 빌딩만 해도 46건(한전 제외)에 달한다.
이들 46건 사옥의 매각 예정가격만 5조6000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이들 지방 이전 공기업들의 매각 예정가격이 사실상 장부가액으로 기재된 점을 고려하면 실제 매각금액은 최소 7조원대로 추산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공사)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등 정부가 우선 매입한 부동산만 3조원에 달해 이들 부동산까지 포함하면 지방 이전 공기업들의 부동산은 최소 10조원대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엄청난 규모의 이들 부동산들이 올해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 중에 새 주인을 찾아야 한다. 이에 따라 공기업발(發) 매물 홍수로 부동산 시장을 한바탕 뒤흔들어 놓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과천 종합청사
공기업 보유 부동산 5조원 넘게 매각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09년부터 최근까지 지방 이전이 결정된 공기업 및 공공기관 중 부지매각에 성공한 경우는 75개 부지, 총 5조270억원에 달한다.
2009년 경기도 고양시의 농림수산검역검사본부가 130억원에 매각된 것을 시작으로 2010년 ▲국립경찰대학(3177억원) ▲한국산업인력공단(1765억원)이 팔렸고, 2011년에는 ▲한국감정원(2328억원) ▲법무연수원(1950억원) ▲우정사업정보센터(1673억원)가 매각됐다.
이어 2012년 ▲국립원예특작과학원(3742억원) ▲국방대학교(3736억원) ▲국립축산과학원(2569억원) 등이 새 주인을 찾았으며, 지난해에는 ▲과천 기술표준원(973억원) ▲한국세라믹기술원(638억원) ▲한국시설안전공단(120억원) ▲법제연구원(125억원) 등이 매각을 완료했다. 최근에는 한전이 보유하고 있는 강남구 삼성동 부지 역시 매각에 성공했다. 특히 현대차와 삼성전자가 매각에 참여하면서 5조원 안팎으로 예상되던 매각가격 역시 10조550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삼성동이라는 ‘노른자위’ 입지에 대규모 부지라는 점, 그리고 정몽구 회장의 꿈이 합쳐져 흥행요소로 작용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직 매각에 나서지 않았지만, 한전처럼 기업체는 물론 금융권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공공 소유 부동산이 있다.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에 자리한 서울지방조달청(구 공정거래위원회)이 대표적이다. 조달청 부지는 인근에 서래마을과 반포동을 잇는 중간에 자리해 있어 감정가격만 2000억원대를 웃돈다.
입지조건이 워낙 좋아 조달청 부지에 대한 관심은 뜨거울 정도다. 인근의 한 공인중개소 관계자는 “국내 대기업들은 물론, 외국계 대형 호텔 체인과 금융권으로부터 부지 관련 문의를 많이 받고 있다”고 말했다. 조달청 관계자는 “현재 공공기관 용지로 묶여 있어 서울시에 용도변경 신청을 한 상태로 올해 안에 공개 경쟁 입찰로 매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달청은 부지 매각과 함께 과천 정부종합청사로 이전한다. 그러나 팔아야 할 공기업 보유의 종전부동산은 여전히 더 많다. 지방이전 대상 공기업 및 공공기관 보유 부동산 46건 가운데 올해 연말까지 20곳, 내년 중에 매각해야 하는 곳이 20곳이며, 2016년에는 6곳 정도다. 이들 매각 예정 부동산 가격만 총 6조9467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그나마 팔렸던 공기업 소유 부동산 역시 LH공사와 캠코, 지자체가 3조원 넘게 들여 매입했다는 점을 감안하며 공기업들의 부동산 매각 작업은 갈수록 여의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LH공사와 캠코가 인수한 부동산들 역시 앞으로 다시 되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새 주인 찾기 난항, 캠코가 우선 인수하기도
부동산 전문가들은 그래서 지방 이전 대상 공기업 및 공공기관의 부동산 매각 계획을 우려스런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다. 연말까지 3개월 정도 남은 상황에서 지방 이전 공기업 및 공공기관이 반드시 매각해야 할 부동산이 대거 매물로 나오지만, 정작 부동산 시장이 침체기를 겪고 있어서다. 실제 전남 나주혁신도시로 이전하는 한국농어촌공사는 최근까지 9차례에 걸쳐 본사 매각 공고를 냈지만 입찰 참가자는 단 한 곳도 없었다. 2900억원이던 매각 예정가 역시 최근 2614억원으로 낮춰 제시했지만 매각에는 실패했다. 과천에 위치한 한국농어촌공사의 부동산 매각이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매각 대상 예정지의 상당부분이 녹지(그린벨트)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녹지로 인해 개발이 제한된 만큼 매입 후 개발효과가 미미할 것이라는 예상 탓에 부동산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는 분위기다.
