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은 금융이론을 공부하는 해인 것 같다. 영국에서 리보 금리 조작 가능성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더니 한국에서도 정부가 CD 금리의 조작 여부를 조사하겠다고 밝히면서 한동안 시끄러웠다. 이러다 보니 금융이론에 관심 없던 사람들도 대출의 기준금리, 가산금리 등 과거 기업체의 자금 담당자들이나 관심을 가졌을 법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대출 기준금리의 적정성 등 금융 이론적인 영역이 대중의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국민정서법에 의해 금융정책의 방향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됐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논쟁의 방향이 각종 사회문제에 대해 객관성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시대적 정서와 맞물려 진행되고 있어 상당기간 동안 되돌리기 어려운 방향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금융회사가 대출 시 부과하는 금리 수준 결정방식을 객관적으로 투명하게 밝히도록 요구를 받다 보면 금융회사가 금리를 결정하는 방식이 모두 같아지는 문제점이 나타날 수 있다. 다른 금융회사와 다른 방식으로 금리를 결정하는 경우 왜 다른지를 설명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된다.
이상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을 논의하기 전에 금융회사의 핵심 경쟁력은 어디에 있는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금융회사의 핵심 역량은 대출 거래처의 미래를 잘 예측하는 것이다. 나도 나의 미래를 모르는데 남의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하는 일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금융업은 업무의 속성상 잘 모르는 미래에 대해 예측하고 이를 기반으로 거래처에 대한 가격을 매기는 일을 해야 한다. 이러한 역량의 차이가 금융회사의 성과의 차이를 결정한다.
금융회사의 업무가 자기 책임의 원칙에 따라 추진되는 경제에서는 미래를 확실하게 볼 수 있는 타임머신이 존재하지 않는 한 금융기관의 미래 예측은 모두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동일한 개인이나 기업에 대해서도 금융회사별로 대출금리가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어차피 미래는 한가지로 실현될 수밖에 없으니 한가지로 예측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나 위험한 생각이다. 모든 금융회사가 모두 잘못된 예상을 할 경우 국민 경제에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택가격은 떨어질 일이 없다고 모든 금융회사가 예상할 때 금융회사 자산 포트폴리오의 위험성은 극대화되며 이러한 위험성이 현실화될 때 서브프라임 위기 등 각종 금융위기가 나타난다.
금융회사의 업무 특성이 이러다 보니 금융회사의 미래예측업무, 다시 말해서 금융회사의 고객에 대한 가격 결정업무에 대해 확신을 갖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신용평가 회사들이 특정 개인과 기업의 신용도를 등급으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는 참고자료일 뿐 금융회사의 대출 및 가격 결정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주지 않는다.
한국 경제에는 얼마 전까지 미래가 거의 확실하던 시절이 존재했다. 사실은 미래가 확실하진 않았지만 확실한 것처럼 운영하던 시절이 있었다. 바꿔 말하면 우리나라에는 금융회사들의 업무추진에 있어서 획일성이 가장 중요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부주도형 경제개발기가 바로 그때인데 선진국 따라잡기가 지상과제였던 시기다. 따라잡기 전략이 성공할지 말지는 불확실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주체들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선진국을 따라 잡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 성공의 결과가 오늘날 한국 경제다.
정부주도형 경제개발기에 금융기관이 대출 거래처를 다변화하는 등 리스크 관리를 하는 것은 사치한 일이었다. 은행은 정부에서 만든 공통적용 평점표를 활용해 기업에 대한 대출 여부를 결정했다. 은행 대출을 받아 사업을 하고 싶은 기업은 정부가 정한 평점표 기준을 충족시키거나 평점표를 자신에 맞게 고쳐야 했다. 평점표를 직접 만들거나 사실상 승인해주는 금융당국이 강력한 힘을 갖게 됐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부 주도형 금융산업 운영은 초기에 자주 실패한다. 도입한 외자의 투자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부실기업이 양산되는 경우가 있었고 이때마다 정부가 나서서 구제금융을 지원하고 부실기업을 다른 기업에 인수시켜 정상화하는 일이 되풀이 됐다. 이렇게 운영되던 정부 주도형 금융산업 운영체계가 가장 크게 실패한 사례는 1997~1998년의 외환위기였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정부가 가장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던 일 중 하나는 이상과 같은 금융 관행을 깨는 일이었다. 그 중의 핵심은 은행별로 대출 기준을 차별화하는 여신관행을 도입하고 이것이 잘 되도록 하는 일이었다. 부실기업 처리에 있어서도 부실기업이냐 아니냐의 판단부터 은행별로 다르게 만든 기준에 따라 하게 했다.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된 배경에는 한국 경제의 발전 단계가 정부가 정한 획일적 대출 기준으로는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과거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 외환위기의 원인 중의 하나라는 판단이 있었다. 즉 모든 은행이 동일한 대출 결정 기준을 갖는 금융운영 방식은 은행의 리스크 관리를 불가능하게 해 경제위기를 유발했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회사의 리스크 관리체계 변화는 대출 의사결정의 자율성 확보가 핵심이었다. 은행별로 자율적 리스크 관리체계를 만들되 감독당국은 일정 기준에 맞으면 사용을 승인해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개별은행이 가진 리스크 관리 모델의 성공 여부를 감독 당국은 보장하지 않았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정책 체계의 변화가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의 금융산업은 금융기관에서 금융회사로의 전환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 완전히 다른 산업이 됐다. 이러한 성격 전환의 결과 정부의 역할은 금융회사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게 할 것인가를 걱정하는 데서 무슨 일을 못하게 할 것인가를 걱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 전개를 보면 이상에서 설명한 금융산업의 성격 변화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 대출 기준금리를 CD 금리로 할 것인가 가중평균 금리로 할 것인가를 정부가 고민하도록 요구하고 있고 기준 금리에 부가되는 가산금리 결정방식에 대해서도 정부가 방침을 제시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좋은 의도로 정부를 다그치고 있다고 생각되나 결과는 우리나라 금융산업을 과거로 되돌아가게 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증시 속담에 ‘합창하면 반대로 간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속설을 금융산업 전반에 적용해보면 ‘합창하면 망한다’로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당장에는 답답하고 혼란스러워 보여도 개별 금융회사들이 자기 책임하에 다양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 때 금융산업은 발전한다. 이제는 뭉치면 다 함께 망할 수 있는 세상이다.