도심에 자리했어도 높은 가격으로 인해 매각에 어려움을 겪는 곳도 있다. 경남 진주로 옮겨가는 LH공사가 그렇다. LH공사는 현재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의 오리 사옥과 정자동의 본사 사옥을 동시에 매각 중이다. 하지만 오리 사옥은 4015억원에 매각하려 했지만, 4차례 유찰을 겪으며 3525억원으로 가격이 뚝 떨어진 상태다. 서울대병원이 관심을 보였던 정자 사옥 역시 매각이 지지부진하다.
도심에서 살짝 떨어져 있는 한국가스공사(1181억원)와 한국도로공사(2972억원)도 잇따른 유찰에 기존 사옥을 남겨둔 채 대구와 김천혁신도시로 옮겨간다. 신용보증기금도 마포구 본점(1019억원)이 7차례나 유찰되며 일단 본사 건물을 비워둘 예정이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지방 이전 대상 공기업들의 종전부동산들은 입지가 좋은 일부를 제외하고, 외곽이나 개발이 어려운 규제에 묶인 곳이 상당히 많다”면서 “이 때문에 부동산 투자자인 사모펀드와 금융사 및 기업체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곳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정부가 대신 나서기도 한다. 규제에 묶여 매각이 어려운 경우 지자체에 용도변경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하는가 하면, 매각 예상가격 인하 허용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그 결과 정부는 캠코를 통해 자산매각이 지지부진한 공기업의 부동산을 강제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산하 공공기관운영위원회는 9월 말로 예정된 공공기관 부채 감축 중간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자산매각 실적이 부진한 공기업들의 자산을 캠코가 강제 위탁받아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정부는 KOTRA와 부동산 자산관리회사인 젠스타가 공동주관하는 ‘종전부동산 투자설명회’라는 로드쇼를 통해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6월과 9월 설명회를 개최한 데 이어 오는 10월과 12월에도 설명회 계획이 잡혀 있다.
금융권, 입지 좋은 부동산에 관심
지방으로 이전하는 공기업들의 부동산 매각에 정부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부동산 매물폭탄을 염려하던 투자자들도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규모 부동산이 매물로 동시에 나오는 만큼, 조금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좋은 부동산을 인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곳은 금융권이다.
특히 한국투자증권은 전담팀을 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TF팀에 한국투자증권, 한국투자신탁운용, 한국투자파트너스 등 계열사 내에서 부동산을 담당하는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LH공사 역시 보유 자산 매각을 위해 대형 디벨로퍼와 접촉 중이다. 오리 사옥과 정자 사옥이 잇달아 유찰된 후 공개 경쟁 입찰에서 개별협상 방식의 수의계약으로 전환한 뒤, 2~3곳의 대형 투자자들과 접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녹지로 인해 개발에 제한을 받고 있는 도로공사 역시 건설사들을 대상으로 매각을 검토 중이다. 한 도로공사 관계자는 “자연녹지의 경우 3층 이하 타운하우스를 지을 수 있어 고급 단독주택 전문 건설업체에 매각 의사를 타진 중”이라며 “인근에 판교와 강남, 경부고속도로 등이 자리해 입지조건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기대만큼 매각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부동산 시장이 여전히 침체기에서 벗어났다고 하기 어렵고, 서울 도심의 오피스 공실률이 상승하고 있는 상황이라 공기업 종전부동산의 낙찰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다”면서 “종전부동산의 용도변경과 예정가 인하를 통해 매각 확률을 높일 수 있지만, 헐값 매각 논란과 국부 유출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후폭풍이 있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침체기를 겪고 있는 부동산 시장에 핵폭탄급 충격을 줄 수 있는 공기업 및 공공기관 종전부동산. 기한을 정해놓고 매각을 진행하기보다는 유연한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